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압독국과 고대 경산, 그리고 영남대학교
[학술] 압독국과 고대 경산, 그리고 영남대학교
  • 김대욱 학예연구원
  • 승인 2020.09.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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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학교 캠퍼스가 자리한 경산지역은 고대 신라의 지방이었던 압독국의 옛터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 대학교 박물관(이하 박물관)은 약 50년 전 처음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압독국의 존재를 밝혀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고, 지금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해석하는 데에 매진하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압독국과 고대 경산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소개하고자 한다.

압독국과 임당유적

그림 1. 임당유적 유구분포도
그림 1. 임당유적 유구분포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보면 여러 개의 소국(小國)이 등장하는데 그중 압독국(押督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현재 경산지역에 기반을 두고 존재하였던 나라로 인정되고 있으며, 많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지난 30여 년간 우리 대학교 박물관을 중심으로 진행된 경산 일대의 발굴조사와 이를 통해 밝혀진 연구 성과 때문이다.

 임당유적은 경산 임당동·조영동, 압량면 부적리·신대리 일대에 걸쳐 형성된 얕은 구릉 위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유적은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사적516호)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고총고분군과 토성과 같은 방어유적, 주거지·저습지·환호 등 제사유적과 생활유적이 복합된 유적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약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축적된 고대 경산 사람들의 생활 문화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그림 1).

일제강점기의 임당유적

 이 임당유적이 처음 학계에 소개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1918년도 고적조사보고』 제1책(1922) 「원전숙인(原田淑人) 보고분(報告分)」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책에서는 <압량면 대동·조영동 고분>이라는 제목으로 임당유적을 소개하고 ‘대동부락에 접한 구릉 상에 있는 12기의 고분을 소개하면서 봉토들이 붕괴되었고 석재가 노출되어 있어 파괴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인근 밭에서 출토된 듯한 유개고배 7개와 적갈색연질토기 1개, 토제령 1개를 구입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조영동에 속한 지역에도 4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 역시 보존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망실될 것’이라며, 고분들의 보존대책 마련을 건의하고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라는 책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여기에는 ‘조영동에 직경 12·3간되는 고분 7·8기가 있는데 대동부락 서쪽 구릉상에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또 ‘부적동에는 직경 15간에서 20간되는 부정형의 큰 고분 4기가 있고 직경 12·3간 정도의 고분 여러 기도 부락의 남쪽 구릉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위에서 보듯 일제강점기에 이미 임당유적을 조사하고 소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에 대한 보존이나 관리 대책은 전혀 마련되지 않은 채 고분군 주변으로 민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유적은 계속해서 파괴됐다. 또한 이곳에서 드러난 많은 유물은 주변 민가에 보관되거나 타지역으로 유출되기도 하였다.

임당유적의 도굴 사건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10월, 박물관에서는 임당동 672번지에 있는 고분 2기가 도굴 중인 것을 확인하고 당시 경산 군수와 경산경찰서장에게 도굴범 체포와 도굴의 미연 방지책 마련 등을 포함한 고분의 보호·관리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문화유적총람』(1977)과 경북대학교 부속 박물관에서 발행한 『경상북도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1)-대구·달성·경산·칠곡지역-』(1980)과 같은 책자에 이 고분들이 계속 소개되었지만,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2년 2월 이 곳에서 도굴된 금제조익형관식, 순금제이식 등의 장신구와 은제과대, 환두대도 등 중요한 유물들이 해외로 밀반출되는 과정에서 적발되어 세간이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대구매일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에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서울신문(1982년 1월 15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사진 2·3).

서울신문 1월 15일 자
서울신문 1월 15일 자
사진 2. 임당동 고분군 도굴 관련 기사(대구매일신문 1982년 1월 15일 자)사진 3. 임당동 고분군 도굴품 압수 유물
사진 2. 임당동 고분군 도굴 관련 기사(대구매일신문 1982년 1월 15일 자)
사진 3. 임당동 고분군 도굴품 압수 유물

도굴을 계기로 시작된 임당동 고분군의 발굴조사

 이 사건을 계기로 1982년 박물관에서는 경산 임당동 고분군 중 4기의 봉토분을 발굴하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대부분이 도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000여 점이 넘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고(사진 4·5), 임당 2호분 내에서 발굴된 은제과대가 도굴 후 밀반출되다가 압수된 은제과대와 동일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박물관에서는 이 일대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 일대의 도시개발계획 도면을 수령하여 도면 위에 고분의 분포상황을 표시하였고, 고분의 현황을 촬영하여 만든 사진첩과 함께 경산군에 전달했다. 또 1986년 2월에는 이들 고분을 포함하여 경산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들이 더 파괴되거나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하루빨리 보호 조처를 취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학계와 『경산지표조사보고』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관계 당국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택지개발로 진행된 조영동 고분군의 발굴조사

사진 4. 임당동 고분군 발굴조사 전경
사진 4. 임당동 고분군 발굴조사 전경
사진 5. 임당동 고분군 발굴조사 전경
사진 5. 임당동 고분군 발굴조사 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10월 이 일대가 택지개발사업지구로 결정되었고, 아무런 보존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공사가 시작되어 많은 고분이 파괴되었다. 1987년 4월 이 일대에서 많은 고분이 파괴되어 유물이 노출된 현장을 목격한 박물관에서는 유적 보호를 요청하는 공문을 경산군에 전달하는 등 이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행히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대구매일신문, 1987년 4월 13·14일 자) 경산군과 한국토지개발공사 경북지사와 수차례의 협의를 거쳐 택지개발지구 내의 봉분이 남아있는 지역과 공사 중 유구가 노출되어 있는 지역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발굴에서는 대형 고총을 비롯한 120여 기의 고분에서 5,000점 이상의 유물이 쏟아져 당시 언론에서는 연일 이 자료를 보도하기에 바빴다. 발굴조사 이후 조영동 고분군은 사적 제331호로 지정되었다(사진 6).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발굴 경험을 토대로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지역에도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으니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공사에 앞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사업지구 내에서는 공사 중 유구나 유물이 출토될 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유물을 습득한 후 공사를 계속하라는 당국의 결정이 있었고, 이에 공사가 강행되어 유구와 유물의 파괴는 계속되었다. 큰 중장비로 삭토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분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절토된 단면상에는 고분의 잔해가 여전히 노출되고 있었다.

 우리 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이와 같이 공사가 계속 강행되면 고분들은 형체도 없이 파괴된다는 점을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였다. 결국 이러한 항의가 일부 수용되어 공사 중 유구의 잔해가 노출된 지역을 중심으로 1989년 10월부터 1990년 6월까지 사적 제331호로 지정된 조영동 고분군의 인접 지역과 공사로 유구가 노출되어 있는 지역을 주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206개의 분묘에서 100여 구의 인골이 확인되었으며 2,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진 6. 조영동 고총군 복원 후 전경
사진 6. 조영동 고총군 복원 후 전경

임당유적 발굴의 의의

 이상이 고대 경산이 압독국의 옛터임을 알 수 있게 한 1980년대 임당유적 발굴의 초창기 이야기이다. 이후로도 최근까지 임당유적 일대에 지속적인 개발과 발굴이 진행되면서 임당유적의 중요성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경산 임당유적은 넓은 압량벌과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임당 구릉 위에 축조된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이 함께 만들어진 대규모의 복합유적이다. 총 1,600여 기의 무덤과 주거지, 토성, 환호, 저습지 등의 다양한 생활유적이 확인되었으며, 약 25,000여 점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서기 전 2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약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사진 7·8).

사진 7·8. 임당유적 출토 유물
사진 7·8. 임당유적 출토 유물

삼국통일의 전초 기지, 고대 경산

 『삼국사기』(권5 선덕왕)에 642년 ‘왕이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신라 삼국통일의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한 문화유적으로 김유신이 병사들을 모아 무술과 정신을 연마시키던 연무장으로 추정되는 병영유적(사적 제218호)이 있으며 이 연무장에서 훈련을 마친 말을 위해 마련한 저수지인 마위지를 만들었는데 아낙네들은 여기서 말의 귀를 씻어주며 남편과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기도 하다.

압독국 옛터에 자리한 영남대학교

 여기 이곳 압독국의 옛터에 현재 우리 영남대학교 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1967년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통합하여 영남대학교로 새롭게 발족하면서 민족의 대학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1968년 6월 경산 압량벌 105만 평 정도의 광활한 대지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이듬해 세계 규모의 캠퍼스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 종합대학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교직원과 학생이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지만 너른 대지 속 완만한 구릉 사이로 크고 작은 연못들이 자리한 이곳 경산에서, 신라 삼국통일의 꿈을 이룬 김유신의 통일정신이 깃든 이곳 압량벌에서, 옛 화랑들의 기개가 살아 쉬는 이곳 경산캠퍼스에서 ‘민족의 대학’을 꿈꾸며 다시 힘을 내 일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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