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로를 거닌 사람] 소신 있는 CEO, 정현식
[천마로를 거닌 사람] 소신 있는 CEO, 정현식
  • 김채은 기자, 김달호 기자, 김은택 수습기자
  • 승인 2019.05.13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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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식 동문(영어영문79)은 우리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는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맘스터치’ 해마로푸드서비스의 회장이다. 이에 그를 만나 그의 대학 시절과 기업 경영 철학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학시절, 자신은 어떤 대학생이었나.

 ‘반항적인 대학생’이었어요. 수업도 많이 빠지고, 당시 대학생들이 많이 했던 민주화 시위에도 참여했죠. 당시의 대학생들은 지금보다 사회참여에 관심이 더 많은 편이었어요.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2학년 때는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4학년 2학기 때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죠.

 많은 학부(과) 가운데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곳이 영어영문학과였어요. 학과를 선택할 당시 10년 뒤 전망을 생각해 ‘중어중문학과를 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에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 중어중문학과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저의 신념대로 갔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인식에 흔들리지 말고 본인만의 신념을 갖고 학부(과)를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대학 시절 영대신문 활동을 한 것으로 안다. 활동은 어땠는가.

 학과 전공은 관심 밖이었을 만큼 신문사 활동에 몰입했어요. 신문을 주마다 발행해야 했기에 그 과정들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웠죠.

 당시 썼던 기사 중 기억에 남는 기사는 무엇인가.

 그 시절 ‘전국대학야구선수권 대회’가 큰 인기였어요. 당시 우리 대학교 야구팀은 특별히 뛰어난 선수가 있지는 않았지만, 팀워크가 좋아서 대회 결승전까지 가게 됐어요. 그래서 경기를 취재하고자 서울 동대문구장에 갔었고, 그해 우리 대학교 야구팀이 우승을 차지했어요. 이 내용을 신문에 내기 위해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정신없이 기사를 썼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영대신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는가.

 얻은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글쓰기 능력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에요. 저는 영대신문 활동 경험 덕분에 깔끔하고 정리된 글을 쓰는 데 탁월했죠. 글을 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확연해요. 정리가 잘된 글을 쓰는 사람은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어요.

 또한 신문사에서 익힌 조직생활 경험이 도움됐어요. ‘해마로푸드’를 포함해 많은 기업에서는 스펙이 화려한 사람보다 희생정신이 강하고 소통을 잘하는 사람을 원해요. 또한 이기적이지 않고 협력할 줄 알며,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인재를 찾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학보사 출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이러한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첫 직장은 어디였는가.

 ‘샤니 빵공장’이에요. 지금은 SPC 그룹으로 성장했지만 제가 입사할 당시에는 ‘샤니 빵공장’이었어요. 당시에 저는 입사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죠.

 직장생활은 어땠는가.

 입사 후 연수를 받던 중 선배 한 분이 본인과 함께 ‘아이스크림 사업’을 해 보자고 저에게 제의했어요.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저는 신규 사업팀에 배정받았어요. 제가 소속된 팀은 외국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와 국내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담당하게 됐어요. 지금 여러분들도 잘 아는 ‘배스킨라빈스 코리아’의 시작이었죠. 저는 직장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3년 동안 일하면서 평일 밤 12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으며, 주말에도 항상 출근했어요. 그렇게 일하다 보니 회사에서 졸도를 2번이나 했죠. 그 덕에 입사 3년 만에 과장으로 진급했어요. 하지만 과장에 진급하고 얼마 안 있어 사직서를 냈어요.

 사직서를 낸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에 저는 30살이었는데 “내 인생 30년이 작은 회사 과장이 되기 위한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어 회의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창업을 통해 사장이 돼보자는 꿈을 가지게 됐어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직서를 낸 것이죠. 저는 무슨 일이든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하고, 그만둘 때는 단호하게 그만둬요. 선택에 있어서 타인의 시선이나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 것이 좋아요.

 처음 시작한 사업은 무엇이었는가.

 기계 1대만 있으면 생산이 가능한 짜장면 그릇을 만드는 사업이었어요.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 부산 남포동 시장에 가 보니, 제가 파는 그릇과 비슷한 그릇을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었어요. 그 그릇은 태국에서 수입해온 것이었는데 제가 만든 것보다 가격이 저렴했어요.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업을 할 때 국내시장만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국내시장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맘스터치’를 인수할 당시 기업 가치는 5억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021년까지 매출 5,000억 원을 목표로 둔 기업으로 성장했다. 기업의 성장 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무엇보다도 메뉴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고객들이 맘스터치 햄버거를 먹어보고, 본인이 다시 찾는 것에만 그친다면 우리 기업은 현상유지 수준일 거예요. 그러나 맘스터치 메뉴를 먹어본 고객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그 맛과 장점을 전파했기에 수요가 늘었어요. 그 효과가 기업 성장으로 이어졌어요. 또한 SNS를 통한 입소문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맘스터치 메뉴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메뉴는 무엇인가.

 감자튀김이에요. 현재 맘스터치에서 판매하는 감자튀김을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 바로 저예요. 다른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은 맛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짭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나는 감자튀김을 도입하게 됐어요.

 맘스터치의 경우, 경쟁사와 비교해 TV 광고와 이벤트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맘스터치는 경쟁사보다 투자비가 적게 들었어요. 그렇기에 매출이 경쟁사보다 조금 적더라도 괜찮아요. 또한 광고하지 않더라도 맘스터치를 찾는 고객들이 많아요. 하지만 주문이 들어와야 요리하기 때문에 고객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요. 그래서 광고로 인해 고객들이 더 많아지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웃음)

 이벤트 같은 경우, 항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이벤트를 할 필요가 없어요. “EVERY DAY LOW PRICES”가 경영철학이에요.

 고객 중 어떤 이는 “맘스터치 버거의 치킨 패티가 두꺼워서 먹기 힘들다”며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패티가 얇고 작으면 가격이 낮아지고, 두껍고 크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닭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기에 크기와 무게가 제각각이에요. 그래서 패티 크기를 맞추기 위해 고기를 자르면 그에 대한 인건비가 들어요. 또한 잘린 작은 고기들은 패티에 쓰이지 못하고 쓰레기가 돼요. 그래서 크기가 큰 고기를 자르지 않고 파는 것이에요. 패티 크기와 무게가 같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었죠. 맘스터치 패티는 기본적으로 크고 두껍기 때문에 만약 다른 사람보다 더 두껍고 큰 패티를 받았다면 본인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길 바라요.

 해마로푸드서비스는 다양한 국가로의 진출을 통해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이란 시장은 작지만 세계시장은 커요. 그렇기에 해외로 나아가 더 넓은 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필수예요. 이와 관련해서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우리 대학교에 대해 사람들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대학’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한국은 세계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작은 나라인데 한강 이북과 이남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안에서의 경쟁은 ‘도토리 키 재기’예요. 그래서 청년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시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해외시장’ 진출 전략은 무엇인가.
경쟁자를 알고 나를 알고, 현실을 알 때 전략이 만들어져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딪혀도 보고 실패도 경험해 봐야 해요. 이러한 경험이 성공의 토대가 돼요.

 CEO를 꿈꾸는 청년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인가.

 이론적인 창업과 실제 창업은 다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중요한 것이에요. 그리고 작은 회사도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맘스터치도 처음에는 크지 않았지만, 매출이 상승하며 규모도 커졌어요. 그렇기에 생각을 크게 가지라고 조언해 주고 싶어요. “작은 회사도 큰 회사가 될 수 있다”고요. 처음부터 큰 회사는 없어요.

 사회에 진출하는 대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에요. 그러나 한 국가의 청년들이 너나 할 거 없이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을 약화해요. 또한 요즘에는 청년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고 해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것이죠. 이러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크리스틴 리카르드 IMF 총재는 “대한민국은 집단 자살 사회로 맹렬히 뛰어가는 아주 기묘한 나라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청년들에게 개인도 소중하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필자가 생각한 ‘기업’에서의 회장은 ‘권위가 있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정현식 동문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떨 때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셨고, 어떨 때는 장난 섞인 대답도 던지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다. 그러나 그가 한 말속에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단호한 말도 있었다.

 필자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어 학창시절을 보낸 고향을 떠나 대학이라는 더 큰 사회로 왔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전에 있던 곳보다 큰 정도에 불과한 우물이었다. 심지어 20대인 필자가 ‘대학’이란 우물로 만족할 때 60대인 정현식 동문은 대한민국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이라는 더 큰 장소로 가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현식 동문이 던진 “‘한국’이란 시장은 작지만, 세계시장은 커요. 그렇기에 해외로 나아가 더 넓은 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필수예요”라는 말은 필자가 더 큰 우물로 나아가야함을 깨닫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대구로 향하는 버스에서 많은 생각이 들며 스스로가 너무 작은 존재라 느껴졌다. 필자는 졸업 후 지역에 있는 작은 일간지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한계를 작게 설정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었다. 정현식 동문은 필자에게 그 한계를 깨뜨려야 할 이유를 알려줬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그 장벽을 깨부숴서 한계를 이겨내야겠다는 용기도 함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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