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니스트] 동물답게 살 권리란 무엇일까
[나도 칼럼니스트] 동물답게 살 권리란 무엇일까
  • 윤서연(철학1)
  • 승인 2019.09.26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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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 돼지의 해다. 각종 브랜드에서는 돼지의 귀여움을 차용한 다양한 광고를 제작했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만 들어가도 한복을 입은 돼지가 절을 하는 일러스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미디어 속 돼지들은 하나같이 “하는 일 모두 잘 ‘돼지’”, “꿈꾸는 대로 ‘돼지’”같은 메시지를 말하곤 했다. 분홍색으로 칠해진 그들은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실의 돼지들은 어떨까. 신년을 맞이한 귀여운 돼지들의 향연이 지나가고 여름이 되었다. 올해 7월, 오물투성이 새끼돼지 세 마리가 종돈장으로부터 구조되었다. 구조를 자행한 동물권 단체는 이들에게 새벽, 노을,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중 별이는 구조 시점부터 사망한 상태였다. 세 마리는 분뇨와 피, 사체가 난잡히 섞인 작은 우리 속에서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들에게 생존은 곧 투쟁이었다. 이후 구조단체는 별이의 장례식을 기획했다. 그들이 덧붙인 코멘트는 이러했다. “돼지를 먹기 위해 태어나게 하고, 기르고, 죽여 먹는 이 세상에서, 별이의 장례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동물들은 언제나 인간을 위해 사용됐다. 고기도 털가죽도, 하다못해 이빨과 발톱조차도 인간은 이용해왔다. 무형 생산물을 포함하자면 노동력까지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 착취의 역사 속에서 소수의 인간들은 이들에 대한 권리 운동을 시작했다. 털코트 불매 운동에 대해서는 대부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털코트 목장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앙고라 토끼는 산 채로 털이 뽑힌다. 소동물의 여린 피부에 피가 맺히고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한들 착취자들은 멈추지 않는다. 허나 털코트 착용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 단순한 인간의 사치를 위해 비 인간종의 착취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동물권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육식에 대한 논의 역시 털코트 논의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현대에 이르러 육식은 단순한 영양소 섭취의 의미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다. 그저 필수적인 영양소를 위해 육식이 필요하다 주장하기에 현대인들의 고기 섭취는 필요 이상으로 과하다. 동시에, 고기를 획득하기 위해 양육되는 ‘가축’들은 대부분 공장식 사육을 당한다. 인간을 위해 동물의 희생이 필수불가결하다면 죽임당하는 동물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는 것이 착취자로서의 예우일 것이다. 허나 공장식 사육 과정에서 동물에 대한 윤리가 충분히 보장될 수 있을까. 최소한 새벽이와 노을이, 그리고 별이가 길러지던 종돈장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처참한 사육 환경은 새끼돼지 세 마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대부분 ‘가축’의 현실일 것이다.

 동물권을 위해 당장 모든 육식을 그만두고 채식에 접어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누리던 권리를 한순간에 포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힘든 일이니까. 허나 과도한 육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책안을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행되는 육식의 경감과 동물들의 윤리적 축산 등의 소극적, 적극적 대응들로 말이다. 그러한 대안이 하나씩 축적되어가는 과정에서, 동물권에 대한 존중은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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