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우리의 존재, 그 작음에 감탄하며
[시선] 우리의 존재, 그 작음에 감탄하며
  • 김달호 사회부장
  • 승인 2019.09.24 0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주먼지’라고 하는 단어가 하나의 유행어처럼 필자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 우주먼지를 처음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주라고 하는 광대한 존재와 먼지라고 하는 하찮은 존재의 결합은 결코 연결될 수 없는 두 가지를 억지로 묶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라고 하는 존재를 ‘크다’라는 존재의 대표로, 먼지라고 하는 존재를 ‘작다’라고 하는 존재의 대표로 이해한다면 그 뜻은 쉽게 해석될 수 있다. 즉 우주먼지라고 하는 것은 광대한 존재와 비교해 먼지와 같은 하찮은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필자는 가끔 스스로가 작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가 있다. 그러한 인식은 물질적인 크기에 있어 필자를 압도하는 존재를 만날 때나 물질이 가진 엄청난 크기의 기운에 눌릴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작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타인에 비해 작음을 느낄 때를 의미한다. 우린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의 작음’을 자각한다. 성공이 정확한 정의로 개념화된 것은 아니기에 그 성공은 부, 명예, 권력 등 수많은 단어로 치환될 수 있다. 즉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날 때 또는 자신과 같다고 느낀 존재가 동등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스스로 지극히 작은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때론 우주 속 한 톨의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우주라는 존재에 있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작은 존재임에도  부, 명예, 권력 등을 가진 이들로 인해 더 작은 존재가 되곤 한다. 그 상황에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을 한다. 그들과 평등해지거나 그들과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그들과 평등해질 수 없는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평등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평등해지기 위해선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포기하거나 우리가 그들의 힘과 같아져야 하지만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을 살아간다. 그러한 삶 속에 어느덧 우린 우주먼지보다 더 작은 우주의 ‘초미세먼지’가 되고 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초미세먼지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까란 의문이 든다. 부, 명예, 권력은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일 뿐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모두가 인간이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인해 우린 인정할 수 없는 계층 사회로 이동하게 된 것일 뿐이다. 거기다 우린 대학을 진학함에 있어 존재하는 불평등, 회사에 취직함에 있어 겪는 불평등 등과도 마주하곤 한다. 그러한 불평등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적 기준은 마침내 결코 넘을 수 없는 태산, 절대로 건널 수 없는 하해와 같은 거대한 장애물로 다가온다.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된다. 태산은 ‘가장 큰 산’이란 의미이면서, ‘큰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티끌이 태산이 되는 것은 수많은 시간이 필요한 고된 일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티끌이 모인 태산을 보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고정된 사고’에 갇혀 단정짓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초미세먼지라 하더라도 우리들이 모이면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뭉치는 것도 어렵고, 우리가 뭉쳐 사회에 변화를 만든다고 하는 것도 확신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힘이 합쳐져 나비의 작은 날갯짓을 한다면, 결국 태산과 같던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해와 같던 장애물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작음, 우주먼지보다 더 작은 우리는 정말로 위대하다. 그것이 필자가 ‘우리의 작음’에 감탄하는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