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광대와 철인 김시습
[학술] 광대와 철인 김시습
  • 김영수 교수(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9.09.24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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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를 살다간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특이한 사람이다. 유학자이면서 불교도였고, 도가주의자였다. 조선 정신사에서 이처럼 다채로운 사상적 경력은 매우 드물다. 더 특별한 것은 그가 광대였다는 사실이다. 광대의 라이프 스타일은 조선인에게 익숙하지 않다. 이황은 김시습을 색은행괴(索隱行怪)의 이인(異人)이라고 평가했다. 괴팍한 짓을 하는 별난 사람이란 뜻이다. 『중용』에 나온다. 하지만 그도 원래 맹렬히 공부하던 예비 유학자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미친 사람처럼 됐을까?

 김시습에 대한 가장 긴 전기는 이율곡이 썼다. 짧은 전기로는 남인의 영수 허목이 쓴 「청사열전(淸士列傳)」이 있다. 1582년 선조는 이율곡에게 「김시습전」을 짓도록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김시습과 맺어진 사람의 연은 놀라운 것이다. 전기는 이율곡, 허목이 썼다. 5세 때 세종의 촉망을 받았으며, 선조가 문집을 간행해 주고, 정조가 이조판서에 추측하고 ‘청간(淸簡)’의 시호를 내렸다.

 「김시습전」을 쓸 당시 율곡의 나이 47세로, 2년 뒤 세상을 하직했다. 그 무렵 율곡은 동서 분당에 휘말려 정치와 삶에서 희망을 잃고 있었다. 세상의 신산(愼山)을 모두 맛보고 간고를 다 겪었으니, 인간에 대한 통찰력도 깊어졌을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전생을 김시습에 비유했다. “전신은 바로 김시습이었는데, 금세는 가도(賈島)가 되었구나.”(『명종실록』 명종 19년 8월 30일) 가도는 당나라의 시인이다. 김시습과 가도는 천재적 시인들이었으나, 모두 신산한 일생을 살았다. 율곡도 자신의 삶을 쓸쓸하게 본 것이다.

 김시습의 가문은 한미했다. 하지만 그는 드문 천재였다.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김시습은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영민하여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다. 명재상 허조 등이 많이 찾아와서 보았다. 세종이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시로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 듯하니, 그 가정에 권하여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율곡, 「김시습전」

 

 21세 때 김시습은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때 수양대군의 찬탈 소식을 들었다. 주야 3일을 두문불출한 그는 대성통곡하고, 책을 모두 불사르고 광기를 일으켜 측간에 빠졌다. 그리고 머리를 깎은 다음 행각승이 되어 팔도를 떠돌았다.

 가슴에 쌓인 분노와 슬픔은 그를 방랑하게 했다. “명승지를 만나면 곧 거기에 자리 잡았고, 옛 도시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시세에 영합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컸다. “굳세고,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이 저자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이놈아, 그만두어.” 하고 소리쳤다. 정창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못 들은 체하고 지나갔다.

 김시습은 정창손에게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 정창손은 젊어서 집현전의 촉망받는 학자이자, 높은 절조로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세종 사후 수양대군 편에 섰다. 또한 1456년 사위 김질로부터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계획을 듣고 고변했다. 사육신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그는 현달하여 1458년 영의정에 올랐다. 148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인신의 영화를 극한 일생이었다.

 그런 정창손도 김시습의 험구를 피하지 못했다. 모른 채 지나쳤지만 그들의 분노는 컸다. 처벌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서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累)가 되리라.” 하였다.(이율곡,「김시습전」) 서거정은 김시습을 국사(國士)로 인정하고 교유했다. 서거정 역시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깊은 지우를 받았지만, 수양대권에 협조하여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그의 인맥, 학맥도 화려하다.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었고, 스승은 이색의 손자이자 대제학을 역임한 이계전(1404-1459)이었다. 자형은 최항으로 영의정이었다. 인친과 사우는 모두 세조 편에 서서 순탄한 길을 걸었고, 대대로 문형(文衡)을 담당하여 명예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사가집(四佳集)』,「증채응교수(贈蔡應教壽)」)

 「경국대전」,『동국여지승람』편찬 등 국가프로젝트를 담당한 서거정은 조선 초기 제도의 완비에 크게 공헌했다. 서거정은 공자가 말한 유하혜, 소련처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은 도리에 맞았고(言中倫)  행동은 사려가 깊었다.(行中慮)” 맹자에 따르면, 유하혜는 “욕된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不羞汚君)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 당대의 권신들과 교분도 깊었다. 김시습도 소시에 이계전에게 배워 서거정과 동문이었다. 하지만 서거정의 문벌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은 김시습의 삶이 지닌 가치를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김시습이 미래의 역사에서 차지할 위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15세나 어린 김시습을 망년지우(忘年之友)로 받아들였다.
 

 서거정이 막 조정에 들어가느라고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마침 김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다가 그 행차의 앞길을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들고,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이 편안한가.” 하였다.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이율곡, 「김시습전」

 

 하지만, 위험을 느낀 친구들은 김시습과 절교하였다. 남효온, 홍유손 등 몇 사람만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할 말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도 김시습이 위험을 피해 간 방법은 미친 흉내였다. 율곡은 그가 “일부러 광태를 부려,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고 말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한참 읊조리다가 문득 곡하고는 깎아 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종이에 써서 남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만들어 책상 옆에다 두고 종일토록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울면서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이삭이 패어 나와 탐스럽게 되었을 때 취중에 낫을 휘둘러 모조리 쓸어 눕히고, 그러고는 방성통곡하기도 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속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율곡, 「김시습전」

 보통 사람들은 이 희대의 천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과 동류가 된 그의 기행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김시습은 안도감을 느꼈다. 산에 있을 때 누군가 찾아오면 김시습은 반드시 “자기에 대한 서울의 소식을 물어보고, 자기를 통렬히 욕하는 이가 있더라고 하면 희색이 드러나고, 거짓 미치광이로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다고 하는 이가 있더라고 하면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보지 않는 것은 위험 신호였다. 만약 김시습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권력을 비판했다면 그의 목숨은 하루를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세상을 횡행했지만, 김시습은 자신에 대한 세상의 눈길에 깊이 주의하고 있었다. 만약 세인들이 그를 정상인으로 본다면, 그것은 권력자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김시습은 어린 나이에 세종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그것 자체로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김시습은 미쳤다. 그러니 어떤 이야기를 한들 무슨 상관이랴. 김시습의 광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처벌한다면, 그 말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김시습의 신랄한 풍자와 거침없는 비난은 당시의 권신들에게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정창손처럼 지나가는 바람 소리쯤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광대의 소용은 여기에 있다. 광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광대의 말은 위험하지만, 그렇게 체제의 긴장을 완화하고 균형을 회복시킨다. 광대를 허용하지 못하는 체제는 조만간 전면 붕괴의 위험에 직면한다. 하지만 광대는 위험한 직업이다. 권력과 방언(放言)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정상적인 체제라면 권력 비판의 기제를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종교적 권위에 기초한 선지자의 전통이 있다. 아테네에서는 철학자가, 로마에서는 호민관이 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이 구상한 조선정치체제는 권력을 비판하는 제도로 간관을 설치했다. 또한 공론정치를 이상화함으로써 관리와 사림의 상소를 폭넓게 허용했다. 하지만, 김시습의 풍자는 새로운 형식의 권력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풍자에 의한 권력 비판은 대체로 마당극이나 탈춤 같은 연희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김시습처럼 깊은 교양을 가진 인물에 의한 풍자의 전통은 더 발전되지 못했다.

 김시습은 그 대가로 자신의 삶을 희화화하고 망가뜨렸다. 율곡의 말대로 그는 “스스로 명성이 너무 일찍부터 높았다고 생각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도피하여, 마음은 유교에 있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시속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김시습 스스로도 그 점을 명료하게 이해했다. “네 모습 지극히 보잘 것 없고, 네 마음 너무나도 미련하니, 마땅히 너를 구렁텅이 속에 두련다.” 자신이 그린 초상화에 붙인 설명(贊)이다. 이는 자학이지만, 동시에 그런 자기를 바라보는 자의식이기도 하다. 존재의 이런 이중성은 정확히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world-clown-philosopher’의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철인이 세상과 직접 대면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양자의 불화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이 세상에 나가기 전 한 번 비틀어, 매우 심각한 것을 매우 희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우스꽝스럽게 생각했지만, 민감한 사람들은 안도했고, 철인은 그렇게 비틀린 자기를 고통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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