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대상-부정이 긍정으로 꽃피는 경계
제38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대상-부정이 긍정으로 꽃피는 경계
  • 편집국
  • 승인 2007.06.0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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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1996 - 함민복 論

제38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대상 강 수 정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전문

엇나가는 방향으로 더듬는 사람의 품, 하늘에 안기고픈 새의 날갯짓, 땅으로 묻히고 싶은 번개 불빛. 그네들은 서로 포개어지지 않는 불구이기에 화자가 첫걸음을 내딛은 장소는 얼핏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은 보드라운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움을 본성으로 가진 그네들. 새떼들은 그리워하면서도 또 다시 비낀 날갯짓으로 날아오른다. 비낀 날갯짓으로 날아오르기에 그리워 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시인은 그리움이 모든 사물을 읽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가진 그리움의 원천(源泉)은 무엇일까’ 어린 아이를 밤길에 내버려 두었을 때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찾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달려가는 곳은 사탕가게나 인형가게가 아니라 포근한 어머니의 가슴 안이다. 시인도 같다. 이제 넘긴 페이지 한 장. 백지에서 솟아난 화자가 맹목적인 그리움으로 끌려가는 장소는 바로 ‘어머니’가 있는 곳, 고향이다.
1부 〈선천성 그리움〉의 화자는 두 번째 시 「칠석」부터 마지막 시 「섣달그믐」까지 원초적 공간으로서의 어머니에게 안겨있다. 모든 사물의 이름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어머니. 대지의 아바타라 Avataara; 산스크리트어: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의 강림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그녀는 절대적인 희생과 헌신을 통해 인간으로 화(化)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젠가 바깥 세상에 나서게 될 화자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시 「세월 1」「환향」에서 어머니는 화자의 생에 끝없는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실상 그 곁에서는 부재해야만 하는 속성을 가진 원형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또한 어머니는 「눈물은 왜 짠가」「어머니 1」에서 짠 눈물과 염색된 머리칼로 현존(現存)하는 실재(實在)이기도 하다.
우선 전자를 보자. 예로부터 어머니의 모습은 보편적 체험을 통해 인류의 정신 속에 자리를 잡았다. 흔히 땅으로 표현되곤 하는 어머니의 포근함은 어둔 하늘을 밝혀주는 달, 미성숙한 생명을 지탱해주는 탯줄’자궁과 같은 자연물로 표상되어 왔다. 「세월 1」「환향」두 시에서 쓰인 시어들은 이렇듯 원초적인 인간의 감성과 관련짓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편일 뿐이다.

나는 어머니 속에 두레박을 빠뜨렸다
눈알에 달우물을 파며
갈고리를 어머니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어머니 달무리만 보면 끌어내려 목을 매고 싶어요
그러면 고향이 보일까요
갈고리를 매단 탯줄이 내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어머니가 늙어가고 있다
-「세월 1」전문


달무리를 끌어내려 목을 맸다
둥글고 부드러운 밧줄

태양을 훔친 범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둥글게 익어가는 과일들

갈림길에서 길을 물었다
지나온 길이 길을 열어주었다

자전거를 끌고가는 사내
자전거에 끌려가는 사내

밤송이가 화두처럼 툭, 떨어졌다
자궁에 목을 매달다니
- ‘환향’ 전문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시인 역시 불구이다. 그의 그리움도 목적지를 찾지 못한다. 시인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리워하는 고향이 아주 멀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갈고리를 어머니 깊숙이 넣어 휘젓’는 행동에서 알 수 있듯 아들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어머니는 말없이 늙어 있다. 그러나 말없음이 곧 침묵은 아니다. 아들 걱정에 깊게 패인 어머니의 주름살은 달무리와 닮아 있다. 어머니는 앞 뒤 없이 곧게 뻗어 나가는 달무리처럼 ‘지나온 길이 길을 열어 준다’는 진리를 온 생으로 설파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향은 과거에 국한된 공간이 아니다. 현재 속에는 과거가 담겨 있다. 현재의 고향 속에는 과거의 고향도 함께 있다.

불현듯 추억이 나를 찾아와
기억의 길을 걸으면
고향과
어머니와
한 여자가
눈물로 만든 안경이 되네
-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부분

눈물로 만든 안경을 통한 추억 안에서만 엿볼 수 있지만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하시는’(‘눈물은 왜 짠가’) 어머니께서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며 나를 이끄는 이곳 고향은 ‘네 흰밥 속에 내 흰 머리카락 들어가면 네 목구멍 멜까봐’(‘어머니1’) 염색하시는 어머니와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 지라도’(‘흐린 날의 연서’) 잊지 못할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그대’(‘서울역 그 식당’)가 ‘사랑이라는 우주의 헌법’(‘어머니 2’)을 준수하면서 살고 있는 곳이다. ‘찬물 바가지 속 틀니’로 살아 남아 ‘팔만대장경’(‘子’)과 같은 깊은 속내로 아들을 키워 낸 어머니는 아들의 정신속에 내재된 여성성(Anima 융의 분석 심리학에서 나오는 개념, 남성이 억누르고 있는 남성 속의 여성성.
) 즉 다정함, 부드러움, 평화의 기분(Mood)을 자극해 드러나게 만드는 존재다. 그에 비해 힘의 보관자였던 아버지의 기억은 고향 안에서도 ‘호박구덩이 있는 밭두렁으로 향하던 농부의 묘’(‘아버지의 묘비명’) 또는 ‘산속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양팔 벌려 버터플라이 수영포즈를 취한 아버지 산소’(‘산 속에서 버터플라이 수영하는 아버지’)에서 볼 수 있듯 엄격한 죽음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시인이 앞으로 시집 전체의 어조를 여성적인 고백체로 감싸 나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2부〈달의 소리〉에서 화자는 ‘자연으로서 존재’한다. 자아와 세계는 처음부터 구분되지 않았다. 순수한 자연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2부를 지탱하고 있는 지렛대이다. ‘까치집’ ‘백목련’ ‘염소’ ‘石月’ ‘달의 소리’ 등의 제목들은 아무런 기교나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를 적어낸 낱말들이기에 목차만 살펴보더라도 자연과 화자가 정서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맺혀 있는’(‘까치집’) 까치집이나 ‘한 인생을 해탈한 자’(‘백목련’)인 백목련처럼 의인관을 바탕으로 대상과의 일체감을 표현한 구절을 읽어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아래의 시 두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몸 뒤척이는 바닷가 검은 돌
돌 속에 달
초승 반월 보름
살점 깎으며
달을 닮으려
스르륵
스르륵
經을 외며
달이 이끌어 주는 그리움
밀물 썰물에
가슴 다 헐어내고
모래가 되어도
휘이-휘영청, 빛날
- ‘石月’ 부분

‘몸 뒤척이는 돌’은 하찮지 않다. 바닷가의 돌은 빛나는 달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달이 이끌어주는 그리움’대로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먼 훗날에는 온몸이 다 깨지고 닳아서 가루가 되겠지만 이 또한 달빛에 빛나는 모래사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에 불평하지 않는다. 이렇듯 겸손한 ‘바닷가 검은 돌’을 노래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런 조그마한 돌멩이조차 노래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몸이 많이 아픈 밤이라도 그리 걱정할 것 없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 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를 심어 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주었습니다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 주었습니다
- ‘몸이 많이 아픈 밤’ 전문

위의 시에서 쓰인 하늘, 바다, 산, 흙, 바람, 달과 같은 시어는 일차적 비유로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나타낸다. 이는 어떤 은유나 상징을 거치지 않는 순수한 언어, 꾸밈없는 존재 자체를 뜻한다. 이들은 거짓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위안이 되는 세상에서는 몸이 아픈 밤이라 하더라도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족하지 않고 욕구할 필요가 없으므로 갈등도 없다. 조화의 감동은 화자의 정신을 평화로 채운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화자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이제 마음 놓고 ‘바위 그릇에 물 받아’(‘東雲庵 1’) 빨래 할 수 있을 만큼의 물이 흐르는 곳은 외따로 떨어진 작은 암자뿐이다. 자연 속에서 현실로 존재하는 감각과 사고의 합치는 이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콘크리트와 철근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인공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이제 3부〈거대한 입〉에서 시인은 추구하는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연속적인 분리 과정 속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상실, 도시에서는 부패로 나타나는 이 갈등은 넘겨지는 페이지 수를 따라 함께 자라난다.
시골은 예전의 고즈넉한 모습을 잃고 있다. 이 곳에는 ‘저수지 오염되어 농업용수로 쓸 수 없어야 /절대농지 풀리고 땅 팔려 /도회지로 떠날 수 있’기에 ‘차라리 더 빨리 오염되기’를 바라고 있는 ‘살구골 사람들’(‘살구골 저수지의 봄’)과 ‘가슴 물컹한 처녀 등에 업고 /한 백리 걸어보고 싶’(‘농촌 노총각’)은 노총각이 남아 일탈을 꿈꾸고 있다. 또한 그들은’시내버스 생기고 장날이 썰렁해지자’’꾀죄죄한 몰골’로 떠나간 ‘씨갑시 장수’(‘유덕아범’)처럼 사라진 이들에 대한 기억을 아픔으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이 가져온 삶터의 파괴를 온 몸으로 겪은 이들의 가슴속에는 분노와 상실감만이 가득 차 있다. 이제 이들이 길러내는 한겨울 푸른 쑥갓이 도시인들에게 복수의 손길을 내민다.

한겨울 푸른 쑥갓 보고
피라미드처럼 잘 굄질된 귤이
깜짝 놀라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겨울 시장은 불안하다

자신의 유전인자를 의심하며
노란 귤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푸른 쑥갓이 어질어질
싱싱하다

잘못 태어난 것 같군
순리를 파괴한 것 만큼이
나의 생이구나
나의 가치구나

언젠가 욕망의 비닐하우스 자궁이
거대한 입이 되어 시장 전체를, 시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와삭, 한입에 먹어치울 날이 올 테지
- ‘거대한 입’ 전문

하지만 이들이 내미는 철 잃은 쑥갓을 보지 않아도 도시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의 존재감을 잃고 있다. 도시는 자아(自我)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곳이다. ‘은행-병원-지하철-집’으로 통하는 길은 ‘숫자로 숫자가 세상을 통치하고’있는 길이며 그 속에는 ‘숫자들 간의 인연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평균적 도시인,’국제 질병번호 300인 사내’(‘하늘을 나는 아라비아 숫자’) 가 살고 있다. 이름조차 필요 없는 사내는 ‘티브이’로 표상되는 물질문명에 세뇌되어 있는 상태이다. 티브이는 ‘티브이 밖 시청자들의 욕망에 맞춰 색조를 바꾸며 다가와 /우리 무당벌레 같은 영혼을 삽시간에 /삼켜 먹는’(‘아남 내셔널 텔레비전’) 현실보다 더 무서운 가상(假相)이다. 현실은 가상으로 인해 재구성된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물질세계에 속해있는 사내에게는 여성조차도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사내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감각이 오직 여자만을 향해 발동한다

미리 준비된 매체 속의 여인들이 사내의 욕망만큼 살아난다
티브이 속의 여인 목소리를 잡지 속의 여인의 입을 통해 듣는다
사내는 보다 입체적인 여인을 원한다
기억의 창고에 입력되어 있는 가장 여성다운 여성을 끄집어내
복합된 여인을 만든다

집적된 이미지로 창조된 여인
생각의 놀림이 빨라진다
이제 여인들을 버리기 시작한다
서양 여자를 버린다
알지 못하는 여자의 잘 빠진 육체를 버린다
아, 유명세의 여인을 택한다

…(중략)…

사내 머릿속에 만들어졌던 여인이 해체된다
사내의 온몸을 열고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사내는 휴지로 찔꺽 성기를 닦는다
전자파와 물감과 잔상과의 섹스를 끝낸다
사내의 모든 감각기관이 되살아난다
욕망의 고개가 뚝 부러진다
- ‘수음을 하는 사내’ 부분

이렇듯 존재하지 않는 세계(2부)와 어지러워만 가는 세계(3부)를 바라보며 시적 화자는 마음에 병(病)이 든다. 있어야 할 - 당위(當爲)의 세계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생긴 마음의 병, 거기서 다시 합병증처럼 생긴 파토스(pathos)는 방황과도 같다. 그는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다. 볼 것은 모두 보았고 들을 것은 모두 들었으나 실상 현실에서는 볼 만한 것도, 들을 만한 것도 없다. 이제 세상에 대한 화자의 고민이 시작된다.


4부 <꽃>에서는 화자의 생활과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화자는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 누구나처럼 자연을 부수면서 살아가고 있다. ‘뼛 속에 살을 숨기고 살아’ 그렇듯 ‘슬프게 살아 간이 저절로 배어있는’(‘게를 먹다’) 게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순간적으로 칼 끝을 돌려 거머잡을 수도 있다는 /충동을 느끼면서’’하루에 여섯 마리 개를 죽이면서 /여섯 번 나를 죽이면서’’꼬리를 흔들며 죽어가는 개’(‘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를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삶은, 깨달음은 난데없이 왔다. 어느 날, 회색 도시의 지저분한 애완동물이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사라진 것이다. ‘가끔 생활고 해결을 위해 /빛의 공간으로 외도’도 하지만, ‘어둠을 자신의 정도로 삼는 저 쥐’처럼, 나는, 어두운 내 세상을 사랑할 생각을 해본 적 있었는가’ ‘곤궁한 정신이 없는, /… 작금의 네 詩 나부랭이로는 /어림없지.’(‘쥐가 갉아먹은 비누로 머리를 감으며’). 어지러운 세상 안에서 홀로 고고한 척 하는 나는 거짓시인이었구나. 자신의 삶을 껴안지 못하는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비누에 남은 쥐의 이빨자국이 깨우쳐준 것이다.
이제 시인에게 금호동으로 표상(表象) 되는 바깥세상은 더 이상 대립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의 방에 있는 전기밥솥은 어머니가 해준 밥처럼 따뜻한 김을 뿜어낸다. 그의 가슴은 맑은 강물이 아닌 하수도 물소리에도 촉촉하게 젖을 수 있다. 언뜻 지저분해 보이는 하수도 물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달의 눈물’) 달의 눈물처럼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이다.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 ‘달의 눈물’ 부분

은행 열매 구린내를 향기로워 하고, 밤송이의 가시를 너그러워 하며, 복어의 독을 사랑이라 느끼고, 친구의 독한 마음을 아름다워 할 줄 아는 그는 이제 시인이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긍정적인 밥’ 부분

넘길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가 노래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의 목소리가 한껏 치솟아 오른 두 편의 시 ‘버드나무’와 ‘대나무’를 읽어 보자. 시인은 버드나무를 ‘이단아 ‘ 회의주의자 ‘ 향수병자’로 대나무를 ‘테러리스트’로 이야기 한다. 언뜻 봐서 부정적인 이 시어들은 실상 시 안에서 긍정적인 표현으로 뒤집어져 있다. 육신의 고향인 흙을 향해 치렁치렁 팔을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근육에 힘 빼고’’살아온 공간을 반추하는’(‘버드나무’)하는 것이며, 제 속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다시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가는 대나무는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대나무’)아가는 식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부드러움이나 단단함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버드나무는 대나무가 있기에, 대나무는 버드나무가 있기에 자신의 가치를 견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들의 중간에 경계라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자가
행인들이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러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꽃’전문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였듯이 꽃이란 순수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꽃’이라는’존재’는 왜 경계에서 피어나는가’ 우선 ‘경계’ 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 해 보자. 경계는 나(我)로 인해 타자(他者)들을 ‘가르는 선’이기에 본래 부정적인 단어이다. 그에 비교할 수 있는 우리말에는 ‘사이’가 있는데 ‘벌어진 틈’을 뜻하는 사이는 본래 하나를 전제로 태어난 단어이며, 나의 옆에 서 있는 타자들을 본원적으로 묶어 둘 수 있는 긍정적인 단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인이 자신의 몸을 달빛과 그림자의 사이가 아닌 ‘경계’로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달빛’과 ‘그림자’의 사이에 서 있다면 나는 그들에 의해서 존재 가치를 지니는 피동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와 달리 경계는 ‘나’로 인해서 그어진 것이며 내가 능동적으로 지은 경계는 ‘나’와 ‘달빛’과 ‘그림자’를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내가 경계로 서 있음으로 인해서 달빛과 그림자도 각각 자신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담장이라는 경계로 서 있는 꽃의 존재 가치가 일깨워 진다. 국화꽃 화분이 올려져 있는 담장이 있기에 집 안과 골목이 갈리고, 골목이 있기에 A와 B가 있고, B가 있기에 C와 D가 있고……. 이렇게 경계로 나뉜 사물들이 다시금 경계를 만들어 나가면, 꽃으로 시작된 경계 지음이 결국에는 한 세상을 이루게 된다. 이건 단지 꽃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풀도 나무도 달빛도 이슬방울도 경계를 이루는 한 점이 될 수 있고 그 경계 지음으로 자신의 한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꽃은 경계를 이룬다. 한 세상을 이룬다. 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순간은 모든 존재가 함께 피어나는 순간이다. 시인은 꽃을 본다, 자신의 세상을 본다.

♣ 도움받은 글......
-김승찬 · 이헌홍 외 『한국의 문학사상』, 《세종출판사》,2003
-김준오 『시론』(제4판).《삼지원》,2000

◆수상소감

강수정
(부산대 법3)
“비평을 위한 비평을 만들고자한 유혹에 빠지다”
함민복 시집은 제가 새내기 때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우리 동아리 나가려면 선배들이 사준 밥 다 토해내고 나가야 된다” 얼굴이 동그란 선배가 방긋 웃으면서 건네준 시집의 첫 장에는 ‘경계에서 피는 꽃을 네가 볼 수 있기를…’ 이라는 짧은 구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봄이었고, 처음 접해보는 황지우나 김혜순의 시어가 신기하기만 했을 때였지요. 그런 저에게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불투명한 영혼을 가진 시적 화자가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진 시적 화자로 탈바꿈 하는지, 그 과정을 자분자분 짚어준 책입니다. 마치 담담한 표정을 한 선생님처럼 말이죠.
사실 이 비평은 원래 국문학과 수업인 ‘시론(詩論)’의 레포트를 추려내고 다듬은 글입니다. A4 열장이 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몇주동안 시집을 들고 다니며 읽고, 생각하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하지만 시에 대한 고민은 즐거웠습니다. 다만 평론을 쓰는데 있어 가장 곤욕이었던 건 ‘시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비평을 위한 비평’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유혹이었지요. 나름대로 시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쓴 평론이었지만, 저 역시 그냥 ‘시’가 아닌 ‘평론에 대한 시’에 오래 갇혀있다 보니 이 글이 완성된 후 예전처럼 함민복의 시를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후로는 공들여 비평문을 쓰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답니다. 앞으로 제가 극복해야 할 문제일겁니다.
많은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먼저 사모하는 사내 분들 - 정지용, 백석, 이상, 윤동주, 황지우, 박정대……, 당신들의 목소리는 언제까지 내 영혼을 움켜쥐고 있을건가요. 그리고 부산대학교 시월문학회 선후배님들 - 일. 호. 택. 태. 훈, 지금은 춥고 헐거운 둥우리 속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어설픈 문학에의 열정 하나로 뭉쳐져 있음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으로 제 인생의 든든한 스폰서이신 부모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주 생각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심사평
박종홍
(국어교육과 교수)
「부정이 긍정으로 꽃피는 경계」란 평론은 선천적인 고적감으로 고뇌하는 서정적 자아의 삶에 대한 태도 변화를 역설적 시선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
시의 미묘한 숨결을 섬세하게 되살려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작품의 핵심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여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목소리와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다른 매개 과정 없이 그대로 동일시하는 점이 다소 거부감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논지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일관성을 갖는다. 
이번 천마문화상 수상을 계기로 삼아 수상자가 더욱 정진하여 유능한 문학 평론가로 계속 활약해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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