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상해에서 우리의 흔적을 찾다
[특집] 상해에서 우리의 흔적을 찾다
  • 김채은 기자, 김달호 기자, 윤신원 기자
  • 승인 2019.08.3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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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는 중국 동부에 있는 중국 최대의 도시이다. 우리에게는 관광지로 익숙한 이곳에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상해에 있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봤다.

상해, 독립의 땅이 되다

 ‘신인일치로 중외 협응하여 한성에서 기의한 지 30유여 일에 평화적 독립을 300여 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 자손 여민에게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1919년 4월 11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라 불리는 조직의 첫발을 알린 포고문이었다. 이 포고문 이후로 1932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 일대에 있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위한 움직임도 이곳에 있었다. 이에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작한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알아봤다.

 독립운동의 시작, 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상해에 있었다. 일각에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해에 있었던 3.1운동의 영향 때문이라 말한다.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사회교육학과)는 “3.1운동이 이전에 없던 임시정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임시 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3.1운동으로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4월 11일 지금의 국회 역할을 하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한 상해 임시정부는 4월 13일 공식적으로 출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경성의 ‘한성임시정부’ 등 다른 지역에 있던 임시정부들이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통합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다. 이에 이들 기관은 1919년 9월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모든 임시정부를 통합한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가 세계적인 도시로 여러 나라와의 교류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쉽고, 안창호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모여 있었기에 임시정부를 운영하기가 수월하다고 판단됐기에 상해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들의 활동은 외교, 국내 선전 활동, 무장 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특히 외교의 경우에는 파리위원부를 설치해 서양에 한국의 문제를 설명하는 활동을 주로 했으며, 이 외에도 구미위원부가 설치돼 미국과의 소통도 이어갔다. 이와 함께 국내에는 교통국을 설치해 통신원을 통한 국내와의 정보 교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독립군 조직을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가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투척, 그러나 또 다른 피난길의 시작=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이후 항주로 이동하면서 상해에서의 임시정부 역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즈음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 내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일본 장교 등 일본 측 주요 인사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이날은 일왕의 생일임과 동시에 상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었기에 수많은 일본 주요 인사들이 홍커우 공원에 집결해 있었다. 이때 윤봉길 의사가 일본 요인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하면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총사령관과 가와바타 사다쓰구 일본거류민단장이 폭사하고, 그 외의 수많은 주요 인사가 부상을 입었다. 일부 전문가는 이 의거에 대해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침략한 일본을 공격하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에 실시됐다고 말한다. 실제 이 사건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에 공식적인 지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에 1932년에 있었던 의거 이후 더욱 심해진 일본의 탄압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진강, 장사,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정부를 유지해나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공식적인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1932년 이후 항주, 남경, 중경 등 수많은 이주가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국광복군 창설부터 카이로 선언까지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의가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의 현장이 살아있는 곳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정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정문

 대한민국이 시작된 곳=역사 교과서에서만 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간다고 하니 기대가 많이 됐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한 문장만으로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했던 점은 ‘왜 임시정부는 상해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였다.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키가 큰 건물들이 들어선 모습이 도시의 풍요와 경제적 우월성의 방증 같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상해는 명나라 이후 사회, 경제, 지리 모두에 있어 최대로 발전한 국제도시라고 한다. 이곳에서 100년 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가 세워졌고,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마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인상은 ‘일상 속 비밀’이었다. 역사적 유적지가 주변 주거 환경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우러져 있었기에, 평범한 일상에 숨겨진 비밀처럼 느껴졌다. 또한 입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는 팻말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을 만큼, 역사적 유적지가 주변 환경과 전혀 위화감이 없어 조금 놀랐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1919년 4월 수립 이후, 임시정부 역사의 절반 정도인 약 13년간 상해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었다고 한다. 자유·평등을 지향하는 프랑스가 보유한 조계지 내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와 평등을 갈망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복원된 곳이지만, 아직도 일상적인 거리에 우뚝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관에 입장하니 1919년 당시 임시정부의 모습이 복원돼 있었다. 그 안에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원분들도 있었으며, 함께 간 일행 외에도 임시정부를 찾아온 한국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중국 내 다른 곳으로 임시정부를 옮겨 다녀야 했던 역사가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하나뿐인 목숨과 인생을 바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뵈니 존경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들의 사진을 보며 한 분, 한 분 눈에 새기고, 가슴에 새겼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활동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엔 알아주는 사람도 적었고, 일제로부터 쫓겼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의지와 애국심에 고개를 숙였다.

 임시정부를 나오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들의 숭고한 활동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독립운동의 흔적이며, 중국 정부에서도 ‘황푸구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마음에 이 글을 빌려 다시 독립운동가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루쉰공원 내에 위치한 윤봉길의사기념관 앞
루쉰공원 내에 위치한 윤봉길의사기념관 앞

 그의 숭고한 의거=지금은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이름이 바뀐 홍커우공원에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투탄 의거를 결행했다. 우리에게 홍커우공원으로 익숙한 루쉰공원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얼이 담긴 곳이었다.

 한편으론 루쉰공원은 평범한 공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안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뜻깊은 장소이지만, 상해 시민에게는 그저 공원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그러한 모습에 조금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입장료 5위안을 주고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 정원에 입장했는데, 정원을 거닐며 든 생각은 ‘보여주기 위한 공간’ 같다는 것이었다. 빨간 기둥으로 된 집의 자물쇠는 굳게 잠겨 있었고, 그 뒤에 위치한 편의점 또한 셔터가 굳게 닫혀 있었다. 특히 루쉰공원과 매헌 기념관 사이에 길게 쳐진 울타리는 그러한 공간의 분리성을 더욱 심화시키며 씁쓸함의 무게를 더 지웠다. 매헌이라고 하는 이름을 걸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라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껴져 아쉬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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