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생각한다>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편지
<부활절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생각한다>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편지
  • 편집국
  • 승인 2007.06.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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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윤리를 다시 세워야만 할 때가 온 것일까? 혼자 사는 딸을 생각해서 외손자를 버린 할머니, 사회에 책임을 질만한 사람들이었으면서도 자살하는 이들, 없어지는 아이들, 강간당해 버려진 여인들, 친딸을 폭행한 아버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방화, 신용불량자의 양산, 실업자·노숙자의 증가… 아는 사람이 많으면서도 어렵고 힘들 때 찾아갈 사람이 없어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이들, 그것이 모여 궁극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사람을 무서워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종교라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까? 마침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을 지나면서, 그리고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지금은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해 내고 있는 우리 대학 졸업생 최시영 신부와 박성순 목사에게 우리 사회를 치유할 메시지를 듣는다.

최시영(요셉)신부(전자공학과 80년 졸)
모교인 영남대학교 신문방송사로부터 부활절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모처럼만의 모교로부터의 소식이며 주문이었다. 정주간이라 겨를이 없지만, 지난 학창시절 은사님들과 동창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받은 많은 선물에 대해 제대로 감사드리지도 못했던 터라 이런 부탁에 응하는 것도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되어 고맙게 받아들였다. 72년에 입학하여서 경산과 대명동을 오가며 강의를 들었고, 경산 캠퍼스는 아직 제대로 꼴을 갖추고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지면을 빌어 그 당시의 은사님들과 동창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몇 년 전 어느 아는 분이 외국에서 들어오면서 한 권의 책을 선물로 가져다 주셨다. 저자는 한국의 크리스찬에게도 많이 알려진 헨리 나웬 신부님의 책이었다. 그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쓰신 책이었고, 본인에 의해 출판된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친구들에 의해 출판된 책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을 딴 아담(Adam;원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이다. 이 책은 그 후에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장애자를 통한 자기발견과 변화
신부님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를 뒤로하고 생의 마지막 해들을 라르끄(L’Arche, 무지개라는 의미)라는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사셨던 분이다. 이 책은 캐나다의 새벽 공동체 (Daybreak)에서 신부님이 돌보시던 한 30대의 청년 아담과 함께 지내며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섬세하게 적어놓으신 책이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제대로 기억은 되지 않지만 나에게 의미 있었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외면적으로 당신은 정상인으로서 자신의 의사 한 마디도 표현할 수 없고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고 언제 발작을 일으켜 쓰러질지 모르는 중증 정신지체 장애의 아담이라는 청년을 아침 기상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돌보고 있지만, 기실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는 무엇 하나 하지 못하는 아담이라는 청년이 아주 신비로운 힘으로 자신 곁에 함께 있는 이 사람을 (나웬 신부님을) 서서히 변화시켜가고 있음을 느끼신 것이다. 자신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지만 대면하기를 두려워하고 피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약함과 상처와 불안과 죄스러움과 어둠을 있는 그대로 만나게 하여 주고 이 모든 것과 화해하고 아주 고요하고 평화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이런 변화는 사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능한 모습의 아담은 그 일을 해 낸 것이다. 지금 이 원고를 쓰면서 그 책을 읽었을 당시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보게 된다. 우선 아담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비록 그 통로를 정상인인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통로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자신 안에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야 하였다. 그러지 않고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라는 분은 아주 신비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는 방법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여서도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임을 아담을 통해 확인시켜 주신다.
아담이라는 청년은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신부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신부님도 아담을 뒤 따라 천국으로 가셨다. 아담은 자신의 장애와 고통과 무능을 통해 신비한 방법으로 놀라우신 하느님을 만났고, 이런 만남을 통해 아담은 또 그 자신도 모르는 신비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신부님은 이런 아담을 통해 놀라우신 하느님을 만났고 자신의 약함과 상처와 어두움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무능과 약함이 오히려 인간을 성숙시켜
사실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성숙으로 인도하는 힘은 어쩌면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아담(인간)의 무능과 약함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무능과 약함 한 가운데서 신비한 힘으로 힘차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나웬 신부님은 생전에도 아담에게 고마워하셨지만 지금 천국에서는 더 고마워하시리라 생각된다. 당신이 느끼신 신비로운 힘이 더 이상 신비 일뿐만 아니라 사실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복음서를 읽는다면 아담과 나웬 신부님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냥 우연히 한 번 그렇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방식으로 우리 연약한 인간을 찾고 만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인간도 이런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된다.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지금 유혈 폭력이 악순환 되는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역을 두루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젊은이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면 즉시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전역을 돌며 만나려 한 사람들과 또 예수님 주위로 몰려 온 사람들은 비슷한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즉 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속한 부류를 우리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소외받은 사람들 (the marginalized)이다. 주변인이기에 관심 밖에 있고 그래서 그 가장자리에서 언제 밑으로 추락할지 모를 불안과 위험 속에 처한 사람들 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성서의 인물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장애나 질병으로 오랜 기간 고통 받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 열 두 해 동안 하혈 병으로 고통 받던 여인; 삼십 팔년을 병상에 누워있던 사람; 나병 환자; 중풍병자와 그를 들것에 실어 데려온 친구들; 딸아이의 중병에 고통스러워하는 회당장 야이로; 간질병에 시달리는 아들을 둔 아버지 ---), 비록 지금 이렇게 남을 속여먹고, 때로 협박하여 갈취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하고 잔뜩 내 것을 움켜쥐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해 당혹해 하던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세리들, 군인들, 그리고 이기적인 군중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깊은 시름 속에 악순환을 되풀이 하던 사람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나 행실이 나쁜 여자들),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기는 하나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 내면의 깊은 공허 때문에 슬픈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부자 청년과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유다인의 지도자요 선생인 니고데모 ---), 이 외에도 여러 기구한 사연으로 삶의 무게에 허덕였던 사람들이다. (군대라는 마귀가 들린 사람; 눈 먼 장님 이지만 가출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가진 베싸이다의 소경)

소외받은 이웃을 따뜻하게 바라봐야
복음서는 예수님이 이런 이웃들을 만나고 나면 밤을 새워 기도하시거나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어쩌면 밤을 새워 기도하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을 정도로 그 분 마음을 뒤흔들고 사로잡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 나섰고,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성서의 이 소외받은 이웃들은 그 만남을 통해서 마치 아담이 체험하였듯, 그리고 마치 나웬 신부님이 경험하였듯이 신비롭게도 자신들의 아픔과 약함과 상처와 고독과 깊은 불안 한 가운데서 고요히 그들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푸른 풀밭과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만난 것이다. 이 만남 이후 아담과 나웬 신부님에게 그러하였듯 성서의 인물들도 그들이 만나는 이웃에게 이 신비롭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혹시 우리 중 누군가 다양한 사연으로 인한 삶의 무게나 후회로 아직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곳에 아담과 나웬 신부님을 인도했고 성서의 소외받은 이웃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인도하였던 그 하느님의 손길이 당신 곁에 있음을 바라보라고 말씀드린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나 때문에 잠 못 이루시고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이런 내가 나의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이곳이 바로 지금 우리 교회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장이 될 것이다.

◇ 최시영(요셉)신부 프로필

·우리대학 공대 전자공학과 80년졸업
·1990년 사제서품
·1989~1992 로마 그레고리안대학 임상심리학 석사전공
·예수회 수련원 원장 엮임
·현재 서강대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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