제35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창문은 열고 싶다
제35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창문은 열고 싶다
  • 편집국
  • 승인 2007.08.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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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오(광주교대 국어교육2), 삽화 김수정(본교 동양화2)
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
새벽 거리를 저미는 저 별
녹아 마음에 스미다가
파르륵 떨리면
나는 이미 감옥을 한 채 삼켰구나
유일한 문밖인 저 별
- 장석남

“즐거운 아침이 되고 계십니까? 아침 바람이 상쾌하군요…”
흔들리는 버스에 아나운서의 말이 또록또록 하게 울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버스의 진동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승객들을 향해 제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는 막 주유소 사거리를 우회전했고 예술회관 거리를 달렸다. 차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 잠들기가 일쑤라 오프닝 멘트 외에는 그다지 들어 기억나는 내용이 없는 프로였다. 하지만 제목만은 그럴 듯 했다.
“무지개를 타고 오는 아침”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싱그러운 목소리는 여전했고 차창에 부딪혀 터지는 빗방울마저 시원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차창을 조금 열어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차창을, 빗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 열자 아직은 덥혀지지 않은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러자 차내에 스며있던 습기와 진동음과 라디오의 음악이 그 실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듯 싶고 나는 살며시 졸음이 쏟아졌다. 빗줄기는 약해지고 있었지만 금주쯤에 더 많은 비가 온다는 소식도 있었다.
1교시 수업임에도 더위는 한껏 달아올랐다. 아이들은 졸거나 다른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더위를 쫓기 위해 학원을 빠져나가는 아이들과 아예 더위에 지쳐 책상 위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의자에 붙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상대였다. 1년여의 시간을 수능시험을 향해 내달리는 재수생들에게 여름의 더위는 두렵고 버거운 도전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이겨야했다. 30여평 정도 되는 강의실에 1백여명의 학생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앞자리는 앞자리대로 너무 가까워서, 뒷자리는 뒷자리대로 너무 멀어서 칠판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이곳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강의실의 작은 책상 너머에서 자신들의 실현될 꿈을 환영처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독한 환영
은 학원 내의 모든 환경에 의해서 재생산되었고 강사의 입을 통해서나 친구들의 넋두리에 의해서도 퍼지고 있었다. 그 기대가 없다면 아이들은 여름의 더위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었다. 때로 꿈은 현실이라는 미로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도 같았다. 꿈꾼다는 것은 꿈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였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좀더 가까웠다. 힘들 때면 달콤한 영광의 체험보다도 안온한 단잠의 한 때가 오히려 더 간절한 소망이듯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성취되었으면 하는 삶의 에너지들은 참고서가 아닌 꿈속에서 퍼올려지고 있었다.
현실의 에너지는 미래, 그것도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가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날의 아담한 숲 속에 몇 그루 나무쯤으로 서 있으며 아담한 숲 그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자주 꿈을 꾸듯 그 숲 언저리를 서성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 풍경에는 은행나무와 함께 오래된 수종이라는 메타세퀘이어가 나란하게 서있고는 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은 나를 이끌었다. 저물녘 황혼 속으로 빠져드는 길 위에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노라면 내가 걸어온 길이 이미 황혼 속에 빠져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앞으로도 뒤로도 걸음을 떼지 못하던 풍경, 그 황홀한 배경에 압도되어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둠을 맞고는 했다. 시험에 찌들어 살 때는 그 어두움의 끝이 학원의 컴컴한 복도로 연결되기도 했고 간혹 내 방의 피곤한 침대 머리맡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해서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4차원의 터널이 있다면 분명 그 풍경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꿈과 현실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 풍경 속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는 중독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몽롱한 초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이나 칠판이 아닌 다른 사물들은 뿌옇게 흐려졌고 창문에 비취는 제 얼굴은 영혼마저 말라보였다. 일상은 명료함 없이 그저 흐릿하게 창문을 통해 꺼져 내려가고는 했다. 그런 막연한 기분은 아이들의 것만이 아닌 나의 감정이기도 해서 빗물이 떨어지던 오늘 아침 같은 날이면 흘러내리는 빗물이 마치 어떤 흐느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져 일그러지는 얼굴을 대한다는 것 자체가 힘에 겨웠다. 풍경은 꿈틀대며 미끌어지고 흐느끼는데 정작 실체는 자신의 슬픔을 단 하루도 위로해 줄 수가 없을 때,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스물 셋의 초췌한 눈두덩이 안에서 풍경은 눈물처럼 풀어지고는 하였다. 어둠침침한 강의실 안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무성했다. 그런 밤에도 간혹 외로운 흐느낌이 책갈피 사이로 새어 나오기도 했지만 나를 포함한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서둘러 그런 밤들이 끝나버리기를, 악순환이 끊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탕을 중심으로 까맣게 모여드는 개미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한 마리가 모이다가 나중에는 아예 징그러울 정도의 숫자가 모여들었다. 사탕을 핥아먹는 건지 녹은 사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개미들은 줄기차게 모여들었다. 붉은 사탕이었다. 개미들의 푸짐한 식탁이 된 그곳은 개미들에게 진득진득한 오아시스였다. 개미들은 사탕을 핥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탕 너머의 신기루를 향해 모여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때가 있었다. 더 큰 사탕이나 더 큰 사탕을 만들어 내는 진원지를 찾아, 냄새도 아니고 앞서 간 개미들의 발자국의 흔적도 아닌 개미들의 더듬이에 전파처럼 걸린 그 사탕의 샘 너머, 오아시스를 넘어…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이면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사탕의 주위에는 사탕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점점 건조해져 가는 아이들은 다가오거나 물러서는 여름의 발자국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름은 예민한 계절이었다. 책받침을 가지고 연신 부채질을 하는 아이들과 그러다 지쳐 잠이 드는 아이들과 그도 아니면 PC방이나 당구장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아이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은 그야말로 불만과 불안정의 카오스였다. 매 시간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사수생인 내 경험으로 봐서 여름의 집중은 실력향상과 거리가 멀었다. 오로지 담금질의 계절이었다. 한계상황에서의 불안과 욕망, 터지지도 못하고 위태롭게 쌓여만 가는 시간들은 잠금장치가 고장나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폭약 같았다. 그 폭약 같은 나날들이 내지르는 고요한 괴성은 어쩌면 당연한 욕망의 변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이들로 하여금 너그러움이 미덕일 수 없게 했다. 재수 생활은 독한 자기편향적 노력이나 침묵, 혹은 제 몸의 혹사를 미덕으로 삼게 하고는 잠자리에 가기까지 왜곡된 그 미덕을 확인시켰다. 가히 가학의 경지라 할만큼 8월의 여름은 젊은 날의 혼돈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갔다.
뒤쪽에서 참다 못한 종수가 책상을 밀치며 교실 뒷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가끔 생기는 일이라 아이들이나 강사나 놀라지는 않았으나 이런 분위기가 우리의 감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되어져 가고 있다는 게 나는 서글펐다. 종수가 나가고 채 5분이 안되어 1교시 종료벨이 울렸고 곧이어 벽에 걸린 사각형의 구식 스피커에서 학원 안내 방송이 울려나왔다. 우리반 실장인 상태를 교무부장이 호출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상태는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잠시 후 2교시가 시작되었고 상태가 들어오기 전에 교무부장인 국사선생이 먼저 들어왔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백성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대해 조용조용 읊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평소에 비해 저음으로 굳어 있었다. 더위 때문만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목감기 때문만도 아닌 것 같았다. 상태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이름 있는 학원이라고 실력 있는 강사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국사 선생은 이사장의 친척으로 학원 교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동이 잦은 학원계에서 10년이 넘도록 전직 없이 이 학원에서만 근무하고 있었다. 사수생인 나는 강사들의 신상과 소문에 대해 들은 게 많았다. 해서 이제 재수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그리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국사 선생은 이미 젖어버린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닦으며 교탁을 좌우로 왕복하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아이들로 하여금 책을 덮고 잠에 빠져들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침 일찍 학원에 오느라 허기지고 피곤한 아이들에게 알찬 교과 내용 대신 단잠을 제공하고는 했다. 더위와 허기와 피곤을 뚫고 다다른 곳이 재수학원 4층, 비좁고 냄새나는 강의실이라니, 애석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결정했든 부모가 결정을 했든 그것은 작년 입시 이후의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에 온 아이들은 대개 곧장 대학에 입학한 아이들에 비해서 자기 초월 성향이 높은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꼭 자기가 바라는 땅에 뿌리 내리고 싶어하는, 상대적으로 욕망의 뿌리가 강한 식물들이었다. 때로 내디딘 땅이 자기가 바라 마지않던 흙이 아닐 땐 웃자라거나 꽃을 피워내지도 못하고 고사해버리는, 그래서 이제는 재수학원이라는 음침한 공간에서 햇빛 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인공조명 아래서라도 잎을 말아 올려 광합성을 하고 열매를 맺어야하는 음지식물들이었다. 설혹 그 세월이 몇 해가 걸리게 될지라도 아이들은 세상과 자신을 향해 칼 한 자루씩 같은 굵은 욕망의 뿌리를 마음속에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 가슴에 품고 있을 칼을 꺼낼 줄 몰랐다. 간간이 뿌리가 타들어 가도 제 가슴만 쳤다. 더 열심히 물을 주고 키우지 못한 탓이라며, 가슴속에서 제 뿌리가 푸르게 녹슬어 가는 것도 모르고.
2교시가 끝나도록 상태는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도 안 되는지 짝꿍인 정우는 국사책을 뒤적거리면서 지루한 국사선생의 강의만 듣고 있었다. 오히려 상태와 대화 한 번 하지 않은 내가 더 궁금해하고 있었다. 오전 자율학습 시간에 비밀리에 실장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의 리더격인 상태에 대한 호출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상태는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책을 꺼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 심각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정우는 그런 상태를 곁눈질로 쳐다볼 뿐 말을 걸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공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종료벨이 울렸고 상태는 갑자기 오른 주먹으로 책상을 힘껏 내려쳤다. 분노였을까? 그 분노의 의미가 궁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사 선생은 놀랐다기보다는 성난 눈으로 상태를 쳐다보고는 교실을 나갔다.
상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내 추측에 그 일은 학원과 관련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애매한 시기에 교무부장이 그를 호출했다는 것과 어지간한 일로는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상태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기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나라도 묻고 싶었던 참에 정우가 투박하게나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아무 일도”
상태의 오른쪽 눈언저리가 떨렸다.
“정말?"”
퉁명스러운, 알고 싶지 않지만 짝꿍이니까 마지 못해 묻는다는 투였다.
“그래. 임마. 그만 물어. 너 별로 알고 싶지도 않잖아”
서운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상태는 미안해서인지 정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공부나 열심히 해”
“그래, 공부는 잘 할거니까. 그런 말은 안해도 돼. 하지만 형은 형이잖아”
정우의 말이 끝나자 상태는 멍하니 칠판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이 국사선생이 그려놓은 한반도를 지우고 있었다. 그날 당번인 아이들은 칠판닦이를 들고 교단 위에서 큭큭 대며 장난을 쳤다. 뒷모습만 보이면서 귀엣말로 속닥이는 모습이 초등학생 아이들 같았다. 상태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모임 가질거야”
“……”
정우는 말없이 상태만 보았다.
“나, 실장모임 꼭 가질거라구. 놈들이 뭐라 해도 말이야”
호출 받은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태의 감정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었다. 상태는 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정우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 앞문이 다시 열리더니 상태가 들어와 정우에게 말했다.
“3교시 시작 인사 좀 해. 나 누나한테 전화할 게 있거든. 얼른 하고 올게”
상태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아 책상 사이의 통로는 가방과 책상자와 그 위를 오가는 아이들로 어수선했다. 피곤한 지 기지개를 켜는 아이들도 보였고 옥상이나 복도 계단에서 담배 한 개피 피우고 들어옴직한 아이들도 보였다. 잡담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까지 합하면 교실은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키가 작은 여학생들은 화장실 가기도 힘들었다. 통로가 너무 좁은 탓이었다. 그 좁은 곳에 가방과 책상자까지 놓아두고 있으니 차라리 소문처럼 참는 데까지 참는 게 더 나을 지도 몰랐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하는 식으로 최대한 이동량을 줄여 자신이 지금 재수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내고 싶지 않아 했다.
나 또한 움직임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참이었다. 4 년간의 경험은 내게 여러 가지 생존전략을 일깨워 주었다. 좁으면서도 정반대로 가장 넓은 곳이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이었다. 앉아 있는 동안에는 방해받지 않고 홀가분한 상상에 빠질 수 있었다. 공부가 되든 잡념이 되든 그 공간만은 고유한 영역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거나 상상 속에 빠지다보면 몸을 겨우 끼워 넣을 수 있었던 책상과 걸상 사이의 빠듯한 공간이 넓어졌다. 착각이었지만 그 착각 안에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담겨 있었다. 지독한 현실인식이 만들어 낸 비현실에 대한 탐닉이었고, 그 착각이 허용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단 하루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학원에서의 침묵은 온전한 침묵이 아니었고 대화 또한 순전한 대화로 보기 어려웠다. 내가 운동량을 줄인 다는 것도 온전하게 운동량을 줄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넓은 공간을 찾아 떠나는 안간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악취와 열기가 들끓는 복도와 화장실엔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복도의 형광등은 턱없이 조도가 낮았고 어둠침침했다. 그런 어둠침침한 장소에서 오며가며 부대껴야하는 번잡스러움은 학원 생활에서 겪고 싶지 않은 것들 중의 하나였다. 감옥 같은 입시 학원은 바깥으로 향하는 창문보다 더 많은 교실문을 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두움은 그런 탓일지도 몰랐다.
“차렷! 경례!”
상태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3교시는 시작되었다. 정우는 상태가 나간 후 외던 영단어장을 여전히 왼손에 쥐고 있었다. 사회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한 정우는 계속해서 영어단어를 공부했다. 한 교실에 학생수가 많다보니 종합반이라고는 해도 자신이 필요한 과목만을 선별해서 듣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강사들도 단과 강의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우에게 사회과목은 취약한 과목이 아닌 듯 했다. 교실에 앉아서 자신의 강의를 무시하고 다른 책을 보는 학생들이 괘씸하게 생각될 듯도 하건만 강사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학원 강사들은 대개 교육적인 태도보다는 인기를 중시했다. 자신의 유명세를 금전적인 이득으로 곧바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명 학원에는 학원생만큼이나 학원 강사들의 줄서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학원에 들어온 강사들은 오너인 이사장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거역을 하는 강사가 있다면 아마도 그 강사는 다른 학원에 이미 계약을 마친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사회 강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다양한 권력 유형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정치권력 외에 경제권력, 언론권력, 문화권력, 노동권력 등 예전에는 권력일 수 없었던 것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참이었다. 그 때 조용히 문을 열며 상태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금방 온다며?”
정우는 상태에게 소곤거리듯 물었다.
“얘기가 좀 길어졌어”
상태도 역시 강사를 의식하면서 소리 죽여 말했다.
“누구하고? 누나하고?”
정우는 궁금했는지 덧붙였다.
“응”
잠시 동안 대화가 끊겼던 둘은 사회 강사가 권력의 오만한 부도덕성에 열변을 토로할 즈음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말문은 상태가 열었다.
"누나가 요즘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고민하다 다시 전화를 했어. 일단 오늘 오후까지 그 돈을 보내주면 오래지 않아 내가 과외 선불을 받아 보내주겠노라고”
정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상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태는 실장이었고 성적도 좋아 전액 장학금에 학업장려금까지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오후가 마감인 학원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원비라니? 장학금 받잖아?”
정우가 물었다.
“이번 달부터 끊겼어. 교무부장과 관리과장이 그만 주겠대”
상태는 내가 뒤에서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실장을 그만 두면 실장 장학금은 안나온다 쳐도 시험 잘 봐서 받는 장학금 있잖아?”
정우는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지 따져 물었다.
“그건 다음에 얘기해줄게”
상태는 그만 대화를 접었다. 정우는 더 물을 것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상태의 말에 따랐다.정우와 상태가 언제부터 가까웠는지는 몰라도 정우는 상태를 꽤나 의지했다. 그럼에도 정우는 상태의 실장 일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만은 피했다. 지긋지긋한 재수생활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번씩이나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공부할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정은 정우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일전에 말해둔 것이 있어서 알 만한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반면 상태는 강사들이나 아이들에게 인정받고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 새로운 강사가 학원에 와서 첫 강의를 하게 될 때면 으레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 강사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사게 했고 그 후 강사와 학생들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또한 10교시 마지막 수업이면 피곤한 강사를 위해 시원한 음료수를 준비해 강사의 의욕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강사들의 입에선 상태에 대한 칭찬이 자주 흘러나왔고 담임도 그런 상태를 신뢰해 1학기 중간에 들어왔음에도 그에게 실장을 맡겼다.
상태는 1학기 중간에 전주에서 이곳으로 입시 유학을 왔다. 숙식은 학원 근처 독서실에서 해결하고 있었고 집안 형편이 넉넉한지 아이들에게 인심이 후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가는 곳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구장이나 식당에 갈 때도 그랬고 펀치를 치러 가자고 할 때도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따라 나섰다. 공부도 비교적 모범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상태는 생활의 기준이 분명한 아이였다. 상태의 노력 덕분인지 우리반은 착실하게 공부에 전념하는 반으로 통했고 담임도 말수는 적었지만 우리반을 신뢰하는 듯 했다.
재수 생활 세 번째인 나는 그런 상태를 지켜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지난 3 년간 학원에서 알아둔 아이들이 많아 대화의 상대를 더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학원에서의 친구들이 오래 가지 못하더란 것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대개 아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생각해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되지 못했다. 당락이 결정되면 아이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거나 다음 해를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막막한 친구들이 많았다. 또 학원이란 곳이 정신적으로 공황인 곳이어서 서로의 좋은 모습보다는 날카롭고 극단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좋은 만남이 쉽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바로 내 앞자리에 있는 상태와 정우를 바라보게만 된 것이었다.
상태 일로 신경을 써서인지 4교시까지는 아침을 굶었어도 참을 만하더니 막상 점심시간이 되고 나니 배가
요동을 쳤다. 슬러퍼를 벗어 걸상 아래 두고 신발로 갈아 신은 다음 나는 급히 문을 열고 나가려다 지갑을 놓고 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가방에서 지갑을 챙겨 옆 반에 있는 학교 후배 창선이에게 갔다. 점심은 학원 앞 아지매국밥 집에서 늘 같이 먹었다. 무슨 인지 창선이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려고 손에 드니 전화가 진동으로 울렸고, 창선이였다.
“형, 나 1층 현관 앞에 있어요”
창선이는 미리 나가있었다. 배도 고프고 창선이도 기다리고 하니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창선이는 나를 만나더니 다짜고짜로 물었다.
“형, 형 반 실장 무슨 일 있어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라니. 별 다른 일없었는데”
나는 상태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아니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무슨 일 있던데. 오전에 1층 서무과 상담실에서 아주 혼이 났어”
창선이는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실감나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나는 허기를 잊고 다시 오전 상태의 상기된 얼굴과 오른 눈자위의 떨림을 기억해냈다.
“그래 상태 오전에 교무부장이 방송해서 나갔어. 그리고 나서 상태도 이상해졌고 수업하는 교무부장도 얼굴이 많이 굳어있긴 했었어”
상태의 호출을 떠올린 나는 창선에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근데 넌 어떻게 그걸 봤지?”
“수시모집 때문에 상담실에서 얘기 하다가 상담실로 들어오는 교무부장과 상태를 봤어. 그리고 시작이 됐어”
창선이는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국밥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밥을 먹는 내내 창선이는 심각하게 말을 전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이해하려 애쓰며 사라진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창선이의 말대로라면 아니 창선이의 말에 조금만치의 과장이 없다면 상태는 지금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무부장이 그러더라고. 상태 너는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고. 지금까지 네가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올 수가 없다고. 그 말을 하고는 교무부장은 강의실로 올라갔어.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관리과장이 상태를 소파에 앉히고 말을 하기 시작했어. 너 뭐하는 놈이야. 지금 네가 데모하러 학원에 왔어. 너 같은 놈 없어도 우리 학원에 들어오려는 애들 꽉 찼어, 임마. 원서 내놓고 자리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애들이 몇 명 인줄 알기나 해? 그리고 네가 학원에 들어와서 낸 돈이 얼마고 받은 돈이 얼마나 되는 줄 계산해봤어? 학원에서 돈을 주면 알아서 제 역할을 다해야지…어디서 배워먹은 선동질이야. 전력 용량이 부족해서 당장 에어컨 용량을 키워줄 수 없다면 그런 줄 알고 아이들 잘 달래 공부나 해야지, 실장 대표라고 네가 비밀 모임을 부추겨. 그리고 전체 의견을 물어 집단의견을 제출하겠다고?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야’
대강 창선이의 말을 기억해보자면 이랬다. 나는 교무부장과 관리과장이 반복해서 말했다던 그 돈이란 게 몹시 궁금했다. 상태가 돈을 받고 학원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는 게 사실인지.... 그 여유 때문에 아이들에게 돈을 후하게 쓸 수 있었는지.... 덜컥 겁이 났다.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설사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앞으로 세 달이 채 남지 않은
수능 시험을 제대로 대비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험에 지장을 받는다는 것은 수험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오직 그거 하나 때문에 1년이란 시간을 포기하다 싶이 살아가는 가는 아이들이었다.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 하는 결론보다는 설왕설래하는 과정 중에 흘러가 버리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그때 아이들이 보여줄 속단과 외면.....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것은 수험생활 중에 생기는 여 러 종류의 문제 해결을 왜곡시키거나 미루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거였다. 문제는 발생하지만 도무지 해결되는 법 없이 덮어지고 만다는 것. 친구, 학원, 가정 문제 할 것 없이 다 그러했다. 결론이 없었다. 그래서 학원 친구는 제한적이었고 학원 문제는 외면당했으며 집안 문제엔 혼자서만 속을 태웠다. 더우면 덥다고 말하고 에어컨을 고쳐주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저 참기만 했다. 인원이 너무 많다고 교실에 학원생을 그만 좀 집어넣으라고 항의하면 될 것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보다 못한 상태가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는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시험지 위의 상황은 능숙하고 신속하게 풀어나가지만 아이들의 실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판단력은 헛점 투성이었다. 아이들은 속단과 외면으로 일관하거나 이저저도 없이 아예 감정적 유행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차분한 이해와 현명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어쩜 미련한 짓일지도 몰랐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맛없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고는 한없이 맑으면서도 숨막히는 8월의 하늘을 바라봤다. 원망스러웠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일장기처럼 태양 하나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상태는 아니었다. 상태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사수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올해로 끝내기로 한 일이었다. 더 이상 끌지 않겠다는 맹세를 채 3 개월이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와서 깰 수는 없었다. 지난 3년의 경험은 내게 낙방 후의 두려움을 한결 같이 말해주었다. 모든 것을 잃거나 포기하더라도 합격을 하면 다 용서가 되고 모든 것을 얻어도 시험에 낙방하면 다 잃는 것이라는 얄팍한 논리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논리를 신봉하며 살고 있었다. 아니 그대로 생활해서 꼭 합격하고 싶었다. 해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자괴감에 가까웠다. 피폐한 얼굴을 비오는 창가에 서서 바라보면서도 조금만 더 참자는 말 외에 어떤 위로도 던질 수 없는 아침의 서글픔 같은. 하늘은 언제나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피우지도 않은 채 깨물고 있던 담배를 투 하고 뱉으면서 옥상 구석에서 돌아섰다. 히히덕 거리는 아이들의 대화는 계속 되고 있었고 매점에서 나오는 에어컨 환풍기 소리는 내 신경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단순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주는 아이들의 눈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문득 상태가 교실에 들어와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덥고 긴 오전이 지나고 있었다.
상태는 자리에 없었다. 정우는 영단어장을 쉼 없이 외고 있었다. 6교시 시작벨이 울렸고 곧 이어서 상태는 들어와 앉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수업을 받았다. 현대 청소년들의 불안과 일탈을 언급하던 강사는 그에 못지 않게 시대와의 타협에도 능한 것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소시민적 경향을 어려서부터 체득하고 있는 현대 청소년들에 대한 우려 와 그러한 청소년들이 만들어 갈 미래 사회에 대한 우려였다. 상태가 정우에게 말을 건넸다.
“일이 어렵게 되어 가”
“어렵게라니?”
정우는 되물었다.
“이 자식들이 나보고 나가래”
상태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가라니? 어딜 나가? 형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정우가 화가 난 듯이 말하자 상태도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일단 오후까지 학원비를 내면 놈들도 쫓아낼 수는 없겠지. 억울하게 나갈 수는 없어”
“하지만 오후에 형 누나가 돈을 부쳐주지 않으면 어떡해?”
정우는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이 9월 학원비 마감일이었다. 대개 마감일을 넘겨서 내도 미리 담임이나 서무과에 말해두면 무방한 일이었으나 상태의 지금 상황은 그런 융통성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걱정마. 보내주기로 했으니까. 이 시간 끝나고 확인해봐야겠다”
상태도 조금은 걱정이 되는 듯 보였다.
“형, 근데 장학금은 어떻게 된거야? 그건 주라고 해서 받아야하잖아”
정우는 오전에 궁금했던 것을 다시 물었다. 그 장학금을 받는다면 굳이 누나에게 부탁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성적이 상위 5%안에 드는 걸고 알고 있는 상태가 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나도 의아했었다.
“실은 그게 사연이 좀 있다. 내가 전주에서 막 이 학원에 왔을 때는 성적이 좋았었어. 그런데 객지 생활의 피로 탓인지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더라고 그래도 괜찮았었는데 지난달엔 엉망으로 성적이 나왔어. 쥐꼬리만한 장학금도 받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교무부장이 나를 부르더라고. 공부하는 태도가 좋고 가능성이 보이니 실장 장학금에 보태줄테니 아이들한테는 성적 장학금 받는 걸로 하고 열심히 공부해보라고. 그래 어디 돈 나올 데도 없고 해서 그 돈을 받은 거였어”
상태가 말을 하는 도중에 정우가 끼어들었다.
“그럼 지난달에 받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달엔 성적이 잘 나왔잖아. 그건 받아야지”
“이번달 장학금은 지난달에 미리 줬으니 이달엔 줄 수 없대”
상태는 상심이 되는 지 고개를 숙였다.
“비겁한 놈들…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미워지니까…”
정우는 혼잣말을 내뱉었고 상태는 말을 이었다.
“내가 정신이 없었어. 학원비를 미리 준비하든지, 객지 핑계 대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둘 것을”
“놈들이 이럴 것을 미리 알고 그랬을까?”
정우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그때는 이럴 줄 몰랐을 거야. 단지 상황이 에어컨 문제로 겹치다 보니 날 쫓아내려는 것 같아. 그게 쉽잖아. 몇 천 만원을 들여 에어컨을 교실마다 새로 교체하느니 나만 하나 다독거리거나 내보내는 것이”
상태는 나름대로 놈들의 의도를 날카롭게 읽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다. 그렇다 해도 형을 내쫓는다는 게 말이 되!”
정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흥분이 실려 있었다.
“아니야. 날 쫓아내려는 것은 단지 나를 겁주려는 것일 수도 있어. 나를 이용해서 에어컨 문제를 값싸게 해결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
상태는 놈들의 다른 의도에 대해 한 마디 덧붙였다.
“형을 부리고 싶은 게로군”
정우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가지 않는다. 경솔하게 돈을 받은 건 잘 한 일이 아니지만 왜곡하는 놈들의 악의적인 소문과 매도에 쫓겨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고”
상태는 상황이 어려움에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런 태도라면 상태를 믿고 있는 실장단의 힘을 빌어 상태 자신의 오명과 에어컨 문제를 해결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6교시 종료벨이 울렸다. 작고 네모난 스키퍼에서 다시 학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얼마 후에 치를 모의고사비를 오늘까지 완납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온 방송의 내용이 석연치 않았다. 모의고사비를 실장이 아닌 서무과에 직접 가서 내라는 것이었다. 일부 실장들이 그 돈을 유용해 모의고사비 수금이 지연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의고사비를 걷고 있는 상태에게는 꺼림칙한 방송임에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삼 년간의 학원생활 중에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방적 성격을 띄고있는 안내 방송을 통해 그런 드문 일이 전파된다는 것이 어색했다. 그런 일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의고사에 차질을 빚는 일은 없었다. 잠시 공금을 다른 곳에 썼다고 해도 마감 내에 모의고사비를 접수시켰던 것이 상례였다. 방송은 전체 실장들에 대한 불신을 아이들에게 파급할 소지가 있어 보였다. 아이들은 상태에게 낸 모의고사비를 다시 찾으러 몰려들었고 그렇게 쉬는 시간을 이용해 모의고사비를 다시 거두어가는 아이들의 입 속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간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빠가 돈을 잘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네…’
‘성적도 안되면서 장학금을 받았나…’
‘받은 모의고사비도 아직 안냈어요?’
‘에어컨 문제 해결 안 되겠는 걸…’
좁은 통로를 지나 끼리끼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아이들이 내뱉은 수근거림들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상태도 그 수근거림을 못들었을 리 없건만 표정과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내 얼굴이 어두워졌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의 말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의미 바로 아래에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진의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그 진의를 놓치고 있었고 속단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나는 이젠 수몰되어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궁벽한 시골의 할머니집에 놀러가고는 했다. 할머니집에 가다보면 작은 개울을 건너야했는데 그 위로는 나무 다리가 있었다. 나무다리에선 삐걱이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 소리를 끼익끼익 들으며 건넜다. 다리를 건너고 나면 할머니집은 바로 지척이었다. 다리를 건널 때 어린 삼촌은 나를 가끔씩 다리 아래로 이끌고는 했다. 항렬로는 삼촌이지만 나이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형이라는 느낌이 제격인 삼촌들이었다. 시골에 사는 어린 삼촌은 도시에 살고 있는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고 늘 내게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고는 했다.
먼저 바지를 걷어 올려 깊지 않은 개울에 들어간 삼촌은 내 바지도 올려주며 나를 개울 안까지 들였다. 삼촌은 절반쯤이나 잠겼을까 싶은 맨질맨질하고 까만 돌덩이를 하나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속에서 덮개돌만큼이나 까맣고 윤기나는 가재들이 헤엄을 쳐 나왔다. 필사의 탈출이었을 테지만 능숙한 삼촌은 가재의 집게에 몇 번 엄지손가락을 집히고는 오래지 않아 내게 잘생긴 가재 두 마리를 잡아 주었다. 나는 새까맣고 맨질맨질한 돌 아래 그렇게 예쁜 가재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무 다리에서 끼익끼익 소리를 들으며 내려다보는 개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되려 물 아래 오롯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재의 맨질맨질하고 윤기나는 등과 허우적대던 다리, 얼음보다 차가우면서 보드라운 물살이 손등을 간지르던 느낌, 그것이었다.
예상보다 더 빨랐다. 아이들의 속단과 곡해는 그것이 사실에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세등등한 소문의 형태를 띄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떠도는 유언비어의 형태가 아니었다. 소문의 발원지는 본래 찾아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런데 상태에 대한 소문의 발원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단지 개인이 아닌 조직이라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작은 게 아니었다. 학원은 불온한 유언비어의 진원지라는 비난을 감내할 수 있는 익명성과 집단성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재수생 몇 명을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소문에 대한 상태의 방어와 공격은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누구를 맞서 항의하며 누구를 향해 비난해야 하는지 막연했다. 소문은 유령 같아서 공격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의 수근거림이 더 크게 들려왔다. 내가 예민한 탓일 수도 있지만 교실은 온통 그 소리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상태의 의연하던 태도가 흔들릴까 우려되었다. 오명을 껴안고 물러서지 않겠다던 상태… 상태는 모의고사비를 다 내주고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책상 바닥을 발바닥으로 쓸고 있었다.
그 때 다시 작고 네모난 스피커에서 상태를 호출하는 방송이 퍼져 나왔다. 문제가 있는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들이는 말투였다. 방송은 교실 사방의 벽을 울리고 아이들의 수근거림과 섞인 다음 내 귓속에 메아리 되어 다다랐다. 아이들의 수근거림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격이었다.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많은 것들이 사실처럼 굳어져가고 있었다.
상태의 눈두덩이가 떨리는 게 보였다. 여전히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근거림을 들었을 정우도 미동 하나 하지 않고 연습장에 단어를 쓰고 있었다. 상태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다 채 한 걸음을 떼기 전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 간다. 놈들의 훼방에 요동하지 않을 거다”
상태의 결심은 더욱 완고해졌다.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서둘러야겠다. 이렇게 놈들이 날 급하게 몰아치는데……”
7교시가 시작벨이 울리고 상태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즈음 노크도 없이 교무부장이 앞문을 열었다.
“상태, 이리 나와. 어서”
일순 교실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교무부장의 말은 죄인을 다루듯 했고 상태는 그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수근거렸고 상태가 존경하는 영어강사는 교단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분을 감추지 않은 채 상태는 교무부장을 따라 나섰다. 상태의 뒷모습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영어 강사는 수업을 진행했다. 드문드문 빈자리가 많았다. 공부에 지쳐서라기보다는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한 탈출의 흔적들이었다. 점심을 먹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다. 등은 벌써 젖어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땀 배인 몸은 삐직삐직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강사는 그런 아이들의 심정을 이는 몰라도 젊은 시절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나는 구두닦이로 해서 안 가져본 직업이 없어. 어려서부터 떠돌아 다녀야했고 젊은 시절에는 방송국 근처에서 말하자면 스타들의 손발이 되기도 했어. 방송국 그것들 정말 지저분한 것들이야. 너희들도 연예인들 좋아하지 마. 그거 다 헛거야. 다 사기꾼들이라구. 그런데 너희들은 다 속지. 속지 마. 지금은 내가 수업 중이니까 다 전할 수는 없지만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야. 그리고 그후 공부 더 해서 대학 시간 강사 생활을 한 5년하고……”
강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화면은 각 강의실에 설치된 고정 카메라에 잡혀 강의 내용까지 상담실 브라운관에 전달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 강의실 구석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잊고 생활을 하지만 강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말조심을 해야했다. 언제 이사장이 그 화면과 강의 내용을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괜한 소리로 책잡히면 그것으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상태를 아끼는 영어강사마저 상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못했다. 단지 상태의 빈 자리에 가끔씩 와 닿는 그의 시선에서 상태에 대한 애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왜 떠돌아야 했는지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구두닦이가 되었는지 자신의 방송국 근처의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을 말하는 건지 어떤 배우의 생활이었길래 그렇게 한이 맺혔는지 그리고 그가 근무했던 대학까지, 나는 그가 말하는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지금처럼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는지까지. 대개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들은 다른 과목과 달리 전공이 영어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강사라는 직업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지내다가 학원쪽으로 흘러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변호사 개업했다가 망했다느니 대기업 이사까지 지내다 잘렸다느니 하는 설을 달고 다니는 강사는 서울 법대를 졸업한 수학강사였고 부인이 의사라서 놀아도 되는데 지루해서 심심풀이로 나온다는 설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젊고 잘 생긴 국어 강사였고 금년만 강사노릇하고 내년에는 까투리 같은 조그만 술집 하나 차려 술 마시러 오는 사람들 얘기나 들어주며 술친구 해주고 싶다는 설은 노처녀 지리강사의 몫이었다.
모두 믿을 수 없는 설일 뿐인데도 이슈가 없는 학원에서는 여학생들이 가수나 배우들의 일상에 일희일비하듯이 며칠씩 화제가 되다가 가라앉곤 했다.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던 영어강사는 이 정도의 더위는 아무 것도 아니고 일생을 두고 볼 때 일 년 정도의 고생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며 어려운 상황도 관점에 따라서는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누누이 강조하고는 수업을 끝냈다. 그가 강조했던 영문 번역 “Happiness is a thing to be practiced, like the violin - 행복은 바이올린처럼 연습되어지는 것이다” 가 눈에 띄였다. 연습되어지는 행복…나는 파란 볼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과연 행복을 연습하고 있는 건지 불행을 반복하고 있는 건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행, 불행의 사이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대문 밖이 저승이라”는 상여노래처럼 나는 행, 불행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내가 저주해 마지 않는 사수생활도 생각해보면 그리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행복을 연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느껴지는 대로 행, 불행을 느끼면서 지내고는 있는 것 같았다. 내 행복과 불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 감각의 가지에 걸린 열매들이었다. 행복의 열매와 불행의 열매… 숱한 상처와 희로애락의 매듭들…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아파트 계단에서 봤던 개미들은 다음날 아침이면 새까만 섬처럼 모여 자신들의 진득진득한 식탁에서 죽어 있었다. 그 죽음의 원인이 호흡 곤란에 있는지 아니면 착시에 의한 환영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덮고 있는 둥글고 진득진득한 샘 안에서 개미들은 행복한지 불행한지 말해주지 않은 채 새까만 주검들로 밤새 빛나고 있었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자신의 삶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주고 싶어했던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영어 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복을 연습하지 못한 삼 년의 세월이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사는 수업을 거의 자신의 인생담으로 마치고 교실을 나갔다. 상태는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교실로 들어왔다.
“또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 왜 그래?”
정우는 이제 짜증이 난다는 듯 말했다.
“아니야. 이제 다 알고 있으니 겁낼 것도 없어”
상태는 분노도 포기한 듯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일을 하면 되겠지? 내가 잘못한 게 없으니까. 이제 내가 할 에어컨 문제를 실장들끼리 모여 해결하면 되겠지? 그렇지?”
상태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정우는 그런 상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어보려다가는 입을 다문 정우가 상태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걱정마. 잘 되겠지. 형, 잘못 없잖아”
정우의 말은 헛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우의 눈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상태보다 더 분노로 차오르는 눈빛이었다. 빨갛게 충혈까지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이 굴었냐고, 더 잘 할 수 없었냐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정우는 계속 상태를 쳐다보지 못했다. 정우의 연습장에 영어강사의 속담이 겹쳐서 씌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얼룩 한 방울이 떨어져 번졌다. 상태는 말했다.
“오후로 앞당긴 실장 모임을 가져야겠어. 거기서 일단 결론을 내린 뒤 실장 대표 몇 명이서 이사장에게 가야겠어. 그리고 에어컨 문제를 해결해야겠어. 일단은 그게 중요한 문제니까. 공부는 공부대로 망치고 일은 일대로 꼬이고 게다가 이러다가는 학원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그럴 순 없잖아?”
정우를 위로하듯이 어깨를 두드리던 상태는 말을 계속 했다.
“내가, 그러니까 전주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어. 어머니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지. 단지 내가 타지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 지에만 관심이셨어. 그러던 여름 내가 심한 탈수 증세와 장염으로 일주일을 학교에 가지 못했어. 며칠이면 나아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석이 길어지자 학교에선 시골집으로 전화를 걸었나봐. 나중에 기억했지. 내가 왜 그때 자취방 주인집 전화번호를 학교에 쓰지 않았는지. 어머니는 거두던 고추도 그냥 두시고 한 달음에 자취방으로 오셨어. 그리고는 내 마른 입술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시며 얼마나 우시던지.... 난 그때 내가 죽을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니까. 몸도 거의 다 나아가고 있는 중에, 쉰 김에 며칠 더 푹 쉬고 완전히 나아서 가려고 했었는데 괜히 어머님 가슴에 시커먼 돌덩이만 더 매달아 놓았지 뭐야. 그 때 나는 생각했어. 어머니에 대해서, 그게 무슨 직업인가 하고. 졸업도 퇴직도 없는 이 놈의 천직을 어머닌 뭐가 그리 좋아서 기꺼이 자식들을 위해 내 밭 남의 밭 가리지 않고 품팔러 나가시는지… 참 가혹하다고…”
상태는 잠시 그때를 되짚어 보기라도 하려는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한 번 짚은 다음 정우의 영단어장을 든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해, 정우야. 너라도 흔들리지 말고 해야지. 내 걱정 말고 지켜보기만 해. 나서지도 말고. 어려워도 한 번 해볼테니… 열심히 해줘”
상태는 정우를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오로지 공부만 하려는 정우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8교시 정상 수업을 마치고 상태는 실장 모임을 하러 일어섰다. 나는 오후에 한 번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뻐근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맑은 공기라도 마시기 위해 복도 끝 창문에 얼굴을 내밀어 하늘을 보니 갑자기 위에서 상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상에서 나는 소리였다. 실장 모임을 옥상 끝에서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호기심에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냥 서 있을 수 없어 담배 한 개피를 빌려 입에 물었다. 상태는 실장들에게 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태의 표정과 실장들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뭔가를 자꾸 설명해주려는, 아니 해명해주려는 듯한 상태의 모습에 비해 실장들의 얼굴은 냉담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실장들 중의 한 무리는 상태에게 뭔가를 따지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의 수근거림에 대한 추궁인 듯 했다. 상태는 답답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무리의 실장들이 그만 내려가자며 손짓을 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모임은 끝나가고 있었다. 상태는 흩어지는 실장들을 다시금 불러 모으려 했고 돌아선 무리의 실장들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교실에 내려온 상태의 모습엔 초조한 테가 역력했다.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이제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결연한 빛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꾸 고개를 숙였다. 옥상에서부터 시작된, 아니 모의고사비를 다시 나눠줄 때 일던 수근거림에서 시작된 상태의 낙심이 더욱 깊어지는 게 아닌가 두려워졌다. 정우는 그런 상태를 알은 체 하지 않았다. 가끔씩 바라 보기만 했다. 그러나 상태는 그냥 넘기지 않으려는 듯 정우에게 말을 건넸다.
“나, 애들에게 말 좀 해야겠다”
정우는 그런 상태를 보며 말했다.
“말 해. 말해서 풀어야지. 그리고 누나한테 학원비는 왔어?”
“응, 아까 실장 회의하러 옥상에 가기 전에 들렀더니 바로 학원 계좌로 보냈대. 염려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해”
그 말을 듣고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진 정우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린 뒤 상태는 교단으로 올라갔다. 보충 수업 시작 전 쉬는 시간이라, 한 5 분 정도의 여유가 더 있었다.
“여러분, 저 좀 봐 주시겠습니까? 여러분께 할 말이 있거든요”
상태는 난전처럼 어지럽고 그 와중에 잠을 자는 아이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교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러분,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소문들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상태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소란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상태에 대한 소문들이 구석에서 하나씩 더 풀어져 나왔다. 상태는 그 소문들을 하나씩 해명해 주려고 했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그 배경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사실 확인 차원에 머물러서 대화가 끝나더라도 상태의 입장이 잘 전달되기는 어려울 성싶었다. 그럼에도 상태는 성실하게 해명하고 싶어했다. 성적 장학금은 성적이 안 됨에도 받은 거 맞고, 모의고사비는 아직 안 낸 거 맞고, 에어컨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거 맞고,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 상태의 입장에 대한 배려는 찾을 길이 없는 대화였다. 그럼에도 상태의 해명은 계속 되었다. 알아듣지 못하거나 사실 확인 뒤 다른 대화에 열중하거나, 아예 까놓고 비난하는 축까지 상태의 해명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보충수업 시작벨이 울렸다.
상태는 수업을 받기 위해 자리에 앉는 듯 했으나 곧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문을 열고 나갔다. 교단에서 내려오기 전에 상태는 아이들에게 사과를 했었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나 앞쪽에 앉은 나는 상태의 떨리는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교단에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무엇이 그리 미안한 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은 그의 마지막 사과를 건성으로 흘리며 상태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상태는 그 말을 끝으로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교실문을 열고 나갔다. 정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10교시 보충수업까지 마친 후 담임은 들어와 종례를 했다. 이 달에 나올 장학금 명단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의 이름이 빠져있었다. 실장장학금 명단에서도 빠져있었다. 상태를 걱정하는 종수가 왜 명단에서 빠졌느냐고 담임에게 따졌지만 담임은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받았기 때문이라고만 말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아이들도 있었다.
상태는 10시 30분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우는 상태의 빈 자리를 모르는지 계속 공부 만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상태의 책상 위에 '정우가' 라는 쪽지를 남겨두었다.

어제는 긴 하루였다. 어김없이 [무지개를 타고 오는 아침] 은 버스 안에서 또록또록 했다.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에 도착할 즈음에 알려주는 일기 예보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오늘부터 내리는 비는 앞으로 일주일 정도 계속 되겠습니다. 월요일쯤에 잠시 그치겠지만 필리핀 북동쪽에서 발달해서 북동진한 B급 태풍으로 인해 금주는 비가 계속 내리겠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입추도 다가오고 더위가 한 풀 꺾이겠습니다”
더웠는데 잘 됐다 싶으면서도 왠지 마음 한 켠에서 야릇한 실망감이 피어났다. 에어컨 문제는 이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상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제 집에 갈 때까지 있던 상태의 가방과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상태가 아침에 왔다 간 게 분명했다. 책상자까지 비워간 것을 보면 학원을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의 의자 위에 '상태형이' 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이제 에어컨 문제는 다 물 건너 갔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조금 있으니 애들이 교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우도 들어와서는 상태의 빈 자리를 확인하고 쪽지를 꺼내 읽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정우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정우는 늘 상태에게 미안해 했었다. 부모님 핑계 대고 상태의 일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태는 그런 정우를 이해해주고 여러모로 도와주었었다….
갑자기 교실이 분주해졌다. 관리 직원들이 들어와서는 교실 앞뒤에 유리창문을 조그맣게 뜯어내고는 거기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방송으로 반 별로 6명씩 학생들을 학원 정문 앞으로 불렀다. 조금 후 아이들은 어른이 들어가 목욕을 할 정도로 큰 붉은 플라스틱 대야에 얼음을 가득 채워 들고 왔다. 그리고 방금 설치한 환풍기 아래 하나씩 설치했다. 설명인즉 얼음이 녹으면서 교실에서 기화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교실이 시원해지고 그 냉기를 환풍기가 순환시켜준다는 거였다. 코미디 같았다. 순한 양 같이 무심한 아이들은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침 조회 전에 방송이 있었다. 에어컨에 대한 사과 겸 양해 방송이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초가을 장마비를 언급했다. 이 비가 그치면 더위가 한 풀 꺾인다고 하니 조금 참아보자는 것이었다. 왜 비싼 돈을 내고 더위를 참으며 공부해야 하는지 방송을 하는 교무부장에게 묻고 싶었다. 이사장의 사무실도 이렇게 더운지 묻고 싶었으나 아무도 그 방송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방송은 4일 남은 모의고사 준비를 더 확실하게 해야한다며 아이들의 머리 속에 수능 족쇄를 채우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초가을이 온다는 말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불안해했고 며칠 남지 않은 모의고사 준비로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렇게 코미디 같은 얼음 대야와 환풍기로 에어컨 수리 문제는 끝이 나는가 싶었다.
방송이 끝나자 담임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더위를 말끔하게 해결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나마 올해는 얼음 대야를 마련하고 환풍기를 설치해주니 오히려 덜 미안해 할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입시학원엔 학생들이 몰려들기 때문이었다. 수천 만원을 들려 에어컨을 수리하는 일은 기약이 없었다. 그리고 아예 아이들이 까맣게 잊어버린 것만 같은 상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개인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다고 자신이 잘 다독이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새로 실장을 뽑아야겠다고 말했다. 누가 새로운 실장으로 적임자인가 추천을 하든지 자천을 해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그 웅성거림은 상태에 대한 연민이나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머리 속에선 이미 상태가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임은 반갑게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상태 대신 수업 인사를 맡았던 정우라면 실장으로 괜찮겠다는 생각들을 하는 눈치였다.
정우는 말했다.
“여러분, 상태형을 이렇게 빨리 잊어도 되는 겁니까? 상태형이 정말 돈을 받고 뿌락치를 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닐 수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 안 해봤나요? 그럴 기회를, 그것을 해명할 기회를 한 번이라도 줬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상태형은 아침에 일찍 와서 짐 싸서 나갔습니다. 없는 돈에 누나에게 돈 빌려서 학원비까지 어제 낸 형이 오늘은 짐을 쌌습니다. 사과하면 다 입니까?”
정우의 말이 뜻밖의 방향으로 흐르자 당황해서 제지하려던 담임은 뜻밖에 진지한 태도로 정우의 말을 듣는 아이들의 태도에 어찌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얼음 대야 갖다 놓으면 되는 겁니까? 상태형도 여러분과 저에게 거듭 거듭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된 겁니까? 둘 다 어느 정도 잘못이 있으니 이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자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상태형은 뭡니까? 결국 학원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형과 코미디 같은 얼음 대야를 갖다놓고 버젓이 장사를 계속하는 학원과, 그러면 되는 겁니까? 왜 그렇게 침묵하는 겁니까? 내가 밉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고 내가 왜 이렇게 일어서서 자신과의 약속, 상태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뒤늦게 분노해야 하는지…”
정우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은 정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러분은 실체 없는 대상과 싸워보셨습니까? 상태형이 남긴 메모입니다. 실체 없는 대상과의 싸움이 너무 벅차다고…”
정우는 이제 거의 흐느낌에 가까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을 발칵 열고는 교실을 뛰쳐나갔다.
담임은 1교시 수업준비를 말하고는 출석부를 들고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은 책상 너머에 있을 환영을 향해 다시 초점을 모으기 시작했다. 상태와 정우가 없는 빈자리가 자꾸 눈에 밟혔고 나는 참고서를 펼쳤다.

*소설 당선소감
최 제 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2)
투박한 작품을 격려해주시니 민망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밥을 먹듯, 생각을 하고 글을 써왔다. 그게 나만의 글이라 해도, 나는 쓰면서 나를 읽고 그 속의 타인을 읽어왔다. 습관이 되어 버렸다. 말하지 않고 쓰는 버릇, 아니 쓸 것을 따로 남겨두는 버릇, 아직 터지지 않은 열매들이 달려있는 나무이다, 나는. 내가 나 아닌 글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 속에서 행패를 부리고, 아우성을 치면서 나 아닌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 허나 나는 글 속에서조차도 지루한 얼굴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나와, 두 눈 질끈 감고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다른 나와의 상승으로 인해, 나는 자주 글을 쓰면서 지친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써야겠다. 내가 보여줄, 내가 본 세상에 대한 기억들을 매일 새기면서 그리고 가끔씩 아름답게 펼쳐보이면서, 살아가야겠다. 나는 내가 본 아름다운 기억들에 대한 거의 유일한 증인이기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명훈, 지훈, 다은, 다빈과 염창권 교수님, 문우 호경형, 석민, 교대 사람들, 그리고 격려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염 홍 경
(문과대 서양어문학부 교수)

매년 발표되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어보면 늘 비슷한 작품들이 뽑힌다는 인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너무 튀지 않는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히곤 한다는 말이다. 작품 한 편만으로 작가의 역량을 평가해야 하는 심사위원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작품보다 아무래도 안정적인 글쓰기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고르는 것이 안심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모집에 당선된다는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하나의 시험에 통과한 것이지 작가로서의 앞날을 충분히 보증하는 백지수표 같은 것은 아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응모된 소설 작품들을 읽어보더라도 당선작 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샛별처럼 빛나는 재능이 서투른 문장에 가리어 제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또 반대로 대수롭지 않은 인생의 사안을 단지 겉만 번지레한 글솜씨로 분장한 것은 아닌지 판별하기가 생각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든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일종의 내재적 필연성이라고 부름직한 서사적 깊이와 일관성이다. 가령「78년 2월의 숲」은 삭막한 도시적 환경을 살아가는 고독한 개인의 내면 일기인 셈인데, 어디선가 읽은 듯한 상투적 발상법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모래안개」에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담겨있어 예의 주목했으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의 사회적 근거를 보는 객관적 시선이 결여되어 있고 무엇보다 작품을 쓰다가 만 듯이 흐지부지 끝나고 있어 아쉽다.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는 작품 제목이 길기도 하려니와 현대적인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아주 정통적인 소설이다. 장례식은 갖가지 서로 다른 인생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혈연과 친분의 끈에 꿰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기회이다. 따라서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의 옛 정서를 실감있게 살려내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핵심자체는 안이하고 감상적이다.
당선작으로 뽑은 「창문은 열고 싶다」도 결함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상태)과 화자(나)가 분리된 것은 객관적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서사적 전략으로서 이해가 간다. 그러나 화자가 단순한 관찰자 내지 전달자에 그치는 존재라면 그의 의식과잉이 설명되지 않으며, 반대로 그가 주인공과 대비된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라면 거기에 상응하는 파트너쉽이 주어져야 한다. 요컨대 화자는 아직 불투명한 존재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현실모순의 한 중요한 장면을 제법 심도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다운‘꼴’이 제대로 갖추어진 유일한 작품이라 생각되어 당선작으로 뽑았다.각고의 정진을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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