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로를 거닌 사람] “더 많이 배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천마로를 거닌 사람] “더 많이 배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 김민석 기자, 정유진 수습기자
  • 승인 2020.08.3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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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혁영 동문(토목공63)은 우리 대학교 토목공학과(現 건설시스템공학과)를 졸업한 후, 우리나라 각지에서 국토건설에 매진했고 외화를 벌기 위해 해외 각지에 진출해 해외공사를 수주했다. 은퇴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재)최혁영장학회를 세워 우리 대학교 학생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최혁영 동문을 만나 우리나라 건설산업 발전에 바친 열정과 장학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 대학교에 지원하기 전, 대구교육대학에 입학하고자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대구교육대학에 입학했다면,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나요?

 가정형편이 어려워 2년 만에 교사가 될 수 있는 대구교육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시험을 보기 위해 고향 예천에서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자갈길 옆 국민학교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바꿨죠. 선생님이 되는 것도 보람이 있었겠지만, 여러지역을 다니면서 일해보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우리 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시기에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박정희 前 대통령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대대적인 국토개발에 나섰어요. 국토개발을 위해서는 토목기사의 역할이 중요했고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마침 주변 사람들이 청구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많은 선배들이 관직과 기업에 많이 진출해 있다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우리 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했어요.

 대학 시절 본인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한눈팔지 않고 공부하며 학교생활을 성실히 했던 것 같아요. 효목동에서 자취하던 때에는 대구선 기차 소리를 알람 삼아 항상 일찍 일어났어요. 그리고 강의가 없는 날에도 도서관을 찾아 공부했죠.

 대학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무엇인가요?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가정형편이 어려웠어요. 큰형님의 도움으로 1학년 1학기는 등록할 수 있었으나, 2학기에는 큰형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등록금을 내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시험 칠 때, 교무처 선생님께 시험지에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해당 학기가 인정됐어요. 그 확인 도장은 등록금을 낸 학생들에게만 찍어줬는데, 저는 시험을 응시할 때까지 등록금을 내지 못했어요. 당시 토목공학과 주임교수님이신 최영박 교수님의 자택에 찾아가 시험을 칠 수 있도록 청원했어요. 며칠 후 시험시간, 교무처 선생님께서 제 시험지에도 도장을 찍어주셨고 덕분에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어요. 나중에 군대에서 큰형님께 편지로 2학기 성적표를 받았을 때, 2학기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영어 콘사이스’ 책만 갖고 군에 입대했을 정도로 영어 공부를 중요시한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경제개발을 위해 많은 외국 자본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외국 자본과 지식을 많이 접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어 공부가 필수라고 생각해 영어영문학과 시사영어 수업도 들었어요. 자투리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고자 ‘영어 콘사이스’ 한 권을 갖고 입대했죠.

 군 제대 후 행정직 군속 공무원(現 군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위해서는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 1학기까지 두 개 학기의 등록금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가정형편이 어려워 복학할 수 없었죠. 그러던 중 2군 사령부에서 행정직 군속 공무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대학에 복학하고자 군속 공무원에 지원했어요. 행정직 군속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월급을 아껴 등록금을 마련해 2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 공부도 병행했는데 공부하기 힘들지 않았나요?

 낮에는 행정업무를 보고, 퇴근 후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어요. 일과 공부, 두 가지 일을 병행하다 보니 예·복습할 시간이 없어,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했기에 그만두고 싶거나 힘들지는 않았어요.

 직장생활로 안정적인 수입이 있었음에도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공부를 이어갔습니다.

 행정업무는 돈을 벌 수 있었고 일이 단순해서 어렵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토목기사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꿈은 버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군속 공무원을 그만두고 공부에 매진해 3학년 때는 장학생이 됐어요.

 행정직 군속 공무원, 철도청 공무원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취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철도청 4급 공무원 월급은 1만 2천 원 정도였고 기업체 신입사원 월급은 2만 원이었어요. 기업체에 취업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도청 4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계속 취업시험을 치렀고 신진자동차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했어요.

 신진자동차그룹에서 삼성종합건설(現 삼성물산 건설부문)으로 이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신진자동차그룹은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제가 이란에서 코람샤항만공사 등 공사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마침 삼성그룹에서 중간간부급 모집이 있었어요. 그래서 삼성그룹에서 근무하며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자 삼성종합건설에 입사했어요.

 해외에서 수주한 공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사는 무엇인가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공항 공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저는 리비아 지사의 견적 및 공사 수주담당자였는데, 본사와 저의 견적이 달라 마찰이 있었어요. 본사는 제가 생각한 금액보다 약 1천만 달러를 적게 견적했는데, 입찰 금액이 적으면 다른 회사와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어요. 그래서 본사를 설득해 제가 견적한 입찰 금액으로 입찰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 결과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 우리 회사가 낙찰됐죠. 그리고 이 공사에서 약 1천만 달러의 이익을 낼 수 있었어요.

 삼성종합건설을 퇴직하고 1990년 삼우토건을 설립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나요?

 1993년 중앙고속도로 건설공사 중 횡성구간의 터널공사 2곳을 수주했는데, 공사 중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당시 폭우가 내려 현장 사무실, 화약고, 가교 등이 유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어요. 저는 아파서 입원 중이고 적자는 누적돼 공사를 해약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로 인해 회사의 신뢰도가 낮아지는 등 큰 타격을 입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른 공사 현장의 시공관리를 성실히 해 다시 업계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어요. 덕분에 그 전보다 더 많은 공사를 수주하게 됐어요.

 장학재단을 설립해 모교의 후배들을 포함해 전국의 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전달해 든든한 후견인이 돼주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전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019년 (재)최혁영장학회 장학증서 수여식
2019년 (재)최혁영장학회 장학증서 수여식

 장학 사업을 시작한 지는 10년, 장학재단을 설립한 지는 7년이 지났어요. 대학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하며 그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돈 때문에 꿈을 저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85세로 정하고 남은 일생을 장학사업에 투신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앞으로 20여 년 후면 (재)최혁영장학회 손자, 손녀들이 모든 분야에 진출하여 훌륭한 인재로 거듭날 것으로 생각해요.

 (재)최혁영장학회의 운영 목표는 무엇인가요?

 첫째, 인성이 풍부한 인재육성.
 둘째, 창의와 혁신을 할 수 있는 인재육성.
 셋째, 항상 다르게 생각하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육성.
 넷째, 전문성 있는 인재육성.
 이를 위해 각종 자료를 제공하고 각자 전공이 다른 장학생들과 교류를 추진하고 있어요.
 

 그간 동정을 보면 모교와 모교의 후배들을 위한 마음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가 이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우리 대학교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교가 잘 돼야만 나도 있고 동문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 대학교에 애착이 가요. 그래서 기회가 되는 만큼 모교 발전에 이바지하고 모교의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장학금을 지급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매년 두세 차례씩 장학생들과 지속적으로 간담회를 열고 전자우편을 통해 장학생들과 꾸준히 소통한다고 들었습니다.

모교의 (재)최혁영장학회 손자, 손녀들과 함께

 우리 장학회의 운영목표에 따라 장학생들 교류를 추진하고 있어요. 조직이 활성화되고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해요. 제가 사랑하는 (재)최혁영장학회 손자, 손녀들과 소통하기 위해 매번 짝수 월에 전자우편을 보내고 있어요. 제가 읽은 책에서 장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문장을 메모해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보내곤 하죠. 그리고 홀수 월에는 손자, 손녀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며 저의 편지에 대한 실천 여부, 각자 생각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요.

 장학금 지급뿐만 아니라 ‘빅타임’, ‘천마터널분수’ 등 우리 대학교에 많은 시설물을 설치했습니다. 이러한 시설물들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80m 높이의 중앙도서관 외벽 상단에 설치된 ‘빅타임’
80m 높이의 중앙도서관 외벽 상단에 설치된 ‘빅타임’
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이 분수를 통해 고민과 번뇌를 씻어내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은 ‘천마터널분수’
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이 분수를 통해 고민과 번뇌를 씻어내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은 ‘천마터널분수’

 서양에서는 동문이 모교 캠퍼스에 기념물을 설치하곤 해요. 그것을 보고 우리 대학교에도 그런 기념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후배들이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주역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 자그마한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죠. 그 의미로 지난 2018년 ‘빅타임’을, 올해는 ‘천마터널분수’를 설치했어요. 앞으로 장학금 지급과는 별개로 이와 같은 사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후세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성실하게 인생을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금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아침마다 6km씩 달리고 매일 책을 읽고 있어요. 이처럼 남은 인생도 더 많이 알아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에요.

 건설시스템공학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미 선진국들은 국가 경제를 위해 많은 투자를 했어요. 그 결과 현재는 사회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 토목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없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이미 건설된 사회기반시설을 어떻게 유지관리 하느냐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또한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기 때문에 지하시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해요. 더불어 시대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구해야 해요. 예를 들어 무인자동차 시대에는 기존 도로의 문제점이 두드러질 거예요. 더불어 이번 장마로 발생한 수해도 우리 토목공학자들이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기도 해요. 단순히 하나의 생각만이 아닌 여러 분야를 골고루 생각해보면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학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 좌우명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에요. 우리 대학교 후배들이 더 멀리 보고 도전정신으로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되지 말고 세계의 개척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또한 자기만의 꿈과 계획을 갖고 후회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며 도전적으로 살아가길 바라요.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많은 우리 대학교 학생들이 일과를 마치고 캠퍼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빅타임’을 보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계획하곤 한다. 건설시스템공학을 전공해 국토 균형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필자는 매일 바라보는 그 ‘빅타임’을 우리에게 선물한 우리 학과 대선배를 만난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코로나19가 선배님과의 대면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적어준 한 글자, 한 글자는 필자가 그를 직접 만난 것처럼 강하게 와 닿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가능성을 먼저 따지기 시작했다. 함부로 도전했다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닐까 봐 등 부정적인 결과부터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거치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한계를 너무 쉽게 설정하는 것이 아닐까. 최혁영 동문의 이야기에서는 ‘포기’를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자 노력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한계는 결국 스스로 씌운 프레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대학교가 지방대학이라는 지리적 한계에도 각종 평가에서 우수한 지표를 나타내는 것은 모두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인 동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최혁영 동문은 모교가 잘 돼야 자신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에 필자 또한 그의 소망이 담긴 ‘빅타임’을 보며, 큰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해 우리 대학교의 위상을 드높일 자랑스러운 동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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