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왕관을 쓰는 자에게
[시선] 왕관을 쓰는 자에게
  • 김달호 사회부장
  • 승인 2019.05.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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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은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 왕의 즉위식 날 휘황찬란한 왕관은 그날을 더욱 빛낸다. 하지만 왕관의 역할이 단지 그 화려함에만은 있지 않다. 물리적인 무게를 뛰어넘어 왕관은 그것을 쓰고 있는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갖고 있다.

 우리 시대에 왕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큰 책임감을 가진 ‘대표자’가 존재한다. 현시대에는 대의민주주의가 작동원리로 존재한다. 조선 시대나 중세 유럽처럼 ‘절대왕권’에 따라 통치가 이뤄지는 사회는 더 이상 아니다. 우린 우리의 손으로 대표자를 뽑는다. 대표자를 뽑을 때도 여러 후보 중 가장 선호에 맞는 후보를 뽑는다. 그리고 그 대표자는 우리를 대리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의 대표자를 보면 그 의미가 사뭇 퇴색돼 보인다. 지난달 국회가 보인 일명 ‘동물국회’는 우리가 뽑았던 대표자가 느낀 책임의 무게가 ‘과연 무엇을 위한 무게’인지를 설명하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들의 집합체를 위해, 그들의 집합체가 원하는 이익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대학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학생회가 그렇지 않지만, 그중 일부 학생회는 학생보다 자신 또는 자신의 집단을 위해 학생회를 존재할 뿐이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 대표자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대표자는 그들을 대표자로 뽑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과 그렇지 못할 때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 한다. 대표자에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집단을 위해 사과해야 할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단지 자신의 감성에 매몰돼 인정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 자세를 보인다면 그것은 대표자라고 보기 힘들다. 그가 잘못을 했든 아니든 필요하다면 집단을 위해 사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우리의 대리자를 앞에 내세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의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해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로 인해 자신의 집단이 점차 와해된다면 그것은 ‘위기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모든 대표자에게 말한다. “왕관을 쓰고 있는 그대는 왕관을 쓸 때부터 그 무게를 견딜 각오를 해야 했다”고, 그렇기에 “지금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그 무게를 견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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