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천마문화상-가작(소설)] 퍼머넌트 레드
[52회 천마문화상-가작(소설)] 퍼머넌트 레드
  • 신서현(단국대 문예창작과)
  • 승인 2021.11.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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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커다란 뱀이 허물을 벗는 꿈을 꿨어. 찾아보니까 돈이 들어온다는 꿈이더라. 내 처지에 나갈 돈은 몰라도 들어올 돈은 없는데. 헛꿈인가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태몽인가?” 
 윤은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어젯밤 꾼 꿈을 이야기했다. 작업실 한편에서 바디페인팅에 쓸 화구들을 고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보았다. 윤은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한 표정으로 작업대 앞에 서서 바지를 내렸다. 엉덩이까지 가리는 펑퍼짐한 검은색 반팔 티셔츠, 브래지어를 차례대로 벗었다. 옷은 힘없이 스르륵 하고 윤의 몸을 타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윤이 서 있는 바닥에는 옷들이 아무렇게나 자리했다. 윤은 항상 그랬다. 옷을 벗으면 그 자리에 떨어뜨렸다. 윤은 나를 처음 볼 때도 이런 표정과 행동으로 옷을 벗었다. 항상 해왔던 일인 것처럼. 나는 윤에게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화구를 골랐다. 태몽이란 앞으로의 아이의 운명을 뜻하는 꿈이었다. 그러니 그 꿈이 태몽이든, 태몽이 아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것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선반에서 배경을 칠할 가장 널찍한 붓과 밑그림을 그릴 8호 붓을 골랐다. 반대 손으로 퍼머넌트 레드의 물감 통과 인디안 핑크, 징크 옥사이드 등의 붉은색 계열의 물감 통도 꺼냈다. 이 색들 중 이번 작품의 주가 될 색깔은 퍼머넌트 레드였다. 퍼머넌트 레드는 순수한 느낌의 레드지만 다른 레드 계열보다 화려한 색이었다. 순수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이 색은 정말 윤과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기도 했다. 나는 모순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윤은 내가 필요한 화구들을 찾아 작업대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계속 태몽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언니네 엄마한테 태몽 이야기 들은 적 있어? 나는 들은 적 없는데.” 
 윤의 질문에 술 마시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술만 마시면 나를 앞에 앉혀두고는 내 태몽을 이야기해주었다. 탐스럽지만 한입 깨물면 구더기가 잔뜩 나오는, 그런 속이 텅 빈 사과. 하지만 난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퍼머넌트 레드를 아크릴판에 덜었다. 물감이 조금 밖에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윤에게 오늘은 상체만 칠하겠다고 했다.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몽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태몽에 관한 이야기가 그만 듣고 싶은 난 라디오에서 얼핏 들었던 뱀에 관한 말을 꺼냈다. 
 “윤, 그거 알아? 뱀이 허물을 벗는 이유는 성체가 되고 싶어서도 있지만, 다리를 갖고 싶어서이기도 하대. 뱀은 결핍된 것을 채우려고 허물을 벗는 거야.” 
 나는 말을 하며 물감을 묻힌 붓끝을 윤의 몸 위에 칠했다. 바디페인팅 중에는 말을 하면 안 되니까. 조금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배는 붉게 물들어갔다. 엄마가 말했던 사과처럼 붉고 탐스러운 색깔을 띠었다. 배에서, 가슴으로 붉은색이 윤의 온몸을 감쌌다. 얇은 붓으로 바꾸고 밑그림을 그릴 청록색을 아크릴판에 짰다. 윤의 배 위에 며칠 동안 구도를 잡으며 그렸던 도안을 또다시 그려 넣었다. 가슴에는 뱀의 머리를 그렸고, 배에는 뱀의 몸통을 중반까지 그렸다. 꼬리는 하체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윤은 포즈를 취했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원하는 구도가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렸을 때와 또 구도가 조금 달라졌다. 마네킹에 대고 아무리 연습을 했던 그림인데 윤의 몸 위에 그리면 자꾸만 구도가 비틀어졌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저 배와 뱃속에 들어 있는 그것. 나는 윤의 배 위에 있는 뱀 그림을 쳐다보았다. 윤은 내가 바디페인팅을 하는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배와 가슴을 들썩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렇게 바디페인팅이 끝날 때까지 반지하 방에서는 윤의 숨소리와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바디페인팅이 끝나고 윤과 나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나는 고기를 굽는 동안 윤에게 욕실에 들어가서 씻으라고 했지만, 윤은 거절했다. 윤은 이상하게 바디페인팅을 지우는 것을 싫어했다. 몸에 그림을 그리면 더 아름답고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곳에 물감이 묻으면 곤란해지니 빨리 가서 씻고 나오라며, 윤을 억지로 욕실로 넣었다. 윤이 씻는 동안 나는 불판 위에 대충 자른 고기를 올렸다. 정육점에서 일하면서 고기를 싫어지게 되었지만, 윤과 먹으려고 가끔 가져왔다. 물론 질이 좋은 고기는 아니었다. 질 좋은 고기는 다 사장이 가져가거나 손님들이 사가고는 하니까. 윤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바지는 물론 입지 않은 채였다. 자꾸만 불러오는 배 때문에 어떤 바지를 입어도 배가 쪼인다고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 그대로 불판 앞에 앉아 아직 핏기가 도는 고기를 집었다. 나는 아직 고기가 다 익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입에 고기를 쏙 넣었다. 그리곤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하고 고기를 목 너머로 넘겼다. 아니, 삼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 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윤의 태몽은 분명 그것과 같은 뱀이었을 것이라고. 윤은 뱀과 무척 닮았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도, 툭 튀어나온 광대뼈도. 자꾸만 뱀을 상기시켰다. 겉모습뿐만 아니었다. 지금처럼 고기를 먹는 행동도 그랬다. 처음 고기를 구워 먹을 때 나는 윤에게 뱀을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무슨 뱀을 닮았냐고 물어보는 윤에게 나는 대답했다. 
 “독사.”
 “꽃뱀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독사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네.”
 내 말에 윤은 자신의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불판 위의 고기는 빠르게 없어졌다. 나는 고기를 굽다 말고는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엉덩이까지 오는 커다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웅크리고 있었다. 티셔츠 안에 윤은 다리를 넣고 있었는데 그 옷 안에 사람 몸이 아니라 꽈리를 튼 뱀이 있을 것 같았다. 윤의 검은색 티는 점점 늘어났다. 분명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부풀어 오르는 배를 감추기 위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윤의 눈에 띄게 부풀어 있던 건 아니었다. 윤을 만난 건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나서였다. ‘바디페인팅 모델 해주실 분 구해요. 전문 모델 아니셔도 돼요. 바디페인팅 대회에 나갈 때까지만 몸에 그림을 그리게 해주시면 됩니다. 돈은... .’ 바디페인팅 대회에 나가고 싶지만, 전문 모델을 구하기에는 나에게는 그만한 실력도, 돈도 없었다. 나라도 이 정도의 돈을 받고 며칠 동안 몇 시간씩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리게 해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은 연락했다. 윤이 제시한 것은 단 하나였다. 돈을 조금 덜 받아도 좋으니 자신이 잠시 작업실에 묵을 수 있게 해줄 것. 나는 상관없다고 했다. 대회가 다가오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으니까. 이번이 내 마지막 대회였다. 스스로 한 약속이었다. 언제까지고 현실은 버리고 그림만 그릴 수는 없었으니까. 윤은 나에게 정말 여자면 되고 그 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나와 윤은 이 좁은 반지하 방 작업실에서 바디페인팅을 하며 3주간의 동거를 시작했다. 
 윤은 처음 만난 날부터 이상했다.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는 처음 내 반지하 방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반지하 방이 좁으니 같은 불만이 아니라 그냥 반지하 방이 나와 닮았다며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한쪽 구석에는 가지런히 화구가 정리된 선반이 있고, 반대편에는 생활 물품들이 널브러져 있는 작업실도 거주공간도 아닌 애매한 작은 이 방이. 윤의 말에 동감이 되어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반지하 방에 들어온 후부터 나는 자꾸만 작아졌으니까. 그리고 윤도 자꾸만 작아졌다. 튀어나온 배를 숨기기 위해서 자꾸만 허리를 숙이고 걸어 다녔다. 윤은 겉은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순수했다. 윤은 나의 나이를 묻고는 바로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말했다. 언니, 오빠라고 말하는 것이 편하다고. 가족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라나 뭐라나. 나는 사실 그런 호칭이 어색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단어에 포함되는 건 엄마뿐이었으니까. 윤은 처음 본 날부터 내 앞에서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고, 윤의 옷은 그날도 아무렇게나 바닥에 자리했다. 나는 그날 옷을 유심히 보았다. 정말 누가 봐도 비싸고 눈에 띄는 옷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을 보니 내가 다 가서 주워서 옷걸이에 걸고 싶어졌다. 그리고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이 왜 헐값에 누드모델을 하려고 할까. 나는 조심스럽게 윤에게 물어보았고 윤은 어쩌다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 언니는? 언니는 왜 바디페인팅을 시작했어?” 
 어쩌다가 엄마가 일하러 가면 혼자 남아 종종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꿈이 화가가 되었고, 화가가 된다고 말하자 엄마는 내 종이를 찢어버렸다. 나는 그 이후로 내 몸에 몰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뒤의 모든 문장은 버리고 맨 앞 단어만 똑 떼어서 윤처럼 대답했다. 
 “어쩌다.”
 윤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 것도 어쩌다였다. 첫 만남 이후로 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윤의 배 위에 그림을 그리려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했다. 윤의 배가 정말 미세하게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윤에게 모델을 하려면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고, 아니면 그림의 구도가 비틀어진다고 말했다. 윤은 살이 찐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당당한 윤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 임신이라도 한 거냐고 소리를 질렀고 윤은 웃기게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순간 갑자기 영화 필름을 되감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음식을 먹다가 줄곧 입을 막고는 자꾸 헛구역질하던 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윤은 나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곧 낙태하리라는 것도. 나는 나를 속인 윤 때문에 화가 났다. 윤은 차분하게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언니, 내가 물어봤었잖아, 조건은 그저 여자면 되는 거냐고. 언니가 그렇다며.” 
 나는 윤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누가 임신한 사람이 바디페인팅 누드모델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애 아빠는 누구냐고 묻자 윤은 말했다. “몰라, 가게에 오는 사람 중 한 명이었겠지.” 그리곤 입을 꾹 닫았다. 이제야 ‘어쩌다’ 뒤에 붙어 생략된 문장들을 알게 되었다.

 불판 위의 고기가 다 사라질 때쯤 윤이 말했다.
 “언니, 그놈한테서 돈 못 뜯었어. 그냥 어쩔 수 없이 낳아야 하나 봐.” 
그 순간 내가 씹고 있는 것이 고기가 아니라 고무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항상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낳은 거야.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항상 같잖은 수식어를 붙여 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다. 엄마도 윤처럼 돈이 없어서 낙태도 못 하고 나를 낳은 것은 아닐까. 새빨간 색으로 붉게 물든 배. 탐스러운 사과. 자꾸만 생각났다. 그렇게 생각에 잠식되어 가던 중 윤이 갑자기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차마 문을 닫지는 못하고 변기통을 붙잡고 구토를 했다. 나는 문틈으로 윤을 바라봤다. 윤은 변기통 옆에 주저앉아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는 살아 있는 게 아니야. 이거는 살아 있는 게 아니야. ” 
 윤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서늘했다. 그 말은 꼭 절규, 혹은 자신이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주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윤의 의지는 빈약했다. 어떤 날에는 혼자 살아가는 것을 꿈꿨고, 어떤 날에는 둘이서 살아가면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겠냐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윤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윤에게서 자꾸만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도 나를 가졌을 때가 저 나이쯤 되었을 텐데. 어떤 날에는 너 같은 건 낳지 말 걸 그랬다고, 어떤 날에는 네가 없으면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던 엄마. 혼자서 나를 키우며 나에게 매일 증오하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엄마. 나는 그런 모순적인 엄마를 사랑했다. 나를 증오하는 엄마도, 나를 사랑하는 엄마도 모두 똑같이 사랑했다. 그리곤 항상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나를 낳지 않게 도와줬을 텐데. 윤은 계속 혼잣말을 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윤이 말했다. 
 “갑자기 또 왜 이렇게 춥지?”
 “일단 병원이라도 가자. 얼마인지 알아내자. 내가 낙태하는데 드는 돈이라면 마련해줄게.” 나는 덜덜 떠는 윤의 어깨를 잡곤 말했다. 윤의 표정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꼭 언니가 왜라고 묻는 표정. 그러게 왜일까. 나조차도 겨우 먹고사는 주제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윤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나는 퍼머넌트 레드가 잘 어울리는 윤을 엄마처럼 사랑했으니까.

 다음 날, 난 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그냥 후미진 상가에 간판 하나 달려져 있는 병원이었다. 윤이 말하기를 언니들에게 물어보니 이 병원이 가장 싸다며 알려줬다고 했다. 윤은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따라갔다. 윤은 내심 내가 같이 가줘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병원이 위치한 건물의 화장실에서는 지린내가 났다. 병원 문을 열자 내부와는 다른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윤은 접수대에 가서 낙태 수술을 접수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낙태라는 말에 힐끔 쳐다보았다. 윤은 접수를 마치자마자 초음파실에 들어갔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 병원 내부를 훑어보았다. 병원 원장의 상패와 졸업장들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접수대에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미리 해야 한다는 내용, 유방암의 위험성에 관한 내용 등의 포스터가 붙어져 있었다. 나는 수많은 포스터 중 가장 눈에 띄는 포스터 하나를 발견했다. ‘내 몸은 내가 지키자’ 글귀가 커다랗게 들어가 있는 포스터였다. 글귀보다 모델이 더 눈에 띄었다. 손에 책을 들고 어깨에 가방을 멘 대학생 느낌의 여자가 모델이었다. 나는 포스터 속의 모델처럼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곤 가방을 메고 대학교에 다니는 윤의 모습을 잠깐 생각했다. 잘 생각이 되지 않았다. 윤은 초음파가 끝난 후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찢어진 의자 끝에 튀어나온 솜을 손으로 자꾸 뜯었다. 
 간호사는 윤의 이름은 짧고 간결하게 불렀고, 우리는 진료실로 비장하게 들어갔다. 비록 3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진료실 내부도 별거 없었다. 커다란 책장, 컴퓨터 한 대 그리고 아이가 들어 있는 자궁의 모형이 있었다. 자궁 모형 속 아기는 눈을 감고는 거꾸로 누워 있었는데 그게 왜인지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윤은 의사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난 그 옆에 서 있었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초음파 사진을 띄웠다. 어제 내가 대충 잘라 구웠던 한입보다는 조금 큰 고깃덩어리가 보였다. 의사는 윤에게 마지막 관계를 맺은 지가 언제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리곤 낙태하는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진공청소기 같은 튜브를 넣어서 쏙하고 태아를 빨아들이는 겁니다. 이거 불법으로 진행하는 거 아시죠? 그날 입원하시면 바로 수술 들어가실 거고 조금 안정실에서 쉬셨다가 바로 퇴원하셔야 해요.” 
 의사는 낙태 비용을 70만 원을 말했다. 
 갑자기 윤이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며, 의사에게 그 사람의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대충 어림짐작하건대 윤이 언니들이라고 칭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윤이 갑자기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180도로 바뀐 의사의 낯빛과 말투 때문이었다. 의사는 한숨을 쉬더니 60으로 깎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10만 원짜리의 값어치라도 되는 듯, 중요한 말을 해주는 것처럼 거만한 표정과 말투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관계 시 뒤따르는 책임감 같은 것들. 그리곤 그 여자들처럼 몇 번이고 이 병원에 와서 수술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자기 딸과 같은 또래라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윤이 말했다. 
 “아, 의사 선생님 딸도 수술했어요? 그러면 딸도 돈 내고 했나? 아니다. 딸이니까 10만 원만 깎아줬겠네. ” 
 의사가 그 말을 듣고는 미쳤냐고 큰소리를 내며 10만 원 깎아준 은혜도 모른다고 했다. 윤은 내 손을 잡고는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기 전 70만 원을 내겠다고 말도 했다. 그 말을 할 때 윤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윤이 분명 화가 났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윤은 병원을 나오자 날 보고 웃으며 초음파 사진을 자신의 얼굴 옆에 가져다 댔다. 
 “언니, 웃기지. 지 딸이면 수술 무료로 해줬을 거면서. 그러면 딸 같은 나도 무료로 수술해 줘야지. 어딜 봐서 나보고 딸 같대. 하나도 안 닮았는데. 차라리 얘랑 나랑 닮은 게 더 말이 되겠다.” 
그 말을 끝으로 가는 내내 윤은 또다시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관계 시 뒤따르는 책임이라. 그것을 없애는 것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낳은 후의 책임. 윤은 그것을 없애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을 원망하고 사랑하면서 현실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었고, 엄마는 낳은 후의 책임을 지고 나를 원망하고 사랑하면서 현실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바람이 약하게 불어왔다. 햇살이 내리쬐는 골목길을 걷는 윤은 바람이 춥다고 말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길을 걸어가는 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를 닮은 윤을 엄마와 다른 길로 걷게 등 떠민 건 나였다. 나도 이상하게 추워졌다. 
 “그러게.” 
 나는 윤의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윤의 옆에 서서 함께 걸었다.

 붉은 조명 때문에 눈이 아팠다. 쓱쓱. 사장이 숫돌에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칼은 얼마나 두꺼운지 언뜻 보면 도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사장의 불룩 튀어나온 앞치마를 바라보았다. 앞치마에 넣어둔 돈 때문에 사장의 배가 전보다 더 불룩했다. 요즘 자꾸만 사람을 볼 때 배를 먼저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것도 다 윤 때문이었다. 윤과 알고 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윤은 나를 자꾸만 바꿔놓았다. 사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칼을 갈다가 나에게 말했다. 숫돌을 새로 샀더니 칼이 잘 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장이 기분 좋은 이유는 건너편 정육점이 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장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불해줄 확률이 늘어났으니까. 윤은 자신이 가진 옷이랑 가방을 팔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윤이 그것들을 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에게 옷과 가방은 바디페인팅 같은 것이었으니까. 입이 쉬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사장이 가만히 있지 말고, 떨어진 비계나 고기를 빗자루로 쓸라고 했다. 사장은 날카로운 칼로 항정살을 썰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이 고기를 써는 동안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빗자루의 솔이 빡빡해 떨어진 조그만 고깃덩어리가 잘 쓸리지 않았다. 사장이 잘 쓸리지 않는 빗자루를 보자 코웃음을 쳤다. 사장은 앞치마 속 주머니를 만지며 청소기를 사야겠다고 말했다. 
“아주 싸면서도 불순물들을 쏙 빨아들이는 청소기면 좋겠어.”
 나는 사장의 말에 조그만 고깃덩어리를 쏙하고 빨아들이는 청소기를 떠올렸다. 그러다, 어제 의사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냥 청소기 같은 거로 쏙 빨아들이는 겁니다.
 사장은 나에게 꾸물대지 말고 방금 썬 항정살을 랩으로 포장해 진열대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내가 이 정육점에서 하는 일은 바닥 쓸기나 랩으로 고기를 포장하는 것과 같은 잡일이었다. 나는 고기를 썰지 않았다. 딱 한 번 사장에게 고기를 써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고기를 썰지는 못했다. 고기를 자르려 할 때면  속이 울렁거려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던 모습. 그것을 막기 위해 엄마의 칼을 잡던 어린 나. 칼끝에서 느껴지던 물컹거리는 감각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 사장은 그런 나를 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비위 상해서 정육점에서 일은 제대로 할 수가 있겠냐고, 그러면서 나에게 너는 평생 잡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토가 나올까 입을 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지나가다 본 구인모집 글에 모든 희망을 걸 만큼 그 끔찍한 집에서 나오는 것이 절실했었으니까. 사장은 나와 달리 항정살을 쓱쓱 썰었고, 나는 사장의 손 밑에서 잘리는 고기들을 부지런히 포장했다.
 진열대에 놓인 고기들은 빠르게 팔려나갔다. 항정살, 채끝살, 부속 고기들까지. 사장이 썬 고기를 랩으로 포장하고 있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윤의 수술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정장을 입은 한 남자 손님이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의 가죽가방에는 기다란 마른미역이 삐져나와 있었다. 
“국거리용 고기 좋은 것으로 골라주세요. 미역국 끓일 거여서요.”
 남자는 이어서 며칠 전에 태어났다는 아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남자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보니 얼굴이 자꾸만 일그러져 갔다. 화가 나다가도 돈이 없는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져 화는 이내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윤에게 괜히 도움을 주겠다고 이야기했나 후회가 되었다.
 저녁이 되자 진열대가 텅텅 비었다. 사장의 기분은 여전히 좋아 보였다. 사장은 계산대 앞에 앉아 손가락에 침을 바르며 지폐를 셌다. 돈을 세던 사장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금니가 반짝였다. 나는 머뭇대다가 말했다. 
 “사장님, 저 가불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사장은 지폐를 챙겨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너 하는 것 봐서, 방금처럼 머뭇거리거나 하지 말고 칼도 좀 미리 갈아 놓고. 바빠 죽겠는데 센스 있게 일하자, 응? 나 먼저 간다, 정리 잘하고.”
 사장은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칼날을 비스듬히 눕혀 판판한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 끝이 붉은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숫돌에 칼을 가는 소리가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마음이 시려왔다. 칼끝이 점점 뾰족해질수록 그때 욕실에서 새어 나오던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그래,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 그건 죽어 있던 걸까?”
 나는 자꾸만 들리는 윤의 목소리에 묻는다. 쓱쓱. 숫돌에 칼을 가는 소리만이 정육점에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와 함께 죄책감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대회 당일은 바람 한 번 불지 않는 무더운 날이었다.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대구역에 내렸다. 여름의 대구는 무척이나 더웠고, 바디페인팅 대회에 필요한 화구는 무척이나 무거워 계속 땀이 났다. 하지만 윤은 별로 덥지 않다고 했다. 바디페인팅 대회가 열리는 곳은 대구 시내 근처에 있는 2.28 공원이었다. 윤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배 앞으로 고쳐맸다. 나는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공원의 한쪽에는 먹거리 부스가, 다른 한쪽에는 바디페인팅을 하는 것을 보거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참가 부스에 이름을 말하고 배부된 번호표를 받아 배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테이블 두 개가 있었다. 테이블마다 플라스틱 의자가 3개와 선풍기 한 대씩이 놓여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바로 선풍기부터 틀었다. 선풍기는 먼지를 날리며 달달 거리는 소리를 내며 미지근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캐리어에서 돗자리를 빼서 테이블 옆에 깔았다. 윤은 옷을 벗었다. 작업실에서 벗는 것처럼 땅으로 스르륵 하고 옷을 돗자리 위로 떨어뜨렸다. 물감들을 꺼내며 나는 곁눈질로 옆에 있는 다른 참가팀을 바라보았다. 옆에 팀은 벌써 초반 작업을 거의 다 마친 듯했다. 모델의 가슴부터 다리까지 나비 5마리가 날아다니고 꽃이 3송이 정도 핀 채였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슴보다 자꾸만 그 모델의 배에 눈이 갔다. 모델의 납작한 배는 정말 얇아서 평평한 종이만큼 그림을 그리기 쉬워 보였다. 모델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보지 않았던 것처럼 눈을 돌려 물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브래이지어를 벗어 윤의 상체는 브라캡 만을 한 채였다. 바디페인팅용 팬티 한 장 입은 윤의 몸 위를 붉은색으로 밑칠을 해주었다. 윤은 서 있었고 나는 윤의 몸에 전체적으로 색을 칠했다. 옆 테이블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하도 따가워 작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윤의 몸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무슨 말을 해도 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윤을 붉은 뱀으로 만들었다. 윤의 피부가 뱀의 비늘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윤과 함께하면서 나는 도안을 바꾸어버렸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남을 위해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윤을 지켜줄 만한 윤을 닮은 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윤의 배에 정말 사납고 눈매가 찢어진 뱀의 눈을 그려 넣었다. 붉은색의 비늘을 갖고 노란 눈으로 쳐다보는 뱀. 돈도 없는 내가 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윤의 배를 오랫동안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쳐다보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는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그래서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사람의 눈은 바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눈을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4시간을 걸친 작업이 끝났다. 더운 날씨에 자꾸만 땀이 흘렀다. 선풍기를 윤의 앞에 놓아주었다. 윤이 더우면 땀이 나면 물감이 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윤, 덥지 않아?”
 “선풍기 바람이 아니라도 계속 바람이 불어와서 난 괜찮아. 그다지 덥지 않고.”
 윤은 덥지 않다고 말했지만,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저 윤이 옷을 입지 않고 있어 약한 바람도 세게 느낀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햇빛이 조금은 덜한 오후 5시쯤, 모델들의 워킹이 시작되었다. 형형색색의 물감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걸어갔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그려진 그림을 따라 달랐다. 위풍당당하기도 했고, 유연하게 걸어가기도 했다. 나는 윤이 나오는 것을 무대 밑에서 바라보았다. 윤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내 그림이 아니라 윤의 배 때문이었다. 다리와 팔은 얇고 길어 다른 모델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배만 튀어나와 있었다. 윤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계속 길거리에 깔린 레드카펫 위를 걸어 나갔다. 윤은 레드카펫을 처음 밟을 때는 당당하게 걸었지만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허리를 수그리고는 걸어 나갔다. 꼭 반지하 방에서 걷는 것처럼. 윤의 눈동자에는 평소와 다르게 초점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난도질당하던 윤은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만 작아졌다. 윤이 걸어가고 난 후의 레드카펫은 윤이 걸어가기 전보다 더욱더 붉은 것처럼 보였다. 
 레드카펫 위로 모델들이 다 걸어 나가곤 수상 시간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수상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는 반지하 방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나와 다르게 전문적인 학원에서 배워서 온 사람들이 더 많을 테니까. 그들 중 아무나 받으리라했다. 대상, 금상, 은상, 동상을 차례대로 호명하였다. 난 그저 대회가 빨리 끝나 윤이 저 레드카펫에서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위해 윤을 저곳에 보낸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때 423번이 호명되었다. 나와 윤의 번호였다. 우리가 받은 상의 이름은 특별상이었다. 주최자 중 한 명이 나와서 우리에게 이 상을 주는 이유와 상의 의미를 설명했다. 아무리 내 작품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이었다. 대충 산부인과에서 의사가 말하던 10만 원짜리 훈계와 비슷한 말이었다. 조금 더 돈이 높게 걸린 올바른 말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만히 들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아마 우리에게 상을 주는 이유는 홍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보여주기식. 사람들에게 가장 논란이 될만한 것은 윤의 배였으니까. 그렇게 바라던 꿈의 자리였는데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후레시가 켜지고 카메라가 윤과 단상 위로 올라간 나를 계속해서 사진 찍었다. 앞을 보느라고 윤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천막으로 돌아온 윤과 나는 바로 특별상은 던져두고 상금부터 확인했다. 정확히 70만 원. 의사가 처음 제시한 액수였다.

 우리는 그날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고 그 돈을 들고 바로 병원을 예약했다. 윤은 대회가 끝나고 이제 계약이 끝이니 자신은 나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수술하고 회복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수술하는 당일, 윤은 혼자 병원으로, 나는 정육점으로 향했다. 윤은 수술을 들어가기 전 수술 들어갈 거라고 문자를 남겼다. 나는 잘 갔다 와, 괜찮을 거야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그냥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날도 나는 사장이 나가고 혼자 남아서 숫돌에 칼을 갈았다. 슥슥. 이상하게 숫돌을 갈 때마다 왜 윤이 그토록 추워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 귓가에서도 바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회 때 윤이 말한 바람 소리는 분명히 이 바람 소리일 것이다. 병원에서 돌아온 윤은 종일 방안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담요를 덮은 채. 춥다고 며칠을 계속 덜덜 떨었다. 내가 정육점에 가기 전에도, 갔다 오고 나서도 계속 누워만 있었다. 정말 미동도 없이 가만히 몸을 웅크리곤, 눈을 감고 있는 윤을 보며 나는 가끔 윤이 겨울잠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윤이 일어나는 것은 밥을 먹을 때만이었다. 정육점에서 가져온 항정살을 윤은 짐승처럼 먹었다. 가위나 칼로 잘라서 먹지 않고 포크로 고기를 집어서 이빨로 무자비하게 뜯어먹었다. 볼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윤, 천천히 먹어. 너꺼 안 뺏어 먹으니까. ”
 윤은 미친 듯이 입안에 음식물을 욱여넣느라 나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윤의 모습은 꼭 푸드파이터를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윤이 음식을 여전히 씹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계속 삼켰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곤 모든 것을 토해냈다. 예전의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며칠째 반복이었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에 넣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먹은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 토를 다 하고 나온 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배가 이상하게 자꾸만 텅 빈 것 같아. 귓가에서 자꾸만 서늘한 바람 소리가 들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그 구멍 너머로 자꾸만 스산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넘어가는 듯했다. 윤이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해서 더 행복하지는 않아도, 덜 불행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윤을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배가 텅 빈 것 같은 공허함도, 귓가에서 들리는 자꾸 서늘한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해줄게. 옷을 벗어봐.”
 나는 윤을 데리고 작업대로 갔다. 옷을 벗는 윤을 두고는 화구가 놓인 작업대로 갔다. 윤의 옷은 작업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소리를 들으며 아크릴판에 퍼머넌트 레드를 뿌렸다. 그리곤 윤의 배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윤의 배를 가득 채울만한 뱀을. 지워지지 않게 몇 번이고 덧칠했다. 윤의 공복감과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우리를 더 추위에 떨게 해주지 않을 그런 뱀. 윤은 그 뱀을 보고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몸을 웅크리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나의 귓가에서 자꾸만 들리는 서늘한 바람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작은 반지하 방 창문 너머로 들어온 햇빛이 붉게 칠해진 윤의 배 위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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