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니스트]성소수자는 우리 곁에 존재한다
[나도 칼럼니스트]성소수자는 우리 곁에 존재한다
  • 윤서연(철학2)
  • 승인 2021.03.2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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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최근 명을 달리했다. 단칸방에서 홀로 죽은 그의 시신은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발견됐다. 연락이 며칠째 없던 차였다. 검찰은 범죄 등을 의심할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검식 결과를 내놓았다. 장례식은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에 끝마쳐졌다. 군은 사망소식 전날에도 법원에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을 주장했다. “성기 재건 수술은 고의로 성기를 훼손한 자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사망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국방부는 ‘민간인의 사망’이라고 하사의 죽음을 지칭하며 남겨진 이들마저 촌철살인 했다. 명백한 멸칭이었고, 모독이었다.

 하사의 빈소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문객은 그와 함께 혐오에 맞서 싸웠던 성소수자들이었다. 성소수자들의 조문은 비단 장례식에서만이 아닌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서울 지하철에서 이루어진 독서 행동, 광장에서 행한 추모 시위 등에서 소수자들은 서로의 안색을 살피고 안녕을 기원했다. 더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고, 잃어서는 안 됐으므로. 일면식이 없던 사람이라 해도, 사석에서는 얼굴을 붉혔던 상대라 해도 우리는 소수자성을 공유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동류이자 같은 동지들이었기에.

 최근 대구 동성로에서 있었던 추모 시위에서 한 발언자가 이런 말을 했다. “트랜스젠더가 자연사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트랜스젠더의 평균 수명은 30대가 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혐오와 차별에 노출되다 살해당하거나, 끝내 자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자연사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는 말은 역으로 소수자가 살해당하거나 자살하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는 소망이다. 누구에게나 천부인권은 주어져 있음에도 누군가는 커밍아웃을 하고 가족에게마저 연이 끊긴 채 최악의 경우에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조차 채 누리지 못하고 요절한다. 과거보다 의식 수준이 향상되고 윤리의식이 함양되었다 여겨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조차.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숱한 자살이 아니다. 이는 그녀의 죽음이 무게감이 있고 누군가의 자살은 가볍다는 둥 불행에 등수를 나누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죽음은 일개 개인의 자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트랜스젠더 당사자 대부분은 부고 소식에 크게 불안해했다. 그리 씩씩하던 변희수 하사마저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나라고 다를까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는, 우리는 살아나가야 한다. 변희수 하사의 전역처분취소 행정소송은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남겨진 우리들은 그녀와 함께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녀의 명예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는 있다.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 혹은 최대한의 추모일 테니까. 동료의 죽음에 무력하게 눈물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길일 테니까. 비록 많은 사람을 잃었으나, 더 잃을 수는 없는 까닭에 우리는 나아가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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