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일제하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법적 연구
[학술] 일제하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법적 연구
  • 배병일 교수(법학전문대학원)
  • 승인 2021.05.3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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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지금과 같이 IT 중심의 4차 산업, 서비스 중심의 3차 산업이나 제조업과 같은 2차 산업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주로 토지생산력을 바탕으로 하는 농업 등 1차 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 운영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 중의 하나가 토지소유자로부터 토지세의 징수였다.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양안(量案)을 기준으로 징세를 하였으나, 수취체제의 제도적 흠결이나 장부의 허술함으로 인하여 토지세수의 확보가 쉽지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말기 국가를 운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하면서 국가 운영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가 국가 예산이라고 보았고, 그 예산의 바탕이 되는 징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종래와 같은 허술한 징세체제로는 조선총독부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세금 수입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수취체제의 바탕이 되는 근대적 토지제도를 정비하여 소유자를 확정하고, 나아가 공시방법을 도입하려고 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는 사유재산제도이고, 그 당시로서는 사유재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다. 그 당시 토지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권, 물권법적 관계와 채권법적 관계의 구별 등은 분명하지 않았다. 또한 토지 세금은 토지소유자에게 귀속되어야 하지만, 그 당시에는 경작인이나 점유자로부터 토지세를 징수하는 등 불명확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토지세를 확실하게 징수하기 위해서는 토지소유권의 범위와 소유자 확정, 소유권 공시 등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야만 가능하였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토지를 측량하여 면적을 확정하고, 토지소유자를 사정을 통해 확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대장과 등기를 만들었다. 토지를 거래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으로 권리관계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방법을 공시라고 한다. 이러한 공시방법으로서 토지 등 부동산에는 등기가 있다. 그래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의 징표는 등기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까지는 이러한 공시제도로서 문기나 입안, 지계 가계나 부동산 증명 등이 있었지만, 그러한 공시제도로서는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적인 공시수단으로서 등기가 필요하였고, 등기제도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1918년 임야조사사업을 통해서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법률관계와 산업구조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에 대해서 그동안 법학계와 실무계는 너무 외면하거나 등한시하여 왔다. 오히려 그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소유권과 등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근원인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 법학계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등을 통해서 다수 이루어졌고, 우리 법원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토지의 사정과 소유권 등에 관하여 많은 판결을 쏟아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법학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고, 관련 판결에 대한 판례연구도 많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우리나라와 1876년 강화도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었고,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결국 일제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나라를 침략하였고, 우리 국민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다.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1912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지세수탈을 위한 제도적 정비를 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으로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지적도, 토지대장과 임야대장, 등기제도가 도입되었고, 그 때 만들어진 지적도, 대장과 등기는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용되면서 우리나라 법률관계를 비롯한 법률문화와 토지 행정정보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아니하고 우리나라에서만 처음으로 토지조사사업을 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부국강병책을 강구하면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은 부국강병책의 요체가 국부의 근본인 예산이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금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부국강병을 하기 위해서는 세수확보를 위한 토지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들은 빈약한 토지생산력에 근거하여 부정확한 수취체제로 한 지세에 의존하여 국가운영의 핵심인 예산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토지소유권을 확정하고 이를 개인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등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먼저 일본 본토에서 토지제도에 관한 법적 정비를 하였고, 이후 홋카이도(北海道), 오키나와(沖縄), 대만 등을 침략하면서 토지제도정비에 관심을 가졌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885년 일본 본토에서 지조개정(地租 改正)을 위한 토지지압조사사업(土地地押調査事業)을 하면서 토지측량을 하고, 개인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근대적 공시방법인 등기를 도입하였다. 이후 류큐국(琉球國)이었던 오키나와에서 1898년 토지정리사업을 하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구체화하였고, 다음으로 1898년 타이완(臺灣)에서 대만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소유자 확정과 등기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미 우리나라도 자체적으로 대한제국시절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측량기술자를 양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제의 통감부 설치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측량기사를 양성하고, 토지조사사업의 근거 장부로서 결수연명부를 작성하는 등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식민지를 수탈하기 위한 침략정책의 일환으로서 토지조사사업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은 우리나라 토지제도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제적 효과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한 분석이나 장단점 등에 대해 경제적, 이념적으로 논란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대하여 수탈을 하였는가 아니면 근대화를 이루었는가 하는 점이다. 일제는 근대화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수탈적, 박탈적 사업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을 토지소유권의 확정과 지세부과의 정리라고 하여 토지조사사업의 명분을 근대적 토지소유권체제를 바탕으로 한 토지제도의 근대화로의 정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조사사업이 증세를 통한 조선총독부 운영 예산의 확보가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 명목상으로는 근대화라고 하였더라도, 실제로는 수탈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중 하나는 지세부과의 정리였고, 이는 수취체제를 정비해서 토지세를 정확히 거둬들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확한 세원을 파악해야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있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토지세를 제대로 징수할 수 없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토지의 면적이나 소유권 등 권리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등 토지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권을 확정하고 등기를 도입하여 토지제도정비를 통한 수취체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농업기계를 바탕으로 선진 농업기법을 활용한 획기적인 농업생산력을 창출하고 있지만, 1세기전 그 당시에는 사람의 인력에 의존한 후진적인 농업기법에 바탕한 빈약한 토지생산력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빈약한 토지 생산력에 대한 고율의 토지세금은 사실상 백성의 고혈(膏血)을 빨아내는 수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신고제에 의한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유권을 박탈하였고, 나아가 지세부과를 위한 정리사업으로 인한 증세의 고통을 우리 국민에게 안겨 준 것을 보더라도 수탈의 실상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세금 증액에 따른 일제의 수탈에 엄청난 고생을 하였고, 이에 저항하기 위해 소작쟁의 등 세금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강력한 물권적 권리로 존재하였던 제도를 채권적 권리로 왜곡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즉 기존의 임야 입회권이나 전답 도지권 등 물권적 권리를 폐지하거나 임차권 등 채권적 권리로 파악하여 소멸시키기도 하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과정에서 당시 일본 민법에서는 알 수 없었던 종중의 존재를 확인하였지만, 그 종중의 재산에 대해서는 입법적 미비로 등기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입법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무시하였다. 이에 구한말과 일제초기 당시 이미 많은 토지를 중심으로 한 재산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종중은 토지조사사업 당시 종중명의로 등기할 수 없었고, 종중 토지를 종원 명의로 등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종중과 종원의 법률관계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조차 존재하였는지 여부가 불투명한 명의신탁이라는 해괴한 법리를 창출하여 종중의 소유권을 왜곡 박탈하고 종중의 재산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당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부상하고 있던 종중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렸다. 종중이외에 향교, 서원 등 권리능력없는 사단도 1930년 조선부동산등기령이 개정되기 이전까지는 그 단체 명의로 등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멀쩡하게 가지고 있었던 단체 소유권을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입회권은 마을재산으로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초장(柴草場) 등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던 관습적 물권적 권리이었지만, 심지어 일제의 민법체계에서도 입회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도 물권적 입회권을 부정 왜곡하여 폐지하였다가 마을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부득이 양여 등을 통해 소유권을 인정함으로써 마을재산의 소유권을 부활시켰다. 이처럼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기존의 강력하고 절대적인 물권적 권리로 존재하던 우리 고유의 제도를 상대적인 채권적 권리로 격하시키거나 부정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재산권을 수탈하였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였던 오키나와, 대만, 관동주, 만주 등에서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이미 이용하던 수법이었다. 

 다른 한편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의 토지신고를 받으면서 소유자 확인을 위한 근거로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만들어 둔 결수연명부를 이용하면서도 토지사정의 절대적 효력을 통해 종전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는 종전 조선에서의 결수연명부상의 소유권을 전제로 하여 토지조사사업에서의 소유권 사정을 하면서도 종전의 소유권과 단절된 새로운 소유권을 창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소유권이 불분명하였던 토지소유자들은 세금을 더 내는 대신 소유자로서 절대적인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은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이미 소유자로서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조사사업의 결과로서 소유권을 사정(査定)받아 법인(法認)함으로써 절대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지만, 일부는 토지 신고를 하지 아니하거나 하지 못함으로써 소유권이 박탈당한 경우도 있었다.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이처럼 많은 법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법원은 일제하 조선고등법원판결의 법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사정은 절대적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적효력을 가진다고 하여 달리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법적 연구는 매우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는 지적재조사에 관한 특별법(시행 2012. 3. 17., 법률 제11062호, 2011. 9. 16., 제정)에 근거하여 지적재조사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일제하에서의 토지제도 모두에 대한 변혁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 연구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졸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첫째, 일제하 토지조사사업과정에서 왜곡된 법리를 바로잡을 필요성에 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소유권 등 재산권을 왜곡하여 수탈하였다. 일제하 토지조사사업에서의 수탈과 부당함에 대한 우리 국민의 법적 소송을 일제는 조선고등법원판결을 통해 그 왜곡을 정당화하였다. 그럼에도 해방후 우리 대법원은 왜곡된 일제하 조선고등법원판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이 연구로 조선고등법원판결을 답습하고 있는 대법원판결의 법리를 변경하는 토대가 형성되었으면 한다. 둘째,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법학분야의 연구 부족을 보완하고자 한다. 그동안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측면에서의 연구는 많았지만, 법학 측면에서의 연구는 부족했다. 보잘 것 없는 이 연구가 미력이나마 그 연구 부족을 채웠으면 한다. 셋째, 지적 호기심이다. 우연히 일제하 토지조사사업의 사정(査定)에 관한 대법원판결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조사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호기심과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척박한 연구 풍토를 무릅쓰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여 이번에 상재(上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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