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회 천마문화상 - 가작(소설)] 금 간 구슬
[50회 천마문화상 - 가작(소설)] 금 간 구슬
  • 김판석(영남대 화학공학부2)
  • 승인 2019.11.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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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이 깔린 새벽 나방이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렸다. 녀석의 생김새는 징그럽기 짝이 없었는데, 흰 막대 몸에 찢어진 두 날개를 양쪽에 힘겹게 지고 있었다. 두 개의 길고 얇은 더듬이는 팔이 다리보다 길어 손이 바닥에 닿는 비정상적인 사람의 형체와 닮아있었다. 나방은 약 한 시간 전부터 대답 없는 투명한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마치 굶주린 개가 밥을 달라며 구걸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하찮은 나방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새벽 1시 빛이라고는 내가 있는 연구실과 도로에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어서, 창 밖에 풍경은 정말 섬뜩해 보였다. 만약 지금 파란 하늘이 뚜렷하게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시간을 거슬러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폭발하는 호기심에 질문들을 토하듯 쏟아내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리석은 대답이나 침묵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의 호기심을 배움의 부족함으로 여겼지만, 정작 자신들이 대답해야 할 때는 질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물어볼 수 있는 어떤 무엇도 없다는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시 한 번 현미경 접안렌즈에 눈을 대자, 조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사진을 찍어 기록에 남겼다. 갈색 노트에 사진에 찍힌 문자를 떨리는 손으로 옮겨 적었다.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길게 적혀있고 그 밑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1993030’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문자의 의미는 물론이고 숫자의 의미도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문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숫자가 왜 줄어들까? 나는 정말 순진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동료이자 친구인 멜버튼은 몇 시간 전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연구실에서 나갔으니, 현재 유일한 말동무를 잃은 샘이다. 분명 그도 이 결과를 보면 처음에는 흥분을 하며 이 자그마한 연구실을 뛰어다닐 것이나, 다섯 바퀴를 돌고 멈춰서 갑자기 심각한 고뇌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평소에는 유쾌하고 논리적인 그가 말을 잃고 나와 같이 가만히 의자에 않아 창문을 봐라봤을 것이고, 도로만이 어둡게 빛나는 세상에 흰 나방의 구걸을 애처롭게 쳐다보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인터넷을 켜 이 암호를 해독해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기원전 사천년 언어인 수메르어가 적힌 비석을 해독하는 데 성공한 금석학자 페더트 박사가 얼마 전 기하학적 패턴을 해석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견했다. 박사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언어를 자랑스럽게 적어 보이면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한 시간 후, 나방은 구걸을 포기한 듯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신 흰 구형차가 도로를 가르며 건물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차 전조등에 비친 까만 나무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듯 우뚝 서있었다. 박사는 마침 내가 전화를 했을 때 자신도 연구 중이었다고 말했다. 아침이 밝아서 가도 되느냐는 말에 나는 급한 일이니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거라고 답했다. 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알았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그 부탁이 매우 무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금도 미룰 수 없다고 판단을 했다. 숫자가 한 시간 전보다 40이 내려가 ‘1992990’이 되었기 때문이다.

 숫자의 하강은 나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 두려움은 여러 질문들을 일으키는 훌륭한 자원이 되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었다. 만약 이 숫자가 0이 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시한폭탄의 시간처럼 그 수명이 다하면 결국 터지는 것일까? 아니면 0을 뚫고 음수의 영역으로 진행할까? 음수는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수임으로 이 숫자는 그저 허무를 표현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이 파도처럼 몰려왔으나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만히 앉아 박사를 기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남색 재킷차림의 박사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 일어서 그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저는 현미경을 연구하는 이현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머리가 희끗해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풍채가 좋아 보이는 박사는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반갑네. 나는 언어를 연구하는 페더트라고 하네.” 우리는 서로 악수를 했다. 박사의 손은 매우 거칠었으며 눈 주위에 주름이 매우 깊어 큰 쌍꺼풀의 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매우 인상 깊었는데, 그가 깊은 해안을 가졌다는 원인모를 선입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있었으며 왼쪽 다리를 절어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준비했던 차를 탁자에 놓았다. 우리 둘은 탁자 양옆 의자에 마주앉았으며 박사는 불편한 듯 양 다리를 꼬았다. 홍차의 향이 둘 사이 공기에 퍼지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1분 간격으로 찍어놓은 사진 80여장을 탁자에 펼쳐놓고 말을 이었다.

 “일단 새벽에 박사님을 연구실까지 직접 오게 한 것은 무례한 일인 줄 압니다. 저는 이곳에서 현미경을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꼭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늦은 시간에도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원래 한국에서 연구하던 대학교의 교수였는데 올해 초 베를린 연구소에서 연락이 와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현미경의 배율이 비대하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전자는 그동안 관찰이 불가했던 것입니다. 물론 전자의 궤도를 이론이 아닌 실제로 볼 수 있었지만 실제 전자 입자 하나를 직접 관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희 연구소 연구원들이 전자를 가둘 수 있는 용기를 개발했고 이로써 전자의 직접적인 관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연구소가 저를 부른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박사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잠깐, 전자를 관찰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건가?”

 “네 박사님, 저희 연구소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전자 하나를 구속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전자는 항상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자전합니다. 마치 행성들이 자전하듯이 말이죠. 때문에 전자가 둥근 모양에 자전하는 정말 작은 구라는 사실 외에 어떤 특별한 사실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과학자들은 전자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성질을 고대했거든요. 그런데 마침내 전자의 자전을 통제할 기술을 계발했습니다. 용기 겉면의 전자들을 스핀방향의 반대방향으로 흐르게 하여 전자간의 반발로 중앙 전자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 앞에 보시는 녹색 기계가 전자를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입니다.”

 박사는 고개를 돌려 기계를 바라보았고 그 기계의 크기는 박사의 몸보다 조금 더 컸다. “녹색에, 크기도 큰 것이 마치 숲속에 사는 괴수같구만.”

 나는 앞에 사진들을 두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진들이 저 현미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보시다 시피 멀리서 관찰했을 때는 구 모양의 입자에 불과하나 배율을 높이면 이런 모습이 찍힙니다.”

 사진은 홈이 파여 있는 거대한 흰 벽면을 보는 듯 했다. 단 두 줄의 홈만 파여져 있었는데, 고배율의 사진에서 위에는 문자가 아래에는 숫자가 나란히 파여 있었다. 박사는 흥미로운 듯 사진을 손에 들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의 문자가 자신이 연구하는 기하학적 패턴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 그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숫자가 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낮은 숫자로 점차 작아진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박사는 자신의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정말 흥미롭네! 내 평생 이렇게 재미있는 현상을 처음 봤다네. 내가 방금까지 연구하던 기하학적 언어와 많이 닮아 있다는 것도 놀랍군.”

 나는 목이 타 차를 한잔 마시고 말했다. “박사님께서 이 언어를 해독해주셔야 합니다. 이 연구는 저같은 과학자가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다만 연구가 끝날 때 까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밀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이 문자들과 숫자는 신이 적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거든요. 분명 위대한 발견이지만 그 만큼 위험한 발견이 될 겁니다.”

 박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낯이 굳어지며 말했다. “신이라····, 나도 이십년 전만해도 믿었다네! 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일세. 하지만 내 딸아이가 무차별 테러로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네. 나는 그 뒤로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네.”

 나는 그런 반응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 당황했다. 순간 말실수를 했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남자의 무거운 사정에 대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아닐세, 이건 내 개인적인 사정이니 사과 말게. 이 숫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자네는 왜 숫자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구소에서 보내온 샘플들 육십 여개를 전부 관찰해봤는데 모두 똑같은 문자와 숫자가 써져있었고 숫자가 줄어드는 현상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전자라는 것은 우리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분명 해왕성에 전자도 같은 숫자가 써져있을 겁니다.”

 “이게 하나의 시간이라는 상상도 해보았나?”

 “물론입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미션임파서블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박사는 잠시 생각을 하다 말을 이었다. “사진에서 보니, 문자는 변하지 않는군. 문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내면 숫자의 의미도 알아낼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사진을 계속 찍어주게 혹시나 다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으니.”

 “네 그럴 생각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연구는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네. 자네가 준 연구거리가 날 흥분하게 만드는구먼, 내가 오히려 고마워해야할 일이지.”

 흰 차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나무들은 다시 빛에 비춰질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줄을 맞추어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2

 

 째깍째깍. 숫자는 마침내 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현수 자신뿐이었다. 100을 남기고 남자는 기도를 했다. 제발 이 숫자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를. 하지만 불안은 남자를 옥죄어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그는 거리 한 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거리에 사람들은 평온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연인들은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으며 식당에서는 탐스러운 음식들이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음식을 받아든 손님들은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작은 조각으로 썰어 입에 넣었다. 그는 자신이 과학자이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소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불꽃이 남자의 가슴 속에 일었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러분! 곧 있으면 세상이 멸망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구름낀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라는 말인가? 음식을 먹던 손님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위해 음식을 게걸스럽게 더 열심히 먹어야 하는가? 아니면 식욕이란 삶의 무거움보다 부질없는 것이어서 당장 음식을 내팽개치고 기도하는 연인들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가?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실, 아니 추측을-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추측만을-거리 한가운데에서 외롭고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으며 연인들은 그를 피해 좀 더 조용한 장소로, 공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평온을 방해한다는 소름끼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침묵했다.

 꿈에서 깬 나는 연구실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내가 잠든 줄도 모르고 밤새 연구에 매진했던 것이다. 숫자의 변화가 규칙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그동안 모은 숫자들을 이리저리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규칙성도 없었는데, 숫자는 시간에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않게 감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 계산 알고리즘을 사용해봤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그 어떤 수열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에러가 난 것이다. 국제수학협회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므로 수학자들이 그동안 발견한 수열은 모두 그 프로그램 안에 저장되어있었다. 아니면 이런 것들이 하나의 암호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새벽에 만난 페더트 박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꿈은 결과를 처음 마주했을 때 상상했던 원초적인 불안을 그대로 반영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숫자의 수렴과 함께 사라진다면, 정말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 사실을 밝힌다면 나는 세상을 발전시킨 이전 과학자들과는 달리, 세상을 절망에 빠뜨린 첫 번째 과학자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기록도 곧 사라지겠지만.

 나는 휴식의 필요성을 느껴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3층 복도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연구실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맬버튼을 만났다. 그는 어제 연구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왔다. “어이! 친구 어땠어? 전자는 그냥 축구공이던가?”

 그는 자신감 넘치는 말과 함께 장난스럽게 공을 차듯 오른발을 앞으로 차보였다. 나는 피곤한 눈으로 대답했다. “사진은 계속 컴퓨터가 찍고 있는 중이니 키보드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아도 될 거야. 다만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당장 ESC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을 걸?”

 멜버튼은 그 말을 듣고 정말 축구선수처럼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라갔다.

 차를 타고 삼십분 거리에 나의 자취방이 있었다. 정말 급하게 독일로 왔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묵을 곳이 필요했고 베를린 외곽의 지역이었으나, 값이 쌌고 무엇보다 연구실에서 가까운 것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가공된 음식을 사기위해서는 시내로 차를 타고 가야했지만 외곽지만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매우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았고, 동네이웃들은 한국에서 온 나를 신기해하며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우호적으로 대해줬다. 바로 윗집에는 제니와 벤 부부가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두 딸은 눈망울이 참으로 예뻤다. 때로는 오늘처럼 아이들의 장난에 위 천장이 쿵쿵거릴 때가 있었지만, 집 앞 정원에서 놀고 있는 그 가족을 볼 때마다 항상 한국에 있는 경민이 생각이 났다.

 경민과 나는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우리들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서둘러 날짜를 잡느라 고생했지만 모두 헛고생이 되었다. 베를린 연구소에서 전화를 받은 그날 나는 제안을 거절하려 했으나 경민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였다. 나의 선택과 꿈을 늘 믿어주었으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인천공항에서 작별의 포옹을 한 후, 손을 흔들며 그녀의 모습은 떠나갔다.

 오후 3,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오전 8시에 나는 경민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이 일은 내가 베를린으로 떠나기 위해 그녀에게 지켜야할 유일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자, 두려움을 느낀 나는 경민의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어머님은 경민이 아침부터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심각한 것은 아니나 열이 높아 당분간 자신이 돌봐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고 경민이 깊은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안도와 함께 나도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은 이미 어둠으로 덮여있었다. 나는 차를 끌고 연구소로 향했다. 언덕아래에서 어두운 회색 건물을 올려다봤다. 역시 단하나의 불만이 켜져 있었다. 분명 멜버튼도 나와 같이 충격에 빠졌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계단을 올라 연구실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의자에 앉아 파란 두 눈을 책상에 집중하며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말했다. “헛수고 하지 마, 친구. 내가 이미 다 계산해 봤다니까.”

 멜버튼은 팬을 내려놓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놀라운 발견이야! 어쩌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겠어. 그런데 아무런 해석도 되지 않은 문자를 마음대로 발표해도 될까?”

 “이미 언어학자에게 비밀리에 맡겨놨어, 결과를 기다리기만 해야지.”

 그는 손가락을 세어보더니 말했다. “이런 5일 밖에 남지 않았어, 다음 주 월요일이면 학회에 논문을 보내야 한다고! 그 언어학자가 5일 안에 해석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마치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이 연구실 안에 있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숙여 속삭이며 말했다. “멜버튼, 잘 들어. 만약 이 문자가 폭탄이 터질 시간을 알린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대로 발표할 건가? 아니면 비밀을 폭탄이 터질 때 까지 침묵할 건가?”

 그 역시 몸을 숙이고 주위를 살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상 최대의 불꽃놀이가 될 거야. 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지. 왜냐면 놀이의 관객은 오히려 불꽃의 하이라이트가 되거든!” 그는 입가가 점점 올라가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어. 숫자가 이렇게 조금씩 내려가는 걸보면 분명 독일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의 수가 아닐까 싶어!”

 나는 그의 익살스러움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나는 이전까지 숫자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같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하지 마! 우리는 과학자로서 할 일을 다 했어.”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페더트 박사의 목소리였다. 그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역시 아직 연구실인가? 잘됐네. 지금당장 내 집으로 와주게.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 테니.…… 아 동료가 한명 더 있었나? 그래, 같이 오게.같이 조용히 오게나.”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앞에 앉아있던 멜버튼은 어느새 옆으로 와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런 언어학자 실력이 대단하군! 축제가 빨리 시작되겠어.”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3

 

 차의 전조등은 마침내 마을 간판을 비췄다. 초록색 철판에 노란색 페인트로 알츠 마을이라 적혀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집과 가게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모두 빨간색 벽돌로 통일되어 있었다. 밤이 늦어 사람들은 이제 막 가게를 정리하는 듯 보였다. 박사의 집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가다보니 콘크리트가 아닌 흙길이 나왔고 곧이어 나무들이 양옆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무 길을 통과하자 집 세 채가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조수석에서 내린 멜버튼은 집주소를 찾아 나섰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돌아왔는데 세 집중 어느 집도 박사의 집이 아니었다. 그때 한집에서 머리에 두건을 두른 여인이 나왔다. 멜버튼은 서둘러 그녀에게 주소를 물었다.

 “페더트 박사님 덱은 이 길 따라서 더 들어 가야해요.”

 그는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분명 그 노인네는 히스테리적인 성격일거야. 어떻게 이렇게 고립되어 살 수 있지?”

 “너도 분명 박사를 만나면 좋아할 거야.”

 차는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갔고 그곳에는 어둠만이 그들을 반길 뿐이었다. 여인이 길을 잘못 알려준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때 쯤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덜그럭 거리는 바퀴소리와 함께 2층짜리 커다란 목조주택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집에는 창문이 매우 많았는데, 일층에 단 하나의 창만이 빛나고 있어서 매우 쓸쓸한 느낌을 줬다. 넓은 마당에는 박사의 차로 보이는 구형 흰색 차가 보였다. 나는 세워진 차 바로 옆에 주차했다. 나와 멜버튼은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현관에 불이 켜지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보라색으로 윤기 나는 가운을 걸친 박사가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네, 어서 들어오게나.”

 박사는 우리와 함께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방안은 책장으로 둘러 쌓여있었고 한 가운데 기다랗고 짙은 원목 탁자와 그 주위에는 고급 가죽 의자들이 둘러있었다. 박사의 책상은 문을 바라보는 책장 앞에 있었으며, 책상 바닥이 탁자보다 높아 꽤나 권위적으로 보였다. 방안은 천장의 큰 사각형 전등덕분에 환했으나, 책상에 알루미늄 전기등은 더 밝게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형광펜을 여러 번 덧대어 칠한 문장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둘은 탁자 옆에 나란히 앉았고 박사는 서서 강조된 자신의 책상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왼발을 절면서 몇 장의 종이를 가져오더니 탁자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자 이것들을 보게나. 나는 예전부터 이런 언어를 연구하고 있었다네. 참으로 이상하지 않나? 자네들이 찍은 사진의 언어와 많이 닮아있지.”

 나와 멜버튼은 가져온 서류 봉투에서 사진들을 꺼내 그가 펼친 종이들 옆에 놓았다. 사진에 찍힌 문자는 총 18자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그가 적어놓은 문자들이랑 겹치는 것들이 많아 보였다. 나와 멜버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번갈아가며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지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문자 18개를 모두 해석이 가능했네.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지. 하지만 그 해석을 말하기 전에 해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부터 말하는 게 중요할 거 같네. 거기에 보이는 흑인 아이 있지 않나? 그 아이의 이름은 켄드릭이라네. 켄드릭은 평범한 아프리카 소년일 뿐이야. 하지만 1년 전, 갑작스러운 실신으로 쓰러진 후 말을 못하게 되었네. 때문에 손으로 소통을 해야만 했지. 그런데 이 아이가 쓰는 문장들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문자더군, 분명 자신의 체계에 따라 쓰는 것 같으면서도 알아먹을 수 없었지.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의 뇌가 크게 손상되어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네. 아이의 언어는 뇌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면서 수면위로 떠올랐지만, 언어학자들에게는 가치가 없는 일이었지. 그러다 캐나다에서 어린 소녀가 켄드릭과 같은 현상을 겪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네. 그 소녀의 이름은 라미라네. 라미가 쓴 글과 켄드릭이 쓴 글은 문법, 어순, 단어 모두 같았네.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갑작스러운 언어체계를 정립하는 일이 하나의 과제로 주어진 거라네. 나 또한 연구에 참여했지. 두 아이를 유럽에 연구기관에서 보호하게 했다네, 바로 오늘 나는 그들을 만나고 왔지.”

 박사는 말을 하며 절뚝거리며 환하게 비쳐진 책상 뒤에 앉았다. 머그컵에 담긴 물을 한번 마시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문자의 의미는 파악했지만, 정확한 검증이 필요했네. 언어를 알아낸다고 전부는 아니거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 습성들이 같은 단어라도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 때문에 난 아이들을 찾아가 해석이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은지 물어봤다네. 켄드릭은 문자를 보고 정말 쾌활하게 웃더군, 녀석이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은 처음 봤어. 아주 놀라웠지. 그리고는 종이에 글씨를 쓰더군, 그들의 언어로 말일세. 연구하면서 처음 보는 단어였지. 하지만 곧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었네. 그들의 언어는 표음문자이기 때문이지. 그는 이렇게 썼다네. ‘진리라고 말일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들이 이 넓은 방안에 가득 퍼져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당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옆에 앉아있는 멜버튼은 어느새 입고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대담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방안에 퍼진 박사의 말과 함께 나의 불쾌함을 가중시켰다.

 “선생님, 정말 재미있군요. 선생님을 만나면 좋아할 거라는 이 친구의 말이 맞았어요. 전 정말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 그래서 문자는 무엇을 뜻하는 거죠?”

 “잠시 심호흡을 하는 게 좋을 걸세, 나도 처음 해석했을 때는 꽤나 고생을 했다네.”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잠깐만요, 박사님 그 말은 즉, 두 아이가 신의 아들과 딸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러고 말고. 이미 문자를 발견한 시점부터 이상하지 않나? 그런 괴상망측한 언어가 적혀있다는 것이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 과연 신이라니까.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구말구.”

 “그래서 뜻이 뭡니까? 선생님.”

 멜버튼은 큰소리로 박사에게 물었다.

 “거기 아이 사진 뒷면을 보게나.”

 나는 검은 피부의 해맑은 아이가 흰 치아와 함께 웃어 보이는 작은 사진을 뒤집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살인만이 너희들을 빛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자네 마지막으로 본 숫자가 무엇인가?”

 박사는 나에게 질문을 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대답하기 싫었다. 그 숫자가 뜻하는 바가 어느 정도 유추되었기 때문인데, 나는 아까전보다 더 멍한 상태가 되었다. 갑자기 속에서는 역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며, 오로지 변한 것이라고는 나의 속과 멜버튼의 얼굴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게 굳어 있었으며 올라가던 입 고리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속이 매스꺼움을 느꼈다.

 “말해보게 마지막으로 본 숫자가 무엇인가?”

 “1992001입니다.” 멜버튼이 말했다.

 “.. 많이도 줄었구만, 나도 자네들과 같이 숫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네. 다만 내가 단서 하나를 더 알고 있었을 뿐이지. 어떻게 생각하나?”

 박사는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 자리에 앉았다. 말은 저번에 만났을 때와 같이 꽤나 유쾌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고목같이 깊은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희생양을 찾은 독수리가 태양 주위를 돌며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그의 함정에 걸려든 것 같은, 이 깊은 산속 거대한 저택이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알츠 마을의 사람들과도 분리된, 아니 어쩌면 온 지구의 대륙들과 분리된 섬같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우리들의 생각은 세상 사람들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무거운 공기를 떨쳐버리고 싶었다. 주어 담을 수 없는 말들을 빨리 정리 정돈하여 내 판단의 범주 안에 집어넣고 싶었다. 아니 더욱 솔직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숫자가 살인자의 수라도 된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멜버튼은 비아냥대며 비웃음이 동반된 말로 말했다. 그러자 박사는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탁월한 과학자구만! 어떻게 알았나! 자네는 방금 인류 최고의 숫자를 해석해 낸 것일세! 천진한 신의 종이자 천사중의 천사인 라미가 알려주더군. 이 숫자는 살인자들의 수라는 구만! 아이고! 허허허허! 정말 기가막히지 않는가? 살인자의 숫자라니!”

 박사의 웃음은 무거운 분위기와 대조되어 더욱 기괴해보였다. 우리의 침묵 사이에 박사의 커다란 웃음이 비집고 들어와 생각의 정돈을 깨트려놓았다. 속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선생님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장난이 너무 심하십니다. 신의 아이들은 또 무슨 어이없는 설정입니까? 이 친구를 보세요! 벌써 겁에 질렸다고요.”

 “나는 그런 어이없는 장난 같은 거 칠 생각이 없네. 난 누구보다 진지하지. 암 진지하고말고.”

 박사의 말이 끝나자 나는 참을 수 없는 냄새에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을 찾았지만 널따란 거실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에서 나는 구토를 했다.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었는데 입에서는 내용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앞이 순간 흐려졌고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 동안의 불결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 했다. 여전히 속이 아팠지만 밖의 찬 공기 덕에 겨우 숨을 틀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흐릿한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이 저택의 주변에는 온통 나무들만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섬뜩했다. 우직하게 둘러싼 검은 나무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마침내 빛을 맞이한 친구, 과연 어떻게 행동할거지? 돌아 갈 건가? 아니면 차를 타고 도망을 갈 건가?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다시 빛이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페더트 박사의 오른손에 은색 권총이 들려있었다. 권총이 똑바로 향하는 곳에는 멜버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뻗은 채 구부린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을 안했구먼. 우리 딸은 오래전 테러로, 아내는 몇 년 전 차사고로 죽었다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네에게 한가한 장난을 치겠나! 오히려 장난은 자네들이 나에게 걸어온 것 아닌가? 내 가족을 사고로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야!”

 박사의 말은 패쇠된 방에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천천히 멜버튼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멜버튼은 최대한 침작한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아내분과 따님이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일단 총을 내려놓고 말씀하시죠.”

 박사의 권총을 든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다 결국 깊은 두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내가 만약 자네에게 총을 쏘면 ···· 나는 천국에 가는 것인가! 그러면 ····· 내 딸을 쏴 죽인 놈과 내 아내를 차로 친 그 놈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상황이 더욱 악화됨을 느낀 나는 멜버튼과 같은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박사님 진정하세요. 이제 박사님 말씀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총만 내려놓으세요.”

 총구가 떨리다가 점점 내려가 결국 갈색 나무 바닥을 향했다. 박사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자네들에게는 잘못이 없어. 너무 화가 났다네. 내 소중한 가족을 빼앗아간 놈들이 천국에 가다니.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박사의 목소리는 좀 전과 달리 매우 온순해졌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총을 넣고 곧바로 닫았다. “혼자 숲속에 사는 노인네한테 총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쓰는구먼.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방안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멜버튼은 의자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뱉고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손으로 관자놀이를 습관적으로 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자신들의 머리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정말 누구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오직 두 개의 빛만이 환하게 우리를 밝힐 뿐, 우리의 일그러지고 지친 얼굴은 단지 형광등에 의해 비추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가상의 빛, 만들어진 진리, 거짓된 선이었다. 그 빛을 부러워하는 저 밖의 검은 생명체들. 얼마나 처량한가. 하지만 우리를 부러워 하지마라. 어둠 속에서 아무리 밝게 빛을 비춘들 어둠은 어둠일 뿐이다. 우리 인간들도 진실의 빛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생명체일 뿐이다.

 이 외로운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멜버튼이었다.

 “우리의 해석이 정말 사실이라면, 도대체 왜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걸까요?”

 박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물론 검증이 필요하겠네. 실제 통계와 비교도 해보아야해. 하지만 정말 라미의 말이 맞는다면, 일종의 티켓이라는 것이겠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이 한정된, 말도 안 되는 상황 말일세.”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티켓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겠군요.”

 다시 침묵의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바로 전과 다르게 매우 짧았다. 나의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던 것이다. 그 전화는 경민의 어머님께 걸려온 전화였다.

 “어떡하니! 경민이가 열이 너무 높아! 의사가 말하는데, 아이가 유산될 수 있다고···”

 나는 박사와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급히 뛰어나갔다. 제발, 제발 내가 갈 때 까지만, 속으로 기도했다. 차는 커다란 암흑의 빙산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4

 

 남자는 동그랗지도 네모나지도 않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 빛들은 점차 작아지고 곧이어 없어졌다. 그러자 완벽한 밤이 찾아왔다. 어둠속에서 흰 빛의 가장자리들이 보였다. 구름이었다. 남자는 그 구름들이 부럽다고 느꼈다. 중력을 유유히 벗어난 구름들은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나도 구름처럼, 지금처럼 영원히 무중력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대한 흰 가장자리들의 바다에서 갑자기 조그만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물고기인가? 생각했을 때, 어느새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 너는 그 나방이구나. 남자가 말했다. 나방은 이번에도 투명한 벽에 몸을 부딪쳤다. 몇 번의 부딪침 끝에 나방은 포기한 듯 구름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창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후에는 너무나 커져서 창문의 끝이 남자의 시선이 닿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창문 밖은 무한한 구름의 지평선이 이어졌다. 문득 아래를 쳐다 본 남자는 자신이 무중력의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도 어느새 없어진, 그가 속한 공간은 그야말로 무의 공간이었다. 그때 창 밖에서는 지평선 위로 둥그런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빛은 사방으로 산란되어 어느새 흰 구름들의 형체를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남자의 세계, 등 뒤에 세계는 어두운 그림자뿐이었으며 이 사실이 남자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남자는 거대한 창을 힘차게 두드렸다. 하지만 투명한 창은 그저 요란하게 진동할 뿐, 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손은 끝없는 두드림으로 어느새 상처가 깊게 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새빨간 피들은 자신들의 장력에 의해 둥그렇게 말려 남자의 뒤로 흩어졌다.

 나는 눈을 떴다. 비행기는 벌써 인천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멍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경민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병실을 찾았다. 문에 들어서자 나를 본 경민은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핼쑥하지만 사랑스런 얼굴이 창가의 조그마한 침대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경민은 낮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울어. 나 멀쩡해.”

 그 말을 듣고 더 울컥해져서 그녀를 껴안았다. 온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마음껏 흐느꼈다. 그녀의 작고 가느다란 손이 나의 등을 차근히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정말 다 잘 될 거야.”

 좁다란 창문을 통해 노란 개나리 같은 햇빛이 나의 등과 그녀의 손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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