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천마문화상 시부문 가작-연꽃, 젖이 불어
제36회 천마문화상 시부문 가작-연꽃, 젖이 불어
  • 편집국
  • 승인 2007.06.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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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젖이 불어
                                         박 옥 경

몇 천년을 걸어온 걸까
새벽부터 이슬에 눈을 씻고
공양 드리듯 사붓사붓
발꿈치를 들어올리면서

몸 속에 투명한 물길 하나 생기고
밤낮으로 두레박 소리 들리더니
안개 밀어내며 해의 혀가 스치자
진창에 뻗은 발가락이 바르르 떤다

숫기 없이 서성이던 바람이
연향을 저 편 방죽까지 나르는 동안
미처 잇지 못한 조각치마 빙그르르
한 조각씩 벗겨질 때

초록의 윤기로 드러난 속살
수 천 년 후에도 견딜 씨앗 잉태하느라
어느새 젖이 퉁퉁 불었다


<시 수상소감>
박 옥 경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3)

재작년이었다. 무안 방죽포에 다녀온 것이. 백련 서식지로 유명한 그 곳은 그러나 유난히 긴 장마로 인해 꽃을 피우지 못한 연들만 껑충 키가 커 있을 뿐이었다. 연꽃이 방죽포를 가득 덮은 장관을 볼 기대로 새벽부터 먼 거리를 찾아 나섰는데 실망하고 말았다. 글로 쓴다 해도 형상화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서운한 마음으로 방죽포 가장자리를 돌아보다가 사진작가들이 렌즈를 고정시켜 놓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대상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천천히 꽃잎을 떨구며 연밥을 드러내는 백련이었다. 그 모습은 신비롭다 못해 처연했다. 누군가 연씨는 수 천년씩도 발아하지 않고 있다가 기온과 습도가 맞으면 발아해서 꽃대궁을 피워 올린다는 말을 했다. 몇 백년도 아니고 수 천 년이라니? 그런 생명력을 가진 식물이라면 씨앗을 만들어 내기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것인가? 연밥이 익어가면서 씨앗은 점점 커진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는 갓난아이가 저 연밥 안에 들었다고 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는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꽤 오래 끙끙거렸다. 이렇게 힘들게 쓴 시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 부족함을 딛고 더 차고 올라 좋은 시를 쓰라는 심사위원님들의 따뜻한 응시 때문에 오늘의 기쁨이 있는 거라고 믿는다.
원고를 보내 놓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참 기쁘다. 시의 길이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늘 거기 있는 언어들인데 선명하지 않아, 한없이 기다리며 때로는 보채며 수 없이 우울했던 날들. 앞으로도 언어에게 매일 버림받고 채이겠지만, 이제는 자신을 너무 타박하지 않으련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
내 언어가 사소한 것이 아니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서늘한 시의 눈매로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심사후기>

이 동 순
(시인, 한국학부 교수)
천마문화상 중에서도 시 부문은 가장 화려한 꽃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 대학생들의 정신적인 지표와 고매한 순수성을 고스란히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다섯 응모자의 작품은 이러한 근본의 취지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고만고만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공연히 불필요한 군더더기에 집착하고 있다든지, 무의미한 외래어를 남용하며 그것의 단조로운 음률감각을 즐기는 사례들이 눈에 거슬렸다.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는 시상을 잘 전개시켜 나가다가 후반부에 접어들어 급격히 산만하고 언어의 탄력성과 구성의 긴밀성을 잃어버리는 자포자기의 스타일도 흔히 보였다. 그렇다고 잘된 시를 가려 뽑는 일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따로 발췌할 수 는 없는 법. 심사자는 이런 점에서 당선작을 낼 수 없는 올해의 현황에 대해 무척 안타깝고 적막한 느낌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연꽃, 젖이 불어」 의 응모자는 언어의 수련정도에서 꽤 많은 공력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함께 엮어낸 「나는 그를 자동응답기라 부른다」와 같은 작품의 경우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고 비극적 세계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잘된 시는 작품속에 설정된 비극적 정황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과 돌파를 위한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의 마무리 부분은 그런점에서 더욱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낙타표 필름대리점」은 공연히 시가 길어지고 있다. 길면서도 전달의 느낌이 선명하지 않다. 자주 요설로 흐르는 경향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작품이 「연꽃, 젖이 불어」이다. 전체 4연 15행의 구성으로 된 이 작품에는 우선 작가가 자신의 시간에 대한 통찰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통찰과 연민은 미더웁다. 함께 제출한 다른 두 작품의 경우도 이 작품수준만큼만 되었다면 틀림없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무릇 당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같이 묶어낸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결고른 성과에 도달해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올해 천마문화상 시 부문 심사에서는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한 단계 더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여 자신의 집념과 수준을 업그레이드 해가길 바라마지 않는다. 모름지기 우리 문학사에서 응모자 시의 한 대목처럼 수천년 후에도 견딜 씨앗이 되기를 간곡히 희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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