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Back to the 90,00s 그때 우리는?
[특집] Back to the 90,00s 그때 우리는?
  • 영대신문
  • 승인 2022.04.0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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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주년을 맞이한 우리 대학교, 그 속에는 수많은 동문 선배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드넓은 압량벌 캠퍼스에서의 이야기는 수만, 수천 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20~30년 전, 천마로를 걸었던 동문 선배님들을 만나 당시 캠퍼스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윤경영 식품영양학과 교수 (식품영양학과 91학번)


 당시 수업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수업 분위기는 비슷했던 것 같아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꼭 수업 시간보다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았어요. 지금 수업 분위기와 다른 점은 교수님들이 휴강을 종종 했다는 점이에요. 아이러니하지만 휴강은 있어도 보강 수업은 없었답니다(웃음).

 성적 관리는 쉬운 편이었나요?
 지금이야 균형 평가라는 제도가 자리를 잡아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기 쉬운 환경이 됐지만, 당시에는 평균 학점 4.0을 넘기 정말 어려웠어요. 평점 4.0 이상의 학생은 장학금 지급 대상이었을 정도로 높은 성적을 받기 쉽지 않았죠.

 현재와 비교했을 때 패션 스타일이나 화장법의 차이가 있나요?
 편안함을 추구하는 현대 패션 트렌드와 달리 당시에는 정장 스타일이 유행했어요. 그래서 단화를 신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이 보였죠. 그리고 당시에는 화장도 요즘보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입술에 라인을 그려서 안을 채우는 화장법을 주로 사용했죠. 이러한 패션 스타일은 시험 기간에도 계속됐어요.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은 채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기숙사 생활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당시 여자 기숙사 통금 시간은 22시였어요. 22시가 지나면 문이 잠겨 사전에 외박증을 발급받지 않은 미 복귀자에게는 벌점이 부과됐어요. 4학년 재학 시절,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너무 취한 나머지 22시가 넘도록 논 적이 있어요. 점호를 하는데 4학년 세 명이 모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기숙사가 발칵 뒤집혀 각 기숙사의 동장들이 저희를 잡으러 돌아다녔어요. 시계탑 쪽에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던 저와 제 친구들은 동장들에게 붙잡혔어요. 이에 다음날 사감선생님께 불려가 혼난 기억이 있어요. 그동안의 모범행동을 참작해 주신 것인지 다행히 벌점은 받지 않았지만, 저는 이 경험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동아리 활동을 하신 경험이 있다면?
 저는 PC 통신에 빠져 있었어요. 채팅방이 있어 들어갔더니 우연히 우리 대학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온라인에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오프라인에서 만남을 가졌어요. 한 명은 대학생, 한 명은 직장인, 그리고 저는 대학원생이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셋 모두 학부 시절에 동아리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죠. 동아리 활동에 갈증을 느낀 우리는 직접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동아리 개설 후 많은 사람이 가입해 같이 볼링을 치고 등산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당시 수강 신청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지금은 인터넷이 보급되고 수강 신청 홈페이지가 개설돼 수강 신청 방법이 편리해졌어요. 하지만 제가 다닐 때는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고, 수강 신청 홈페이지도 없어 수강 신청 서류를 들고 캠퍼스를 뛰어 다녔어요. 수강 신청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를 돌았던 기억이 나요.

 

임성우 유럽어문학과 교수 (독어독문학과 92학번)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셨을 당시 입학식의 모습은 어땠나요?
 당시 입학식에는 모든 신입생들이 참석했던 것 같아요. 입학식은 노천강당에서 진행됐었는데 눈보라 치는 추운 상황에서도 입학식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전체 입학식이 끝난 후 각과로 흩어져서 선배들에게 과에 대한 설명을 들었어요.

 수업 분위기는 어땠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시 교수님들께서는 수업을 진도에 맞추려고 하기보다 교수님들의 경험이나 학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토론과 다양한 인문학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은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야외수업에서 교수님 한 분이 막걸리와 파전을 준비한 적이 있었어요.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 야외수업을 통해 본관 주변 소나무 숲에서 막걸리와 파전 먹기도 했었죠.

 당시 공강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공강 시간이 짧으면 학회실, 길면 동아리방에 갔어요. 당시 학교 앞에 김밥 아주머니들이 많아 낮에 공강이 있을 때는 학교 잔디밭에 앉아 선배 및 동기들과 김밥을 먹기도 했어요. 김밥을 먹다 선배들이 우후죽순 합류하면 모임이 이뤄지는 등 다양한 학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도 많았죠. 그러다 마음 맞는 이성 친구가 생기면 둘이서 거울못을 산책하는 경우도 있었어요(웃음).

 당시 동아리 생활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파우스트’라는 전공 학술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문학, 철학,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동아리였어요. 동아리에 애착이 강해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했었어요. 그리고 독어독문학과 학술제에서 연극을 진행한 기억이 나요.

 당시 도서관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중앙도서관 지하 1층에 학생 식당이 있었어요. 1층부터 5층까지는 도서관이었고, 6층부터 교수 연구동으로 사용됐죠. 당시 시험기간에는 아침 6시에 도서관이 개방돼 시험기간만 되면 이른 새벽부터 도서관 앞에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도서관 출입 담당자가 깜빡했는지 6시가 지났는데 문을 개방하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학생 한 명이 돌로 도서관의 문을 깨고 출입한 기억이 나요.

 당시 우리 대학교 정문 앞 오렌지 거리의 풍경은 어땠나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는 주로 막걸리집과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그리고 닭을 튀겨 일부분만 판매하는 쪽닭집도 많았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학교 앞 식당에서 외상이 가능했어요. 주로 학생증을 맡기고 외상으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어떤 가게가 폐점하면 학생들이 음식값을 갚지 않아서 망했다고 얘기할 정도로 외상이 보편화 돼 있었어요.

 기숙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시 방팅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여학생들이 거주하는 A동의 방과 남학생이 거주하는 B동의 방끼리 만나는 거였죠. A동 여자 기숙사의 방장이 남자 기숙사의 방장이랑 서로 아는 사이면 방끼리 만나서 밥 먹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리고 친구와 함께 기숙사 가요제에 나가 예선전에서 떨어진 기억도 나요.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느 날 학과 게시판에 게시돼 있는 2~3주 독일 어학연수 모집공고를 봤어요. 어학 연수비가 당시 물가로 상당히 비쌌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제가 저축해온 돈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결국 독일에 가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독일에 유학 간 선배들이 많지않아 제가 독일에서 가져온 동전 버스표 기차표 박물관 티켓 등 현지 기념품 및 사진으로 교수님들과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박태경 경영학과 교수 (경영학과 96학번)


 출결시스템이 없던 당시, 휴강의 경우 어떻게 공지됐나요?
 당시 조교가 강의실 칠판에 적어 공지했어요. 한번은 짓궂은 학생이 일찍 강의실에 가 칠판에 ‘오늘 수업 휴강’이라고 적었는데 그 후 도착한 학생들이 이를 보고 모두 돌아간 일도 있었죠. 나중에 교수님이 강의실에 오셨는데 학생들이 없어 매우 당황하셨다는 소문이 있어요.

 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캠퍼스의 낭만은 역시 ‘과팅’이죠. 당시에는 학교 내 혹은 학교 앞 카페 등에서 과팅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저는 과 대표의 주선으로 다른 학과와 20:20 과팅을 한 적이 있어요. 약 40명의 학생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어 학교 정문 앞 천마로 잔디밭에서 이를 진행했어요. 신기한 광경 탓에 정말 많은 학생이 우리를 지켜봤고 퇴근하는 교직원들도 차를 세워 놓고 구경했죠. 그런데도 우리는 부끄러움을 잊은 채 수건돌리기를 하고 걸린 사람이 나와서 춤을 추며 즐겼어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 당시 어떤 방식을 통해 연락했나요?
 90년대 중반에는 많은 대학생이 ‘삐삐’로 불리는 무선호출기를 갖고 있어서 연락하거나 음성메시지를 확인할 때 공중전화기를 사용해야 했어요. 그래서 학교 곳곳의 공중전화기에는 항상 긴 줄이 있었죠. 당시 우리는 특정 상황을 숫자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1582 00’은 숫자로 지정해 놓은 00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의미예요. 또한 ‘1052’는 love를, ‘486’은 사랑해를 의미해요. 98년 정도부터 무선호출기가 보급됐고 99년에는 많은 학생이 핸드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중요한 결정사항을 어떤 방법으로 공지했나요?
 당시에 학생들에게 공지하는 방법은 ‘대자보’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했어요. 학교 정문에는 약 10미터 길이의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두고 총장·학생회 선거 결과, 대학입시 합격자 등을 공지했죠. 저도 입시 결과 발표날 우리 대학교에 와서 정문 게시판에 게시된 수험번호를 보고 합격한 것을 알았어요. 대학입시 기간에는 입시 경쟁률이 시간대별로 중앙도서관에 게시돼 일명 ‘눈치작전’을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죠. 당시에는 우리 대학교의 학과 경쟁률을 확인하려면 직접 와서 그 대자보를 봐야만 했어요.

 신입생 환영회와 동문회 등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당시는 고교 동문회 중에서도 남자고등학교의 동문회가 매우 활성화된 시기였어요. 3월이면 캠퍼스 곳곳에서 동문회와 신입생 환영회 대자보를, 가을이면 졸업페스티벌을 개최한다는 대자보를 쉽게 볼 수 있었죠. 일부 고등학교는 신입생들과 함께 교가를 크게 부르면서 캠퍼스 곳곳을 열을 맞춰 뛰어다니곤 했어요. 주변에서도 대학생에게 허용하는 캠퍼스의 낭만으로 볼 뿐,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죠. 또한 학생회관 식당에서는 테이블에 특정 고등학교를 표시해 두고 선후배들이 ‘만남의 광장’으로 활용하기도 했어요.

 

이기남 (화학생화학과 97학번)

 

 수업이 없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나요?
 천마로 잔디밭에서 술을 먹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용돈이 없는 날이나 날씨가 좋은 날엔 소주나 맥주,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서 천마로 잔디밭에 앉아 먹곤 했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삼삼오오 무리가 지어져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수업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 시절엔 대리출석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어요. 친구에게 대신 출석해 달라고 부탁한 뒤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었죠. 교수님께서 출석을 부를 때 자연스럽게 1인 2역을 해 대리출석을 하곤 했어요(웃음).

 도서관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도서관이 문 여는 시간은 오전 6시지만 그 전부터 줄을 서 있었어요. 결국 자리를 맡지 못한 사람은 빈자리를 전전하며 공부했었어요. 이처럼 공부를 하다 자리의 주인이 오면 비켜주고 다른 빈자리를 찾아 이동하던 학생들을 ‘메뚜기’라고 불렀어요. 친절한 자리 주인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자리가 비니까 마음 편히 공부하라고 메모를 남기기도 했어요. 그러면 메뚜기는 그 자리에서 공부하다 커피 한 캔을 두고 감으로써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죠.

 당시 학교 앞 상가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세련된 상가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작은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어요. 가게 안뿐만 아니라 가게 앞에도 탁자와 의자가 길게 나와 있었죠. 다락이 있는 가게도 있었는데 다락에서 먹는 술은 아늑하기도 하고 가정집에서 먹는 기분이 들었어요. 덕분에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 막차를 놓치는 일도 많았죠. 그리고 ‘막사’를 많이 마셨어요. 막사는 막걸리에 사이다를 일정 비율로 섞어 만든 술이에요.

 

윤지현 (언론정보학과 05학번)

 우리 대학교 학생들의 패션 스타일은 어땠나요?
 당시 원색의 캐주얼 패션이 굉장히 유행했어요. 일자 통 청바지에 노랑, 분홍 등의 티셔츠를 입고 캐주얼한 점퍼나 트레이닝복을 걸쳤죠. 모자를 쓴다면 꼭 캡 모자, 귀걸이는 큰 링 귀걸이를 했어요. 하지만 저는 캐주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입학식 때 구두를 신고 트위드 자켓을 입고 갔는데, 혼자만 유행에 뒤처지는 걸 알고 쇼핑몰에 가서 캐주얼 옷을 잔뜩 샀던 기억이 나요.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학교가 너무 넓어서 교내 순환버스를 타고 다니던 기억이 있어요. 특히 9시 수업이 있는 날엔 순환버스를 무조건 타야 하는데 대기 줄이 길거나 만원 버스일 땐 어쩔 수 없이 뛰어가야 했죠. 버스가 지나쳐갈 때 얼마나 야속하던지…, 애증의 순환버스가 기억에 오래 남아요.

 도서관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앙도서관에 스마트카드가 처음 도입돼 좌석 배정 후 2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거나 시험 기간 좌석 검사 시간에 자리에 없으면 도서관 도우미가 가차 없이 짐을 뺐어요. 혹시나 검사 시간을 놓칠까 봐 심장이 뛰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또한 중앙도서관 20층에 카페 ‘마우로’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보며 여유 부리던 때도 생각나네요. 풍경이 아주 멋졌답니다.

 당시 우리 대학교 행사에 대해 설명 부탁드려요.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공연은 2007년 개교 60주년 기념행사 때 진행된 가수 싸이의 공연이에요. 한 시간가량 진행됐는데 마치 콘서트에 온 것 같았어요. 또한 이날 학교 잔칫날이라 잔치국수랑 떡을 줬는데 그때 먹었던 잔치국수가 정말 맛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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