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냉철한 ‘알아차림’이 필요한 때
[사설] 냉철한 ‘알아차림’이 필요한 때
  • 영대신문
  • 승인 2019.11.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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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던 책의 제목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 말이야 말로 한 시대의 마음을 낚은 지혜의 카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인식론적으로 보면 조금은 불완전해 보인다. 그래서 이 문장을 “멈추어 알아차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바꾸면 그 불완전이 다소 해소되는 것 같다. 사실 몸, 감각, 생각 등을 아무리 멈춘들 ‘알아차림’이 없으면 세상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혹은 생각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을 표절해서 ‘알아차림이 존재를 규정한다’고 해도 감히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2019학년도 2학기 성적정정은 2019년 12월 31일부터 2020년 1월 2일까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성적정정 기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해 보면 벌써 여러 예측이 떠오른다. 먼저 더없이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성적이의 신청 메일이 예상되고 그때는 상호 소통을 통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기대된다. 그런데 때로는 비합리적인 말하자면 근거 없는 주장의 이의신청도  있을 것 같다. “똑같이 공부한 친구 성적이 나보다 더 잘 나왔는데 잘못된 것 같다”, “출석도 다 하고 과제도 다 내고 시험도 다 쳤는데 성적이 너무 낮다”, “이번에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B이상은 받아야 한다”, “복수전공신청을 위해 성적을 올려주셔야 한다”, “전과를 하려면 B이상이 필요하다” 등이다. 이외에도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개인의 구구절절한 사정이야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이의 신청을 받을 때면 교수자로서 혹은 인생의 선배로서 매번 변함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스스로를 근거 없는 비합리의 막장으로 밀어 넣는 매우 불편한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학생이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학업에 대해 ‘알아차리기’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러기에 기말을 앞둔 현재 우리 학생들이 자신의 성실성에 대해, 자신의 학업방법에 대해, 교수와의 소통에 대해 ‘알아차리기’를 하였으면 하는 바람 더없이 간절하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맑은 정신으로 시시각각 점검하고 성찰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엄을 함부로 비합리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않기를 기대한다.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기’야 말로 학생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점점 어려워지는 대내외적 여건에서도 학교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 분투하며, 그 결실로 크고 작은 성과물을 만들어 내는 학교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우리가 크고 작은 성공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알아차림’의 일도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학교의 발전을 위하는 가운데 혹여 매우 중요한 것들을 놓쳤거나 외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학령인구의 감소와 재정 악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학교 시스템 도입에 고의로 반대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요구된 대학 패러다임의 혁신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저항했을 수도 있고, 변화와 혁신을 요청하는 광장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가면 뒤로 숨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한 교실을 만들어 가는 데 너무 보수적이었거나 혹은 이기적이었을 수도 있고,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규제를 혁신하는 일에 무관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용의 시대에 맞지 않는 차별적 학칙들이 있지나 않은지 깊이 살피는 일을 소홀히 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크고 작은 성과를 위하는 가운데 혹 놓쳤을지도 모를 그러한 중요한 것들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한다.

 찬바람이 불고, 냉혹한 결과를 마주해야 할 때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는 미래를 대비해 올바르게 가고 있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방심, 방임, 방일하고, 어떻게 되겠지 하며, 넋 놓고 관성에 의지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현재를 점검하고 성찰하며 지혜의 통찰을 바탕으로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성성한 ‘알아차림’이 필수라는 점이다. 지금처럼 엄혹한 위기가 예견될수록 ‘알아차림’은 더욱더 필요한 동반자이다. 그 어느 때보다 미혹함이 없는 냉철한 ‘알아차림’이 우리 모두에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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