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로를 거닌 사람] “보디빌딩 선수가 된 영어 선생님”
[천마로를 거닌 사람] “보디빌딩 선수가 된 영어 선생님”
  • 김채은 기자, 김달호 기자
  • 승인 2019.04.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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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학교의 전신 청구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서영갑 동문(영어영문학과56)은 40년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퇴임 후부터 현재까지는 보디빌딩 선수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그의 나이는 80대지만 몸과 열정은 20대 못지않다. 이에 서영갑 동문을 만나 보디빌딩 선수가 된 계기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저는 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1년 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교직 생활을 하면서 대학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당시에 청구대학이었던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가.

 제가 대학을 다닌 시절은 6.25전쟁 직후였기에 주변에 미군이 많았어요. 그래서 영어 회화를 위해서 미군과 대화를 하려고 자주 다가갔어요. 사실 원어민과 대화가 잘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대화가 안 되더라도 만나서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학창시절 중 기억에 남는 교수님이 있나.

 영어영문학과 학과장이었던 이정호 교수님과 셰익스피어를 강의하셨던 이석윤 교수님이 기억에 남아요. 지금과 마찬가지로 교수님은 학생 입장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분이었기에 그분들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마음 깊이 존경했던 분들이기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학창시절 이루고 싶었던 꿈 중 이루지 못해 아쉬웠던 꿈이 있나.

사실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던 이유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쉽게도 그 꿈을 이루진 못했어요. 한편으로 아쉬움도 있지만, 외교관 대신에 중·고등학교 교사가 됐어요.

 교사라는 직업이 만족스러웠나.

 교사라는 직업은 제 성향과 잘 맞았어요. 그렇기에 40년 넘게 교사로서 근무할 수 있었어요. 교사는 늘 제자가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도 수많은 제자가 생겼고, 스승의 날에는 전화가 오기도 해요. 그래서 저에게 교사 생활은 보람도 있었고, 만족스러웠어요.

 교사로 재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교는 어디인가.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 감천중학교가 있어요. 그곳은 제가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받은 후 발령이 난 첫 학교이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감천중학교에서 만난 제자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장 정이 많이 가요. 시골의 중학생이었던 제자들은 순진하고, 천진난만했어요. 그리고 사제간에 끈끈한 정이 있었던 학교였어요. 그때 만난 제자들은 최근까지도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하고, 때로는 직접 찾아와 인사하기도 해요. 그리고 1년에 한번은 특별하게 모이기도 해요.

 교사로 재직하면서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였나.

 제가 가진 영어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학생들이 저에게 배운 영어지식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했을 때 많은 보람을 느꼈어요. 제자가 저에게 잘 배워가서 칭찬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땐 스스로 보람도 느끼고 자부심도 느껴져서 기뻐요. 

 반대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약 10여 년간 고등학교 3학년을 맡았어요. 당시에는 아침 방송 수업도 있어서 새벽부터 출근했어야 했어요. 또한 야간자율학습이 있어서 학생들을 보내고 퇴근하면 오후 10시가 넘는 게 일상이었어요.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그렇게 약 10~20년 정도를 하니 건강이 악화되는 것이 느껴져 힘들었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새벽에 출근해 온종일 학생들을 지도하기를 10년 이상 지속하다 보니 허리와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기보다 아픈 허리와 무릎을 치료하기 위한 특효약을 찾다가 운동을 해 보자고 생각했죠. 혼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 보니, 아령 운동이 좋을 것 같았어요. 아령을 들고 앉았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했는데, 그때는 이것이 스쿼트인 줄도 모르고 했었어요. 그렇게 운동을 2년 이상 하고 나니 아픔이 사라졌어요. 운동을 통해 근육이 많이 생겨, 더는 뼈에 무리가 가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령으로 시작해, 점차 전문적으로 운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는 운동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전문적으로 운동할 수 없었죠. 그러나 퇴직 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퇴직 후에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999년 8월 31일 자로 퇴직한 후 사흘 후인 9월 4일에 곧바로 헬스클럽에 등록했어요.

 보디빌더 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은 언제인가.

 헬스클럽에 등록한 후, 관장님을 찾아가, 2달 후인 10월 31일에 있을 ‘미스터 대구 보디빌더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관장님이 제 몸을 살펴보시곤 제가 운동을 한 것은 알겠지만, 배가 튀어나왔다고 했어요. 관장님이 말씀하시길 “보디빌더가 되려면 몸은 말랐지만 근육은 잘 발달돼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2달간 지도를 받은 후 10월 31일에 대회에 출전했어요.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가.

 관장님께서 말씀하시길, 보디빌딩 대회에 나갈 때는 그냥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취할 포즈와 워킹 연습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남성은 7가지 자세를 취해야 해요. 그래서 낮에는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밤에는 보디빌딩 대회용 포즈 연습을 하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대회 준비를 했어요. 처음 제가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나이 들어서 주책없다며 아내가 반대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저는 꼭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리고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저는 50대 중년부 금상을 수상했어요.

 첫 대회부터 수상했기에 기뻤을 것 같다.

 트로피를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살면서 그때만큼 기뻤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받은 트로피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어요. 그 상을 계기로 해서 저는 수많은 대회에 출전했어요.

 우리나라 최고령 보디빌더라고 들었다.

 저는 우리나라 보디빌더로서 세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어요. 그 세 가지는 ‘3최’에요. 먼저 저는 우리나라 보디빌딩 선수 중 ‘최고령’ 선수예요. 또한 대회에 ‘최다 출전’했고, 상도 ‘최다 입상’을 했어요. 

 최다 수상이면 상을 몇 개 받았는가.

 트로피가 약 100개 정도이고, 메달은 100개 이상이에요. 그리고 상장도 수십 장이 넘어요. 처음에 상장을 받았을 때는 몇 장이 안 될 때였기에 액자 속에 넣어서 벽에 걸어뒀어요. 그러나 많은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상장을 넣을 액자가 부족해졌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트로피와 매달과 상장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방바닥에 두기 시작했어요.

 ‘2018 스파이더 얼티밋 챌린지 대회’, ‘코리아 갓 탤런트’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회 및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저는 이런 대회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와서 참여해 주기를 부탁했어요. 처음에는 거절하기도 했지만, 주최 측에서 제가 대회에 참여해 주길 간절히 요청했어요. 출연하다 보니 반응도 좋고, 저의 출연이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긍정적인 것 같아요.

 각종 대회에 도전하면서 느낀 것이 무엇인가.

 이런 대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영광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러한 도전을 함으로써, 실버세대들에게 저를 통해 운동의 중요성을 알리고,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어줄 수 있어 기뻐요.

 웨이트 트레이닝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는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대회 때마다 트로피를 수상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사담이지만 모임에 나가면 제 주변의 친구들은 허리가 굽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자세가 바르게 되었고, 그러면서 건강도 좋아졌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은 이제 저의 일상이에요. 저는 웨이트 트레이닝이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비법이 있는가.

 우선 근육운동이 기본이에요. 그리고 근육 운동만큼 중요한 것이 휴식이에요. 지나친 운동은 오히려 독이 돼 운동에 대한 애정을 감소시킬 수 있어요. 그리고 젊은 사람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해요. 근육은 쉴 때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운동, 영양, 휴식 이 3가지를 잊지 말아야 해요.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식단이 따로 있는가.

 저는 특별한 식단이 없어요. 저는 다른 보디빌더처럼 단백질이 많은 고기만 많이 먹지 않아요. 일반 사람들처럼 삼시를 꼭 챙겨 먹고, 제철 과일, 제철 채소, 약간의 고기 그리고 견과류를 먹어요.

 청년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무엇이 있나.

 가장 쉬운 것은 ‘스쿼트’예요.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는 것이기에 비교적 쉬워요. 스쿼트는 엉덩이, 허리, 무릎 건강에 좋아요. 바벨을 어깨에 얹거나, 아령을 손에 쥐고 하면 더 효과적이죠. 10번씩 5세트 하고 그다음 날은 쉬어주길 바라요.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가.

 특별한 목표는 없어요. 현재처럼 과욕하지 않고 꾸준하게 근육운동을 즐기고 싶어요.

 요즘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미루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겁내지 말고 일단은 도전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레짐작으로 겁낼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도전하면 반드시 문은 열린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대회에 출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영갑 동문의 모습
서영갑 동문의 방
일상 속에서 틈틈히 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
서영갑 동문과 그의 메달들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을 두고 ‘N포 세대’라고 지칭한다. 무엇이든지 일단 포기하고 보는 청년의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이 단어는, 같은 청년의 세대인 필자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필자도 많은 일을 하면서, 그와 함께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서영갑 동문은 ‘강렬한 열정’, 그 자체를 보여줬다.

 그는 인터뷰 내내 열정이 넘쳤다. 인터뷰하던 중 자신의 근육을 보여주기도 하고, 자신의 사진과 트로피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어떤 대회에서 수상한 트로피인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또한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자신의 헬스장으로 우릴 초대해 운동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말한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 그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그의 생활 패턴까지 바꾼 것이라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셨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 올해 80대를 살고 계신 그분의 끊임없는 열정과 도전은 20대를 살아가는 필자를 많이 부끄럽게 했다. 더 나아가 필자 본인이 도전을 겁냈던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겁내지 말고 도전하라” 그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말씀을 되새기며 인터뷰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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