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미디어는 성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학술] 미디어는 성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 주형일 교수(언론정보학과)
  • 승인 2021.03.2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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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의 재현

 섹스는 인간의 생물학적 존속을 위한 필수 행위이자 보편적 행위이면서도 은밀하고 사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섹스를 재현하는 콘텐츠는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가장 흔한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엄하게 은폐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포르노그래피라는 말로 총칭될 수 있는 이 콘텐츠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정치적 필요, 사회적 규범 등에 따라 어떤 사회에서는 폭넓게 허용되고 다른 사회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왔다.

 포르노그래피가 문제로 인식되면서 규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이다.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등장하면서 점점 거대해지고 복잡해지는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의 신체와 행동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다. 근대의 철학과 종교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집권적 통치를 위한 규범을 만들었고 정치 권력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통해 구성원을 통제했다. 이 과정에서 포르노그래피는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악으로 규정되고 금지되었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것은 지배 집단의 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자유사상가들이 왕정과 교회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포르노그래피를 이용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60년대에 서구에서 포르노그래피 허용을 요구하는 운동이 발생한 것도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성적 자율권을 요구했다. 포르노그래피를 제작하고 즐기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성의 해방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특히 남성보다 성적으로 더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던 여성들이 낙태와 피임의 권리를 요구하고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면서 성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포르노그래피 문제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되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남성의 권력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포르노그래피의 금지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디어가 섹스를 재현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와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옹호하면서 포르노그래피 허용을 요구하는 의견과 여성의 대상화와 상품화를 비판하면서 포르노그래피 금지를 주장하는 의견이 대립했다.

 두 진영의 대립은 최근 등장한 탈코르셋 논쟁에서도 되풀이된다. 화장이나 의상 등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꾸미는 행위에 대해 한쪽에서는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행사하는 행위라고 보고 다른 쪽에서는 여성이 스스로 대상화, 상품화되는 행위라고 본다. 미디어에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을 추는 젊은 여성을 재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사회적, 경제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평가하면서 여성이 성적으로 주체화되는 작업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는 여성이 남성의 응시에 몸을 노출하고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한 상품으로 자신을 꾸민다고 평가하면서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작업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젠더의 재현

 미디어에서 섹스가 재현되는 문제는 곧장 젠더가 재현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것은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재현되는 문제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이다. 이 규범은 사회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부여하는 역할과 책임을 통해 드러난다. 

 자본주의 체계의 근간이 되는 이성애 일부일처제의 핵가족은 노동의 성별 분업을 통해 생산성과 노동력 재생산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핵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임금노동자로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는 가사노동자로서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남성에게는 공적 영역에서의 임금노동을, 여성에게는 사적 영역에서의 돌봄 노동을 할당하는 성별 노동 분업은 남성과 여성의 생리적, 심리적 차이를 사회적 차이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남성은 육체적으로 강한 힘과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갖고 있지만, 여성은 신체적인 유연함과 감성적인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남성에게는 공적 영역에서의 경쟁과 협력을 통한 생산적 노동의 역할을 부여하고 여성에게는 사적 영역에서의 공감과 이해를 통한 정서적 돌봄 노동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남성이 노동을 통해 획득한 임금으로 여성과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하고 여성은 남성이 일터에서 경쟁하고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 체계는 남성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여성의 노동력을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가족의 생계 부양 의무를 가진 남성의 임금은 개인을 위한 임금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임금으로 이해되지만, 여성의 임금은 개인을 위한 부가적인 임금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남성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대한 열심히 일하고 여성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노동을 위해 싼값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성별 노동 분업 구조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감성적이고 사랑 지향적인 여성은 낭만적 사랑을 추구하면서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성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자 한다. 모성본능 덕분에 여성은 가정에서의 요리, 청소, 육아와 같은 돌봄 노동에 적합하다.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남성을 치유하고 재충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여성의 힘은 사회의 마지막 안전판 역할을 한다. 여성은 가정을 지키고 책임지는 존재로서 남편과 자식이 사회의 노동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여성은 필요할 때는 한시적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고 남성의 노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가정으로 돌아가는 헌신적 존재이다. 

 핵가족은 낭만적 사랑과 연애를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낭만적 사랑은 데이트 문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미디어 콘텐츠는 낭만적 사랑을 재현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 줌으로써 성별 노동 분업을 정상적인 규범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성별 노동 분업이 데이트 문화와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재생산되기도 한다. 낭만적 사랑을 재현하는 미디어 콘텐츠는 성별 노동 분업을 반영하는 동시에 조장하는 것이다.

 미디어 콘텐츠가 재현하는 낭만적 사랑은 첫눈에 빠지는 사랑, 힘과 부를 가진 남성, 순종적이고 섹시한 여성, 물질적 소비와 교환, 열정적 성행위, 갈등의 극복과 화해, 영원한 행복이라는 공식을 따라 작동한다. 낭만적 사랑의 실천은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고정된 속성과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적 규범을 강화한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접근하고 데이트를 기획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선물을 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역할은 남성이 담당하는 반면에, 여성은 소극적이고 얌전하고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가 고착화된다.
 

섹슈얼리티의 재현

 핵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구현되는 가부장적 질서를 재현하는 미디어는 이성애를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 간주하는 사회적 규범을 반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미디어 콘텐츠에서 이성애는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서 인간관계를 묘사할 때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는 섹슈얼리티이다. 이성애가 아닌 섹슈얼리티는 미디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으며 미디어 콘텐츠에 등장할 때도 이상하고 이질적인 것,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성애가 아닌 섹슈얼리티 중에서 미디어에서 그나마 자주 재현되는 것은 동성애이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면서부터이다.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없는 동성애는 국가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회악이자 끔찍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미디어 콘텐츠에도 반영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동성애자는 범죄자나 악당으로 재현되거나 우스꽝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모습으로 희화화되었다. 또한, 동성애의 유혹에 빠지거나 동성애를 실천한 사람들은 자살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는 식으로 재현되었다.

 미디어가 동성애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거나 동성애를 일상적인 섹슈얼리티의 하나로 긍정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이다. 1980년대에 발견된 에이즈(AIDS)로 인해 동성애 혐오가 사회적으로 심해진 것은 역설적으로 동성애 인권 운동을 활성화했다. 한국에서도 공중위생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에이즈의 등장으로 사회적 담론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있던 동성애가 사실상 강제적으로 가시화되었다. 동성애자 인권 단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이 이어지면서 텔레비전에서도 동성애를 다룰 정도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갔다.

 21세기에 들어서 미디어의 동성애 재현은 긍정적으로 변했다. 정치적 민주화를 바탕으로 사회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회 운동 집단들의 활동이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경쟁이라는 상상의 장을 마련해 놓고 개인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 경쟁의 장에서 발생하는 결과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등장도 한몫했다. 선택은 개인의 자유이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도 개인이 져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섹슈얼리티의 선택에도 적용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퀴어에 대한 무관심적 관용도를 증가시켰다.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회적 제도와 장치는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섹슈얼리티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의 무관심적 관용은 평등을 가장한 차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 소수자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친구와 가족밖에는 없다. 실제로 동성애 영화와 드라마에서 제시되는 동성애 문제의 해결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차원에 머문다.

 미디어가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동성애를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 안으로 끌어들일 때 가능하다.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성애가 아름다울 때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이 드러날 때이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구현하는 동성애는 아름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한 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사랑에 빠진 두 남성의 이야기는 한 명이 여성으로 바뀌어도 서사 전개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인간의 ‘보편적 사랑’으로 만들고 이 ‘보편적 사랑’의 경계선 안에 동성애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동성애는 이성애적 사회질서가 용인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가 된다.

 동성애를 비롯한 퀴어 섹슈얼리티들이 각각의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섹슈얼리티로 환원되지 않듯이, 이성애도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 섹슈얼리티다. 하지만 사회는 집단적 압력을 통해 개인에게 단일한 성 정체성을 갖도록 강요한다. 미디어 콘텐츠는 섹슈얼리티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면서 단일한 성 정체성이란 환상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미디어가 성을 어떻게 재현하는지를 알아보고 그 과정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담론이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성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기반이면서도 사회문화적 담론의 구성체이기도 하다. 성은 너무나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이해되고 실천된다는 특성을 가진다. 미디어가 일상을 재현하는 콘텐츠를 통해 보여주는 성은 자연적이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 콘텐츠가 항상 특수한 이해관계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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