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니스트] 우리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
[나도 칼럼니스트] 우리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
  • 오수민(정치외교2)
  • 승인 2021.09.2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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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옆집, 아랫집 할 것 없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힘든 것이 있으면 당사자가 된 것처럼 함께 슬퍼한다. 그러나 요즘, 특히 2020년 코로나가 발생하고 나서는 정(情)이 없어졌다. 자기 이익만 챙기기 바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남은 뒤돌아 봐주지도 않는다. 설사 그게 부모님, 형제, 자매, 친구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현실이 ‘피치 못할 현상’쯤이라 여기는 사람도 많을 테다. 하지만 이건 피치 못할, 혹은 바꾸지 못할 ‘현상’이 아니라 나를 더 따뜻하게, 남을 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기회’다. 우리는 슬픔을 반까진 아니더라도 4분의 1 정도로, 기쁨은 두 배까지는 아닐지언정 1.5배까지 함께 나누는 힘이 있다. 이걸 아는 사람들도 분명 많다. 아직 실천할 용기가 안 날 뿐이다. ‘나만 너무 오지랖 부리는 건가?’, ‘나만 인류애가 넘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내가 건네는 배려를 스스로 두려워할 수 있다. 내가 건넨 배려와 행복은 분명 상대방도 감사하게 여길 것이고 결국 그것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필자는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다가 토하고 있는 취객을 봤다. 내 마음이 다 안쓰러워 편의점에서 산 파워에이드 캔을 건넸다. 그분은 ‘감사합니다’ 하고 받더니 결국 그 캔을 그 자리에 두고 갔다. 낯선 사람이 주는 물이나 음료를 함부로 마시면 안 되는 위험한 세상이라 그랬을까? 필자는 조금 상처받았다.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다. 가게 문은 뒷사람을 위해 조금 더 오래 열고 있고 뒷사람은 그 배려에 감사해 하고,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일부러 피해 앉는 그런 작은 배려 말이다. 너무 작지만, 한 편으로는 큰 배려에 세상은 더 살만해진다.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살면서 한 번쯤 다른 사람의 작은 배려에 큰 감동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무거운 짐을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아무도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양보는 선택의 영역이니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허리도 제대로 못 펴는 할아버지께서 내 손을 이끌더니 당신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독자들도 작은 배려를 남에게 베풀기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소수의 사람만이 읽어 소수만이 ‘우리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겠지만, 그 적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알고 자그마한 배려를 실천하길 바란다. 내가 건넨 배려 뒤에 ‘나 정말 착한 사람이다’, ‘내 도움에 저 사람은 덜 힘들겠지?’ 하면서 자찬하는 것도 꽤 좋은 일이다. 그리고 ‘나한테도 저런 배려가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김칫국이 아니라 미래에서 다가오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조금은 자기 칭찬도 할 줄 아는 여유 있고 희망차며 바른 영남대학교 학생이 돼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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