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가작-뻐꾸기 알을 품은 여자
제38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가작-뻐꾸기 알을 품은 여자
  • 편집국
  • 승인 2007.06.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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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가작
전아리

당신의 등에는 다섯 개의 점이 있다. 등뼈를 축으로 왼쪽에 두 개, 오른 쪽에 세 개. 언뜻 보면 대열을 맞추어 돋은 듯 보인다. 늘어진 등살 곳곳에는 손톱만한 저승꽃이 번졌다. 팔베개를 하고 엎드린 당신은 이따금씩 때밀이 판 위에 눌린 젖가슴을 긁어댄다. 당신의 주름진 목에 엉긴 잿빛 머리칼들을 거두어내고 요령껏 목의 때를 벗겨낸다. 더운 습기가 가득한 목욕탕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입안이 건조해진다. 찬 물을 한바가지 끼얹는다. 냉기가 당신에게까지 튀었는지 두툼한 등이 움칠거린다. 손바닥으로 등을 치자

[집안에 부유하던 쑥 냄새는 묵직한 기류가 되어 어린 내 몸에까지 배여 들었다.]

당신은 광어처럼 천천히 몸을 뒤집는다. 비대한 상체에 비해 당신의 다리는 보잘 것 없다. 뼈가 만져지는 허벅지를 거쳐 금세 종아리로 넘어간다. 물에 불어 허연 발뒤꿈치까지 박박 긁어낸 후 몸 전체에 물을 몇 번 끼얹는다. 당신은 느릿하게 일어나 판대 위에서 내려온다.
탈의실로 나온 나는 음료 냉장고 구석에서 반찬통을 꺼낸다. 평상 위에 앉아 양푼에 반찬을 덜어 밥을 비비기 시작한다. 발치에는 중년의 여인이 벌거벗고 다리를 벌린 채 곯아떨어져 있다. 곧 이 동네 노쇠한 이브들이 한창 모여들 시간이다. 수저를 놀리는 손이 빨라진다. 가슴께의 살갗이 따가워 검은 브래지어를 들추어 보니 끈이 눌린 자국대로 살갗이 불그죽죽하게 부르터있다. 튼 자국 위로 대충 바셀린을 바른다. 당신이 목욕도구들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 물이 떨어지는 채로 걸어가 사물함에 열쇠를 꽂는다. 잠시 후 목욕탕을 나서는 당신에게 오천 원을 내민다.
탈의실 구석의 화장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운다. 담배연기는 금세 비좁은 화장실 안에 고여 든다. 연기 너머로 비추는 거울 속 모습이 몽롱하다. 종일 물을 적시고 지내는 탓에 물들인지 얼마 안 된 고동빛 염색기가 거의 빠지고 없다. 화장실로 들어오는 손님에게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준다. 젊은 여자는 몽고반점이 덜 사라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칸막이 안으로 사라진다. 이곳은 늪지대와 우거진 정글이 사라진 현대판 아마존이다.

방바닥에는 그들이 팔아주기를 강요하는 조악한 상품들의 선전 팸플릿이 흩어져 있었다. 방 한 가운데 카세트테이프와 책자가 담긴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물그릇을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팸플릿을 모아 쓰레기통에 구겨 넣는다. 상자를 내다 버리려고 드는 순간 앙칼진 손이 발목을 낚아챈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미끄러진 동시에 문지방에 머리를 찧는다. 당신은 허겁지겁 방바닥에 떨어진 테이프들을 주워 담는다. 관자놀이에서 콧등을 타고 시큰한 통증이 흘러내린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상자를 도로 빼앗는다. 당신은 눈을 부릅뜬 채 안간힘을 쓰며 상자를 부둥켜안는다. 당신의 눈 속에서는 그들이 단단히 심어둔 듯한 광기가 질긴 뿌리를 뻗어가고 있다. 작은 책자가 당신의 무릎 밑에서 펼쳐진다. <교주님께 다가가는 것은 새 생명을 얻고 영생으로 가는 길... 당신의 삶을 구제해주실 단 하나의 빛...>. 나는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내팽개친다. 당신은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방구석에 나동그라진다. 팔뚝에 남은 이빨자국은 붉은 기운이 가라앉고 나자 푸르스름하게 질려 멍으로 변했다.
당신이 오빠네를 나온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당신은 문 앞에 보자기로 단단히 싸맨 짐들을 쌓아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울먹이는 올케의 전화를 내던지듯 끊어버렸다. 당신과 오빠사이 정적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자금난을 겪는 오빠가 그리 빌려주기를 바라던 세탁소를 정리한 돈은 그들에 의해 썰물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당신이 세탁소를 하는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소주를 끊었다는 것이다.

“하이구, 젖이 참 이쁘우.”
한증막에 들어서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앉아있던 노파가 말을 걸어온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두고 다리를 뻗는다. 호흡에 밀려들어온 후끈한 김이 속을 데운다. 살갗이 금세 데인 듯 벌겋게 달아오른다. 노파들은 늘어진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젊은 시절 몸매 이야기를 꺼낸다. 노파들에게서 멀찍이 물러난 자리에는 머리에 비닐 랩을 감은 젊은 여자가 다리 마사지를 하고 있다. 카운터에서 파는 트리트먼트제를 발랐는지 익숙한 풀냄새가 물씬 풍긴다.
당신은 세탁소에서 돌아오면 늘 허리와 어깨에 새끼손톱만한 쑥뜸을 놓곤 했었다. 집안에 부유하던 쑥 냄새는 묵직한 기류가 되어 어린 내 몸에까지 배여 들었다. 동네 아이들은 내게서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했다. 살림살이들을 내던지던 아버지가 쑥뜸이 담긴 당신의 바구니를 내다 버렸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그러나 며칠 후 당신은 나를 시켜 하천가에 돋은 쑥을 뜯어오게 했다. 쑥 이파리들은 세탁소 뒷마당의 신문지 위에서 바짝 말려졌다.
남의 몸에 불은 때는 순식간에 말끔히 벗기면서도, 막상 내 몸에 때밀이수건을 갖다 대면 아랫배를 채 지나기도 전에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미는 둥 마는 둥 몸을 헹구고 나온다. 남자는 목욕탕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은 치킨 두 조각이 접시 위에 덩그러니 남았을 무렵, 남자의 눈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 사람 속에 고인 습기도 이렇듯 쉽게 걷어낼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까 ]

그를 부축하여 호프 옆 골목의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선다. 전구가 다된 모양인지 간판의 ‘여’자가 죽어가는 하루살이의 날개처럼 희미하게 떨린다.
당신과 나는 한 달에 서너 번 씩 번갈아 외박을 한다. 당신이 흰 원피스에 조화 브로치가 달린 모자까지 쓰고 외출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다.
나는 슬그머니 옷가지를 주워 입고 방을 나선다. 일찍 깨어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남자와 나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오토바이를 탄 신문배달부가 골목 앞을 지나고 있었다.

“정연아...”
아침밥상 앞에서 당신이 살가운 투로 나를 부른다. 당신은 밥상에 바짝 다가앉으며 내 밥 위에 계란말이를 얹어놓는다.
“일하기 힘들지? ”
당신은 수저를 내려놓고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낸다.
“정연아, 더도 말고 이번엔 딱 이백만 헌금하면... 그럼 너 앞으로 하는 일들도 더 잘 풀리고, 요즘 꿈자리가 안 좋은 게 아무래도 정성이 부족한 거 같아......”
빈 밥그릇과 수저를 싱크대에 넣는다. 덜 마른 머리칼을 수건으로 비벼대고 있는데 소리 없이 다가온 당신이 내 팔을 끌어다가 손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크기의 조개껍데기가 어색하게 포개져있는 모양으로 내 손을 덮고 있는 당신의 왼쪽 손등을 내려다본다. 당신의 손등이 시선에 걸릴 때면, 냄비 바닥에 잔뜩 졸아붙은 찌개의 지독하게 짠 맛이 혀끝을 스쳐가곤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옷을 놔두고 당신이 드라이 해 놓은 손님들의 양복을 골라 입고 외출을 했다. 그가 제때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당신은 배상을 해주거나, 욕을 먹는 일이 잦았다. 나는 그가 머리칼에 바르고 다니던 크림 냄새가 좋아서 이따금씩 얼굴과 손에 윤기 나는 크림을 몰래 찍어 바르곤 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실컷 얻어맞은 듯 입술이 생선 내장처럼 부르트고 얼굴이 군데군데 핏자국으로 얼룩져 부은 채로 세탁소에 나타났다. 그는 양말을 벗어 던지며 목에 쌓인 가래를 뱉듯 욕지기들을 쏟아냈다. 아침에 입고 나갔던 소라색 양복은 형편없이 찢어져 있었다. 당신은 손볼 수도 없을 만큼 찢겨진 양복자락을 보며 입술을 질근거렸다.
“냄새나.”
당신이 중얼거렸다. 좁은 가게 안에 맴도는 핏기가신 적막 위로 당신은 덧칠하듯 목소리를 높여 반복했다.
“당신한테선 역겨운 냄새가 나.”
세워져 있던 다리미가 당신의 손등 위로 내려쳐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작업대 위의 재봉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박살이 났다. 또 다른 손님 양복을 낚아채듯 들고 나간 아버지는 그로부터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먹다 남은 찌개를 데워 오빠와 둘이 밥을 먹었다. 졸아붙은 찌개 속의 콩나물들이 진득하게 서로 엉겨있었다.

목욕탕 주인여자는 대걸레로 바닥을 닦다말고 막대를 파트너 삼아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주름살 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탱고인지 왈츠인지 모를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늙은 미망인인 그녀는 얼마 전 손님에게 소개받아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얼굴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요즘은 내게 괜히 시비를 걸거나, 탈의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긁어모으며 치매노인처럼 혼잣말을 뱉어내지도 않는다.
손님이라고는 과일가게 여자뿐이었다. 여자는 더운 물에 몸도 불리지 않은 채로 얼른 밀어달라고 고집을 부려놓고는, 살갗이 붉어지자 따갑다고 한참 죽는 소리를 내며 엄살을 떨어댔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듯하다. 잠자리에 누워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온몸에 비늘이 돋는 기분이 든다. 장마철만 되면 피로한 몸을 밤새 지분지분 밟아대는 불면증 때문에 고생을 하곤 한다.
하는 일 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도 은근한 고역이다. 음료수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을 손으로 걷어낸다. 사람 속에 고인 습기도 이렇듯 쉽게 걷어낼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까. 탕 안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 너머 올케의 뒤 쪽으로 어린 조카의 울음소리가 부서지듯 울린다. 올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놓았다. 당신은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태연히 오빠를 찾아갔다고 한다. 아이를 안아 어르며 돈 이야기를 꺼냈을 당신의 눈빛이 떠오른다.
열한 시가 가까워진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뻐근하게 당기는 팔목에 파스를 붙인다. 당신은 이번 여름이 지나면 그들이 운영하는 기도원으로 들어갈 것이라 했다. 방을 배정받기 위해서 헌금은 필수적 의무라고도 덧붙였다. 가늘어진 빗줄기가 창문 안으로 들이친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든다. 재생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동굴 벽에 부딪쳐 웅웅대는 외침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합창소리가 흘러나온다. 교주인 듯한 중년사내의 탁한 목소리가 음악소리를 뚫고 솟아오르자,

[ 그날 밤새 돌리던 당신의 재봉틀 소리는 외진 산동네를 돌아가는 빈 기찻길 같았다.]

곳곳에서 흐느낌이 터진다. 더러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좋지 않은 음질 속에 엉킨 소음들이 유령처럼 귓가를 떠다닌다. 순간 소름이 오싹 끼친 나는 재빨리 카세트를 정지시킨다.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비스듬히 이불더미에 기댄 채로 수화기를 만지작거린다.
남자는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과일이며 채소 등을 판다. 주말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조수석에 앉히고 장사를 나간다. 그는 술에 취하면 대한민국 안에 자신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술기운이 빠지고 나면 그의 두 어깨는 물에 젖었다 마른 가죽처럼 오그라들곤 한다. 이따금씩 나는 무르팍에 상처와 멍이 많은 계집아이를 내 위에 앉히고 집으로 돌아가는 트럭 조수석에서, 남자와 함께 저녁으로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새벽녘에 들어온 당신은 왼쪽 뺨을 부여잡고 뒤척이며 앓는다. 약통에 마지막 남은 진통제 두 알을 털어 넣고는 속이 쓰린지 다시 위보호제를 찾는다. 예전부터 당신은 몸살을 심하게 앓거나 깨진 접시를 밟아 살 속이 곪아가도 병원에 가는 법이 없었다. 아침 밥상 귀퉁이에 병원비를 두고 집을 나선다.

벌거벗은 두 여자는 억척스럽게 서로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한 여자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자 상대편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 위로 올라탄다. 여자는 두터운 손을 쳐들어 상대의 뺨을 내려치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떼어놓으려 힘을 써도 제법 덩치가 있는 두 여자는 아예 엉겨붙어버린 살덩이처럼 가슴과 배를 출렁이며 서로를 짓눌러댄다. 십오 분 남짓 난리를 피우다가 종내에는 한 여자가 탈의실 바닥에 침을 뱉고 나가버렸다. 남은 여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음료를 들이키더니 아직 열기가 묻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두 손에 때밀이수건을 끼고 느릿느릿 일어선다.
“넘의 집 귀한 자식을 가지고 지랄이야, 지랄은.”
여자는 때밀이 판 위에 누우며 탈의실 문을 향해 눈을 흘긴다. 여자의 배에는 깊숙이 패어 들어간 두 개의 수술자국이 있다. 때를 미는 내내 여자는 별 잘난 구석 없이 미적지근해 보이는 자식자랑을 되풀이하여 늘어놓는다.
여름날의 세탁소는 야생동물의 내장 속처럼 뜨거웠다. 아버지가 보름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낯선 여자가 가게로 찾아왔다. 긴 머리를 풍성하게 말아 올린 젊은 여자는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이 찹쌀로 쑨 풀처럼 희었다. 눈치를 보던 나는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얼마 후, 세탁소로 들어가자 당신은 여자와 서로 머리칼을 쥔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작업대 밑에 넣어둔 소주병이 발에 채여 쓰러졌다. 여자는 아버지가 빌려간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게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날 새벽 두 시 무렵 까지 세탁소 입구를 지키고 앉아있던 여자는 결국 진저리가 난다는 듯 욕지기를 뱉어내며 사라졌다.
그날 밤새 돌리던 당신의 재봉틀 소리는 외진 산동네를 돌아가는 빈 기찻길 같았다.
전문대학에 들어간 오빠는 졸업하자마자 지방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갔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더 이상 예전처럼 세탁소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당신은 보자기 위에 옷가지들을 얹는다. 그들이 만들었다는 허접한 프린트 티셔츠와 손수건, 양말 등을 마지막으로 보자기를 단단히 여민다. 당신의 왼쪽 볼은 자갈돌을 몇 개 집어넣은 듯 잔뜩 부어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가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짐 싸는 손을 더욱 거칠게 놀린다. 당신은 기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신도들과 합숙 생활을 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행여 키워준 빚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 전화하라며 중국집 스티커 뒷면에 적어놓은 번호를 던져놓고는 보퉁이를 챙겨든다. 근래에 들어 당신은 눈에 띄게 야위었다. 그래서인지 거무튀튀한 피부의 광대뼈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언젠가 목욕탕 주인여자는, 광대뼈가 심하게 나오고 얼굴빛이 좋지 않은 얼굴상은 팔자가 사납고 빈곤하다고 했었다. 얼굴은 물론이요 팔뚝과

[목에 납덩이가 묶여 몸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반면 정신은 점점 뚜렷해져 기름방울처럼 어중간하게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

허벅지살까지도 튼실한 그녀는 손님들과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누운 채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남자는 나를 조수석에 앉혀둔 채 줄담배를 피워댄다. 얼마 전까지 쏟아 붓던 비가 그치고 가로등 주홍불빛이 젖은 골목길을 비춘다. 차 안에서는 흙냄새가 풍긴다. 남자는 메마른 목을 가다듬더니, 딸아이와 둘이 살기에는 집이 너무 허전하다고 말한다. 남자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긴다.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얼룩진 백미러를 문지른다. 발밑에는 날짜가 한참 지난 신문이 구겨져 있다. 남자는 뻣뻣한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매달 둘째 주 화요일은 휴무일이다. 어제 주인여자는 댄스 복을 사러간답시고 다른 때보다 삼십 분 일찍 문을 닫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미용실에 들러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질한다. 미용실 여자는 앞치마에 가위 날을 닦으며 어제 낮에 골목 어귀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말한다. 무엇을 찾는 사람처럼 한참 골목 앞을 어슬렁거리더라고 덧붙인다. 미용실 여자는 푸른색의 에센스를 흔들어 머리칼에 골고루 뿌린다. 어설픈 바다향이 코끝에 감긴다. 미용실을 나서자마자 달궈진 햇볕이 목덜미를 데운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것은 무척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여상을 졸업하고 수원에 있는 화장품 공장에 취직을 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빠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며 뛰어다닐 때였다.
평생을 역마살에 끼어 살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곳은 부산 해운대 부근의 바닷가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흰머리가 늘어있긴 했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도 남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당신은 혼자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도 취한 기색 없이 영정 앞을 지키며 얼마 없는 조문객을 맞이했다. 병원 로비의 텔레비전에서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장례를 치루는 내내 밀랍인형처럼 무표정했다.
올케가 될 사람에게 쇼핑백 가득 챙겨온 화장품 샘플을 건네주었다. 오빠는 당신에게 이제 그만 세탁소를 정리하고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처음 손대는 사업이 생각처럼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는 눈치였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몇 벌 없는 아버지의 옷들을 정리했다.
진눈개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다 챙겨가지 못했던 옷가지들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았을 때 당신이 떨어져 나온 실밥처럼 맥없이 대문 앞에 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가 울리다가 끊긴다. 기껏 뛰어 들어온 나는 열쇠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어스름한 부엌의 불을 켠다. 혼자 있는 동안은 좀처럼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게 된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곧잘 라면이나 삼분 카레로 저녁 요기를 때우곤 했다. 말라붙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켜는데, 전화벨이 다시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설문조사를 하는 자동질문기가 돌아간다. 당신은 집을 나간 지 보름이 넘었지만 아무 연락이 없다.
   
링 귀고리를 여러 개 매단 여자는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온다. 집시를 닮은 여자의 가무잡잡한 얼굴 위로 눈썹문신이 푸르스름한 동선을 그리고 있다. 등 지압을 해주고 있는데 주인여자가 나를 부른다.
“나와 봐. 누가 찾아.”
카운터에 비스듬히 세워진 수화기를 든다. 다짜고짜 내 이름을 물은 전화 속 사내는 짤막하게 당신의 신원확인을 하고는 병원 위치를 알려준다. 나는 비눗물이 묻어있는 허벅지를 손으로 훔친다.
거리가 온통 부옇다. 종로에서 을지로로 넘어가는 사거리를 지나자 병원이 보인다. 커피숍과 레스토랑의 현란한 네온 뒤로 보이는 병원 건물을 향해 건널목을 건넌다.
당신은 이마를 꿰매고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풍치가 심해졌는지 자꾸 볼 언저리를 쓰다듬는다.
“그 사이비들이 쓴물 단물 다 빼먹다가 이제 더 이상 빼 먹을 게 없다는 걸 눈치 채고는 쫓아버리려 하는데도 노인네가 안 떨어지고 계속해서 달라붙으니까 결국 이런 식으로..... ”
말을 흐리며 입맛을 다시는 형사에게서 고기기름과 뒤엉킨 생마늘냄새가 풍긴다. 휴게실 창문 너머로 열대야에 잠긴 시가지가 내다보인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이야기소리는 웅얼거리듯 들려왔다. 주로 당신이 말을 이어나갔고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거나 가래침을 뱉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이야기 소리가 뚜렷해진 것은 무심한 투로 내던진 아버지의 한마디에서부터였다.
“안 말려. 내일이라도 당장 나가.”   
라이터 불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그딴 여자라니? 니가 그런 말 할 처지나 되냐?”
가위에 눌린 듯 온 몸이 무거웠다. 목에 납덩이가 묶여 몸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반면 정신은 점점 뚜렷해져 기름방울처럼 어중간하게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난 애들 엄마예요.”
당신이 말했다. 아버지가 잠시 목으로만 웃는 소리를 내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엄마 좋아하시네. 너 착각하지 말어... 물고기 물 밖에 건져놓는다고 사람 되냐?”
아버지의 비꼬는 말투에 당신은 나직이, 그러나 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니?” 

[도둑고양이의 거세된 야성과 마찬가지로당신의 광기 또한 맥을 잃었다. ]

오빠를 살며시 돌아보았다. 나와 키가 비슷했던 오빠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속눈썹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성질에 못 이겨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을 삼키며 애들 엄마, 라는 당신의 한 마디를 곱씹었다.
“언제든지 나가. 이 집에서 너 붙잡을 사람 아무도 없어.”
아버지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며 소리쳤다. 당신은 대꾸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거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아침상에는 미역국이 올려졌다.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날은 당신의 생일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던 나는, 지금 병원 앞에 와 있다는 남자의 연락을 받는다. 트럭은 대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알이 굵은 자두를 한 봉지 담아 내민다. 그의 땀에 젖은 이마를 바라본다. 자두의 과즙이 당신의 손목을 타고 흐른다. 당신은 노란빛 과육을 입술로 허물어 먹는다. 과육이 붙은 씨앗을 휴지 위에 뱉어내고 다시 봉지를 뒤적인다. 당신은 내일부터 풍치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치료라고는 하지만 그저 이뿌리가 흔들리는 치아들을 차례로 뽑아내는 작업이었다. 점등이 되었지만 당신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때밀이판과 비슷한 크기의 보조침대 위로 땀나는 살갗이 쩍쩍 달라붙는다. 당신은 손바닥만한 워크맨에 녹음테이프를 재생시킨다. 이어폰 너머로 교주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새어나온다. 나는 팔을 뻗어 워크맨을 꺼버린다. 한 마디 쏘아붙일 줄 알았던 당신은 잠자코 있다.
 
만취한 아버지는 당신을 주워왔다고 했다. 빈 술병들 사이에 끼어있던 당신을 들쳐 업고, 때로는 주머니에 주워 넣고 술집을 나왔다고도 했다. 내가 아는 당신은 연한 빛깔의 립스틱조차 바른 적이 없었다. 자국이 남지 않는 봉합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인지, 어쩌다 친척들과 함께한 당신에게서는 우툴두툴한 바느질자국이 느껴졌다. 그들 중 누군가 힘주어 당기면 맥없이 뜯어져나갈 듯한 모습으로 당신은 움츠러들어 있었다. 내가 세탁소에 드나들지 않고부터 당신과 나 사이에 그나마 남은 농도마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별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이든 세상 앞에 드러내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나이의 나에게, 미련하게

[ 거친 손바닥의 온기가 내 손등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한증막에 들어선 듯 숨이 막혀온다. ]

느껴질 만큼 말수가 적은데다 꾸밈새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당신은 그리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보름이나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볼 때면 속에서 들척지근한 연민이 배어나왔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며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다음 날 일을 마치고 병원으로 왔을 때 담당간호사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건너보았다. 당신의 위태로운 치아들은 아직 고스란히 잇몸을 붙들고 있었다. 마취를 하려는 의사를 뿌리치고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간호사는 브래지어 끈 밑으로 부풀어 오른 따갑고 간지러운 살갗 때문에 연신 어깨를 비틀어대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손님이 많은 날이었다. 양쪽 팔에 파스를 두 장씩이나 붙였지만 좀처럼 통증이 가라앉질 않는다. 그러나 쑤셔대는 것도 잠시, 그보다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에 못 이겨 정신없이 잠이 든다.

[혼자 대기실에 앉아 이름 불리기를 싫어서였던 게 아닐까  ]

얼마 후 어렴풋이 깨어난 것은 까칠하게 와 닿은 촉감 때문이었다. 정신은 깨어난 듯 하면서도 몽롱한 몸이 수중에 깊이 잠긴 듯 움직여주질 않았다. 당신은 침대 위에 구부정히 앉아 내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거친 손바닥의 온기가 내 손등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한증막에 들어선 듯 숨이 막혀온다. 이윽고 들려온 당신의 메마른 한숨소리에 나는 온몸에 맥이 풀리고 만다. 연어 속살 빛으로 일렁이는 당신의 손등은, 스스로의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데 인 흉터다. 그날 가게 안에 울렸던 당신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비명을 솟구치게 한 것은 뜨거움이었을까 서러움이었을까.
 
주인 여자는 사교댄스 강사에게 사기를 당해 결국 목욕탕까지 넘기게 되었다. 새로 바뀐 주인은 다리를 저는 한 중년여인을 데려다 놓았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아이라인이며 눈썹 문신을 해주고, 은밀히 주문을 받아 근처 여관에서 쌍꺼풀 수술이나 보톡스 시술을 해주기도 했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나도 여러 가지 값싼 아로마 오일을 사들여 아로마 전신 마사지라는 새로운 메뉴를 만들었다.
당신은 전과 다르게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봉재인형 악세사리나 아동용 머리띠에 구슬 꾸러미 따위를 붙이는 부업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당신은 근처 쓰레기장에서 배회하는 새끼 도둑고양이를 주워왔다. 선천적으로 붙어있는 야성 때문에 발바닥이 근질거릴 만도 한데, 녀석은 당신의 주변만을 맴돌며 제법 애완동물의 구실을 해낸다. 교주의 설교 테이프를 듣는 대신 녀석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늘어간다. 매일 아침 녀석의 하루치 참치 캔을 사러 나가는 당신의 얼굴에는 느슨한 홍조가 어린다.
새벽녘에 벽을 더듬어 불을 킨 당신은 주름진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 당신에게 꼬리를 밟힌 새끼고양이는 날카로운 울음을 던지며 문갑 위로 뛰어올랐다. 급한 대로 진통제 세 알을 당신의 입에 털어 넣는다. 식은땀 베인 뭉툭한 손끝이 떨린다. 당신은 젖은 신음을 뱉어내며 턱을 싸쥐고 뒹굴었다. 날이 밝자마자 간신히 당신을 부축하여 동네 치과를 찾았다. 들뜬 잇속으로 잇몸이 곪아 염증이 생겼다며, 의사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치료가 꽤 시간이 걸린다. 비상계단 쪽으로 나와 담배를 피운다. 먼지 더께가 앉은 창문 밖으로 아침의 길거리가 내다보인다. 빈속이 쓰려온다. 
 
당신은 짧고 빳빳한 고양이털을 쓰다듬는다. 고양이는 온 몸의 긴장을 풀고 거죽만 남은 듯 늘어져 있다. 등에 긴장을 싣고 꼬리를 곧추세운 야생 고양이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얼마 전까지 당신의 눈 속에 불거져 있던 광기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그러나 도둑고양이의 거세된 야성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광기 또한 맥을 잃었다.
느지막이 목욕탕으로 향한다. 주인여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띄었지만 별 말 하지 않는다. 삭신이 쑤신다는 주인여자를 판에 뉘이고 꽃잎 추출액을 담은 오일로 마사지를 한다. 오일은 여자의 늙은 피부에 윤기를 심어준다. 마사지를 끝낸 사람들은 개운한 얼굴로 매끄러워진 살갗을 두드리며 일어나지만, 오일에 절이다시피 한 내 손끝에서는 물집이 부풀어 오르고 누렇게 변색된 허물이 벗겨진다.
집에 돌아왔을 때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가 먹다 만 참치 캔이 부엌 구석에 놓여 있다. 문갑을 긁어대는 고양이 소리에 눈을 뜬다. 화장실에서 타일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한 시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묶고 방을 나서려는데, 창가에 못 보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피부연고와 핸드크림이었다.
 
약을 먹고도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데리고 다시 치과를 찾았다. 대기실의 블라인드를 걷은 창 밖으로 쾌청한 하늘이 내다보였다. 잡지들을 뒤척이다 문득, 어쩌면 당신이 지금까지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틴 것은 혼자 대기실에 앉아 이름 불리기를 싫어서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직접 받아왔다는 감자를 한 박스 내밀었다. 그리고는 잠시 쑥스러워하며 망설이다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내 손바닥 위에 풀어놓았다. 자잘한 조개껍데기들이었다. 바싹 마른 것들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바다인지 남자의 손에 밴 땀인지 모를 냄새가 아련하게 풍겼다 
 

 
부옇게 김 서린 거울을 닦아낸다. 파마머리가 물에 젖어 구불거린다. 어깨 위로 해파리처럼 내려앉은 머리칼을 핀으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검은 속옷을 벗어버리고 가슴 골 사이로 흐르는 근지러운 땀줄기를 훔쳐낸다. 때밀이 수건 표면에 얇게 비누칠을 한다. 때밀이 판 위에 누운 아이가 매끄러운 판의 감촉에 두 팔을 파닥거린다. 아이의 얇은 귓불은 남자를 닮았다. 당신은 온탕 속에 들어앉아 이 쪽을 바라본다. 당신과 눈이 마주친 아이가 젖니 빠진 잇몸을 보이며 웃는다. 당신이 탕 속에서 느릿하게 손을 흔든다. 후텁지근한 수증기가 몸을 휘감는다. 인중에 배인 땀을 어깨께로 훔쳐낸다. 아이의 배꼽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때를 밀어나간다. 물에 젖은 이마를 긁적이던 아이는 졸기 시작한다.   나는 손을 멈추고 아이의 둥근 배 위로 귀를 갖다댄다. 탕에 몸을 담근 당신이 나를 부른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어디선가 쑥 태우는 향기가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지른다. 끝.

◆ 수상소감

전아리
(한양대 국어국문1)
“아직은 더 성장해야할 때”
대학에 입학한 이후 새로운 환경에 흥분한 채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덧 한 해의 끄트머리에 가까워졌습니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순간에 지나간 듯한 일년이지만 올 한해 겪었던 많은 경험들은 제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는 데 밑거름을 다져주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일상의 뿌리 끝에 단단히 맺혀있는 것은 글이라는 몽우리입니다. 이제 새로운 계단을 쌓고 그것을 밟고서 성장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십대는 무슨 색으로 하늘을 덧칠해도 아름다울 시기라고 합니다. 오직 젊음을 무기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새벽녘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눈을 떴습니다. 살갗 위로 기분 좋게 감도는 긴장감이 상쾌한 요즘입니다. 아직 미숙한 저에게 상을 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끊임없이 정진하여 내년에는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심사평
염 무 웅
(독문과 교수)
「뻐꾸기 알을 품은 여자」는 뛰어나게 생생한 디테일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묶는 서사적 골격이 빈약하다.
이 작품의 화자는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소녀다. 그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그가 일터에서 목격하는 일 등은 이 사회의 저변의 구성하는 민중적 현실이라 할 수 있는데, 작자는 그 밑바닥 삶의 구체적 세부를 냉정하고 신랄하게 점묘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의 축적을 통해 도달한 소설적 초점이 불분명하다. 이런 결함을 극복한다면 이 소설의 작가는 훌륭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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