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0년대 어르신의 문화, '비내리는 고모령'을 찾아]
[194~50년대 어르신의 문화, '비내리는 고모령'을 찾아]
  • 장연희 기자
  • 승인 2007.06.08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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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령에 담긴 애틋한 모정 '효'란 이름으로 지역민의 문화로 탈바꿈
고모령 노래비


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없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가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비 내리는 고모령의 가수, 현인
현인(본명 현동주)은 1919년 12월 14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우에노 음악대학을 졸업한 그는 43년 악단 ‘신태양극단’을 설립하고, 47년에는 가수협회부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01년 올해의 스승가수로 선정되기도 한 그는 2002년 4월 13일 사망했다.
그의 대표적인 곡으로는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있다. 특히 이번 문화기행의 주제 ‘비 내리는 고모령’은 광복 이듬해 현인 특유의 저음과 어울림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슬픈 가사의 ‘비 내리는 고모령’은 해방 직후 1946년 현인 씨가 불러 당시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훔치게 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유행가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 노래의 배경이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 즉 우리 지역이란 점에서 이 노래는 특별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194~50년대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비 내리는 고모령’의 진원지인 고모령을 찾아가봤다.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고개, 고모령
고모령. 돌아 볼 고(顧), 어미 모(母)에 고개 령(嶺) 자를 합친 말이다. 고모령에 얽힌 전설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옛날 옛적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 한분이 와서 “이 집이 지금 가난한 것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서다”라고 말을 했다.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게 되었는데 그 산봉우리가 현재의 모봉, 형봉, 제봉, 이 3개의 산봉우리다. 그런데 덕을 쌓으며 우애도 쌓아야할 남매가 서로 높이 쌓으려고 시샘하며 싸우는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는 자식들을 잘못 키웠단 죄스러움에 집을 나와 버렸다. 집 나온 어머니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길이고 고개 정상에서 집을 뒤돌아 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해서 고모령이 되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때 징병 가는 사람들이 탄 열차가 고모령을 넘어갔는데 그 당시 증기기관차 성능으로는 높은 경사의 고모령을 한 번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모령에는 열차가 더디게 고개를 넘을 때 아들의 얼굴을 좀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단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장소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모령에는 남매간 돈독한 우애를 지키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과 조금이라도 자식의 얼굴을 더 보고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녹아있다.

고모령과 고모역
▲고모역(대구시 수성구 고모동 384-1번지)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 384-1번지에 위치한 고모역은 일제시기였던 1925년 11월 1일 간이역으로 개시한 이후 변화도 있었지만 80년간 꾸준히 고모령과 함께 해 왔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구나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는
슬픔처럼 비껴 서 있는
그 옛날 고모역에서」(박해수, 고모역 시)

고모역전에는 고모역 시비가 있는데 이는 지난 2월 16일 간이역 시비 건립으로 문향의 도시, 시맥을 잇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대구문화방송(MBC)의 캠페인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이처럼 2004년 7월부터 여객은 취급하지 않고 화물만 취급하는 고모역이지만 여전히 역은 어머니의 마음을 쫓아, 노래의 진원지를 쫓아 고모령을 찾아오는 이들을 변함없이 반겨주고 있다.
2002년 7월부터 고모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고모역 열차운용원 전기현씨는 “등산객이나 어르신들이 종종 역사에 들러 고모령의 뜻과 위치 그리고 노래비의 위치를 묻곤 해요”라고 했다. 3년간 노래를 따라 찾아온 사람들이 꽤나 되어서일까 전씨는 어느새 기자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는 고모령 비공식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게 “어머니와 남매 이야기는 안다고 했죠. 그럼 징병 간 아들 보려고 모인 어머니들 얘기도 알아요?”라며 하나라도 더 고모령 알리기에 바빴다.

노래에 애틋함을 더한 노래비
고모역을 지나 고모령 고개를 넘었다. 고모령 고개는 만촌동 인터불고호텔 남쪽 길에서 팔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팔현고개라 불리기도 한다. 일제시대 때 그토록 넘기 힘들어 징병 가는 아들을 보기 위한 어머니들이 모여들었다는 고개라는데, 도로 옆을 순식간에 지나는 KTX는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끔 했다. 그리고 주변은 흙먼지 나는 언덕길 대신 아스팔트와 철길이 나있었다.
인터불고 호텔 근처에서 찾은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는 1991년 수성구 의회 개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노래비의 앞면에는 노래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노래비의 한켠에는 고모령을 취재하다 달려오는 기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숨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 고 김문호씨의 불망비가 자리해 애틋함을 더했다.
무릎관절이 안 좋아 매일 꾸준히 이 부근에서 운동을 한다는 박춘길 할아버지(대구시 동구 효목동, 71)는 “내가 20대에 이 노래가 나왔어. 술집에서 친구들이랑 많이 불렀지. 너무 오래되어 그때 왜 그리 불러댔는지는 기억이 안나. 그냥 노래를 부르면 슬퍼했던 건 기억이 나”라고 노래에 담긴 추억을 회고했다. 고모령 노래를 오랫동안 부르지 않아 잊은 것 같다던 박 할아버지는 노래비에 적힌 가사를 보며 멋들어지게 한 소절 뽑으며 “기억을 더듬으니 생각나네”라며 멋쩍게 웃으셨다.

손주는 모르고 어르신만 아는 고모령 노래
“그동안 고모동 지역은 그린벨트에 묶여있어 소외되어 있었다. 대구 내 오지, 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대구역, 파크호텔, 시지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작년 일부지역이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이 지역은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어 사람들이 제 권리행사를 못하고 있다”는 수성문화원 이태우 사무국장 말처럼 고모동 지역은 한산한 농촌의 모습이었다. 고층건물과 다른 풍경이 고모령 노래와 더욱 어울렸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노래를 떠오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고모동 경로당에서 만난 은태선 할머니(71세)는 고모령 노래란 말이 나오자마자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내가 재작년인가 동네 할머니 4명이서 수성구청 노래교실 노래자랑 대회에 나갔어. 그때 이 노래를 불렀거든. 옛날 생각도 많이 나는 노래고 또 우리 동네 노래잖아. 장려상 탔지 아마 그 때. 우리에겐 연이 있는 노래지”라고 했다. 은 할머니 옆에 계시던 이두성 할머니(74세)도 “그렇지. 종종 할머니들이랑 노래비에 놀러가. 가면 단체로 노래 부르기도 해. 근데 이 좋은 노래를 손주 녀석들은 몰라. 좋은 노래니까 알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도 들어”라며 맞장구치셨다.
▲이제는 철도와 아스팔트 길이 된 고모령에서
수성문화원 이태우 사무국장과 함께

‘효’ 살린 고모령 축제로 지역민의 문화로
할머니 세대와 혹은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이 노래를 알지만 이 노래를 아는 요즘 학생들은 많지 않다. 또 그중 노래의 진원지가 가까운 고모령 고개인 것을 아는 이들도 적다. 수성문화원 류형우 원장은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렸던 민중적 노래’라며,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인간의 기본덕목인 효를 잊고 사는 젊은이들에게 효를 알릴 수 있는 지역문화’라 했다.
좋은 노래를 손주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이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지난 16일 지역문화를 보존겙饔쪄?목적으로 창설된 수성문화원은 현재 지역문화축제 개발 중이다. ‘효’에 얽힌 전실과 대중가요가 있는 고모령에서의 ‘악극’, ‘뮤지컬’, 학생과 주부를 대상으로 한 ‘효 백일장’, 전국적 규모의 ‘효 주제가요제’ 등 ‘효 축제’도 계획 중이다. 류 원장은 “고모령 효 축제는 젊은이들에게 효의 의미와 효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자연스런 고양과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바로 우리 지역 문화이지만 어른들만 알고 있던 노래. 한 시대 대중적 노래로 국민이 즐겨 불렀던 그 노래. 우리 지역이 모티브가 되었던 노래다. 고모령 노래가 어르신의 당시 문화였다면 고모령 축제는 젊은이들의 문화가 될 수도 있다. 젊은이와 지역민의 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고모령 노래가 어르신들의 노래였다면 ‘효’의 가치를 살린 고모령 축제는 이제 지역의 어르신과 젊은이의 문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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