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노래한 민족 시인 이상화
독립을 노래한 민족 시인 이상화
  • 이연주 기자, 이상준 수습기자
  • 승인 2020.08.31 1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이상화 시인은 대구의 대표시인이자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가이다. 이에 광복 75주년인 현재, 이상화 시인의 생애를 재조명하고자 대구에서 이상화 시인을 어떻게 기리고 있는지 알아봤다.

놓지 못한 희망의 끈

 이상화는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바꾼 선두주자다. 이에 이상화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와 함께 알아봤다.

 이상화 시인은=1901년 4월 5일에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상화 시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인 이일우의 손에서 성장했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상화는 흔히 대구의 명문가 집안의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항상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상화 시인은 백부의 교육열로 인해 우현서루에서 교육을 받고 1915년에 경성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경성 중앙학교 3년을 수료한 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유람한다. 이는 후에 이상화 시인의 시 창작 방향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저항에 대한 마음이 불타오르다=1919년 3월 1일, 이상화 시인은 대구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백기만과 함께 일제에 대한 항거를 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싹틔웠다.

 한편 1923년 9월,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일제는 수천 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핍박받던 국내외 상황과 착취당하는 농민의 모습을 본 이상화 시인은 무너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그는 사회주의 경향에서 좌파문학의 성향을 강하게 띤 시인으로, 사회계급에서 소외된 하층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가진 자들에 대한 저항, 즉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1923년 박영희와 김기진을 중심으로 신경향파 문인들이 모여 만든 파스큘라 동인에 가담했고, 이것이 사회주의 경향을 띠는 카프로 발전했다. 이는 기층민에 대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농촌의 집」,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상화 시인의 가정환경과 일제의 탄압 및 하층민에게 구원의 손길조차 없었던 절망적인 외부 상황과 관련 있을 것”이라며 기층민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전했다.

 1923년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와 1926년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일제에 저항하는 이상화 시인의 생각이 담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에 대해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해당 작품에서 이상화 시인의 저항 의식이 천상과 땅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을 통해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는 “현재 교육되고 있는 이상화 작품에 대한 설명에는 문학적 오류가 있다”며 “ 「나의 침실로」의 배경은 중구 남산동에 있는 성모당이 배경이며, 이에 따라 이상화가 기다리는 ‘마돈나’라는 임은 애인이 아닌 조국의 광복을 뜻하는 것이다”며 탐미적·관능적 경향의 시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상화 시인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 필요해=한편 이상화 시인은 당시 친일의 길을 걷던 많은 지식인들과 달리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다. 이에 대해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과거 일제에 항거했던 이상화 시인의 흔적을 우리가 제대로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도 지워질 수밖에 없다”며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통해 그의 시적 역량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구에 남겨진 이상화의 숨결

 대구의 대표 시인인 이상화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대구 지역 곳곳에서 이상화 시인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이상화 시인의 흔적을 찾아 대구에서 이상화 시인을 기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봤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

 이상화 시인이 숨 쉬던 현장을 찾아=대구 중심가에는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한 1943년까지 살던 이상화 고택이 있다. 중구 서성로 6-1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에는 이상화 시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고서 연보 동상이 전시돼 있다. 고택 안에 걸려있는 ‘반다시 애써 할 일’이라는 글을 통해 이상화 시인의 꼿꼿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상화 시인의 정신과 그의 문화적 업적을 계승하기 위해 이상화 고택은 현재까지 남아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화 고택이 보존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1996년 죽순문학회 회장이 이상화 고택 보존을 제안한 이후 2002년에 당시 이상규 경북대 교수를 포함해 이상화 시인을 존경하던 3인이 모여 고택 보존을 위해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한편 군인공제회는 인근에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했지만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했다. 대구시는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을 설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8년 8월 12일, 이상화 고택이 개방될 수 있었다.

 이상화 고택뿐 아니라 이상화 시인이 태어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이상화 생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서문로 2가 11번지에 위치한 이상화 생가터에는 ‘라일락뜨락 1956’이라는 카페가 자리해 활기를 더하고 있다. 카페 주인인 권도훈 대표는 근대골목투어에 참가한 후 이상화 생가를 알게 됐고, 이상화 생가에 있던 한옥을 리모델링해 카페로 재탄생시켰다. 해당 카페에서는 민족 시인 이상화의 삶을 알리기 위한 콘서트 등을 열고 있다. 지난해 10월, 암울했던 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예술세계를 꽃피웠던 두 청년을 기리는 골목콘서트 <상화와 고월:시인의 뜨락>이 해당 카페에서 진행됐다.

‘2019 상화로 문화축제’ 당시 모습
‘2019 상화로 문화축제’ 당시 모습

 상화로 문화기행 조성사업이란?=달서구청은 지난 2016년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공모 선정으로 ‘상화로 문화기행 조성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이는 해당 지역의 자연환경 문화 관광 역사 자원을 지역의 명소로 개발하고 문화유적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홍보하기 위함이다. 2018년 12월, 해당 사업의 일환으로 상화로 도시재생 문화기행 주민협의체(이하 상화로 주민협의체)가 결성됐다. 지난해 11월, 상화로 주민협의체는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 일원에서 ‘2019 상화로 문화축제’를 열었다. 해당 축제에는 주민 300여 명이 함께 했으며 상화 백일장 어린이 사생대회 시 낭송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더불어 상화로 주민협의체는 지난 6~7월에 상화로 지하 구간 탐사를 하는 등 현재까지 지역주민들과 함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상화로 주민협의체는 “해당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상화 시인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고, 지역주민들과 만나 우리 활동을 알릴 기회가 됐다”며 “사업이 끝나더라도 상화로를 알리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이상화 시인을 만날 수 있는=이외에도 민족 시인 이상화와 대구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주이씨 금낭공파와 논복공파 가문을 일컫는 이장가의 주요 인물들을 기념하고자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이 지난 2017년에 개관했다. 해당 전시관에는 구한말 및 일제시대 사진, 서적 등 유물 300여 점 이장가 일가의 미공개 사진 50여 점 이상규 경북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기증한 이상화 시집이 전시돼 있다. 이를 통해 일제에 항거했던 이장가 가문의 애국정신과 한국 근대사를 알아볼 수 있다.

이상화 시인과 함께한 그들

독립운동가 이상정
독립운동가 이상정

독립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한 이상정 장군

 이상정 장군(1897~1947)은 이상화 시인의 형이다. 이상정 장군은 사회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추구하고자 1925년 사회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단체인 용진단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용진단 관계자가 종로에서 적기(赤旗)를 흔들며 만세를 부른 적기사건에 연루돼 용진단에 대한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졌다. 이로 인해 이상정 장군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1925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중국 내에서 충칭육군 참모학교 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 전선에서 앞장서서 싸웠다. 8·15 광복 후, 이상정 장군은 중국에 남아 교포 보호에 힘쓰다가 1947년 귀국한 뒤 뇌출혈로 사망한다.

 한편 이상정 장군은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로,「개벽」잡지 등에 여러 편의 시조를 남기며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이상정 장군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그동안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이상정 장군의 독립운동 행적과 문학적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인 백기만
시인 백기만

대구를 사랑한 백기만 시인

 목우(牧牛) 백기만 시인은 1919년 대구의 3·1운동 중심인물로, 이상화 시인의 친구다. 백기만 시인은 ‘영웅’, ‘청개구리’ 등의 작품을 내며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이상화 시인이 작고한 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6·25전쟁 속에서도 이상화와 이장희 시인의 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1951년에 그들의 시를 정리한 시집「상화와 고월」을 간행했다.

 한편 백기만 시인은 근대 초창기 대구 향토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9년, 근대 초창기 대구·경북의 문화예술인을 알린 「씨 뿌린 사람들」을 발행했다. 해당 책은 향토 문화예술인 10명의 평전을 엮어낸 것이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은 “이러한 활동은 백기만 시인이 누구보다도 대구·경북 향토 문화예술인의 삶과, 작품의 독창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백기만 시인은 ‘대구시민의 노래’를 작사하고, 대구의 경치와 유적을 소개하는 등 대구와 관련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박창원 소장은 “이제는 우리가 백기만 시인을 찾아 나서야 할 때”라며 백기만 시인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활동과 사상을 재조명할 것을 제안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