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 김달호 기자
  • 승인 2019.03.04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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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일은 누군가에게는 쉬는 날이었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중요한 독립운동이 일어난 날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던 날이다. 그리고 당시 자신의 언어, 문화, 생활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조국 독립을 위해 목청을 높였던 날이었다.

1919: 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1919년 태화관에 모인 3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선언식을 거행했다.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과 같은 시간에 울려 퍼진 탑골공원에서의 외침은 향후 우리나라에 ‘3.1운동’이라 기억될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1910년대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에 있었다. 이는 자연스레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배경이 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차별적인 대우가 3.1운동이 일어난 원인이라고 말한다.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사회교육학과)는 “당시 일본의 차별적인 정책에 불만을 가진 학생, 노동자 등 일부 계층들에서 시작된 분노가 이후 3.1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일각에선 당시에 만연하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에서 공개한 ‘3.1운동 원인과 배경’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에선 항일민족 운동의 기운이 고조됐다고 설명한다.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 있는 태화관과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비롯한 남부지역과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등의 북부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됐다. 또한 간도 등 해외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3월 8일부터 만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3월 8일 서문시장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이만집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학생, 시민 등이 중부경찰서를 지나 당시 달성군청(현재의 대구백화점)까지 거리 행진을 통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3.8만세운동은 신명여학교, 계성학교 등의 학생들과 기독교계열, 불교계열 등도 합세한 종교와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이었다. 더불어 경북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1일 포항, 3월 12일 의성군으로 이어지면서 경북 전역으로 퍼졌다. 특히 3월 17일에 있었던 영덕군에서의 만세운동은 약 3천 명이 참여했다.

 하지만 1919년 4월 15일에 있었던 ‘제암리학살사건’을 비롯해 일본이 3.1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희생자도 연이어 발생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혈사」에 따르면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약 2백만 명이며, 이들 중 약 7천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일각에선 3.1운동의 여파가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임시정부는 한성(지금의 서울), 연해주 등에 있었으며,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김정인 교수는 “3.1운동이 이전에 없던 임시정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움직임이 3.1운동을 통해 더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그날의 숨결을 기억하다

 지난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에 3.1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정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기획했다. 또한 전국에 있는 도시에선 각자의 특성에 맞는 3.1운동 행사를 기획했다. 3.1운동이 100주년이 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3.1운동을 기억하고 있을까?

 신세대와 함께하는 행사=정부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100주년을 기념하고 시민의 참여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준비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위원회)를 발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태그로 보는 국민기념사업’이 있다. 이는 개인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장소, 독립운동가 등을 기념하는 동영상, 사진 등을 해시태그와 함께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캠페인이다. 이에 따라 2월 27일을 기준으로, 총 132명이 참가했다. 이외에도 온라인콘텐츠, 랩 영상 공모전 등도 함께 진행했다.

 한편 지난 1월 24일, 위원회는 기념 음원 ‘나의 땅’을 발표해 랩을 활용한 3.1운동 기념 활동도 하고 있다. ‘나의 땅’은 래퍼 비와이가 작곡·작사한 곡으로, 3.1운동 등 독립운동을 주제로 가사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위원회 측은 “이 곡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세련된 비트, 은유적 가사, 비와이의 독보적 발성, 감성이 모두 충실히 적용돼 역사성·예술성·대중성을 모두 잡은 노래”라고 전했다.

 지역의 색다른 기억법=서울시는 3.1운동을 기념해 서울광장에서 세종대로를 거쳐 광화문 일대까지를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행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했다. 이에 독립운동가 추모 전시, 오페라 등 문화공연, 현대미술 전시 등 다채로운 행사가 계획됐다. 또한 3.1운동 당시 역사적인 장소들은 각종 시민공간으로 조성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은 지자체 최초로 발굴해 추진해 온 지난 3년간의 사업을 완성하는 동시에, 미래 100년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또한 유관순 열사 등이 3.1운동을 했던 천안시에선 ‘아우내봉화제’를 개최했다. 이는 아우내장터와 유관순 열사 사적지 일원에서 개최했으며, 유관순 열사 사적지부터 아우내 독립만세 기념공원까지 1.4km 구간에서 만세 재현과 횃불행진을 하는 등 여러 행사가 함께 열렸다.

 대구에선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대구 애국보훈대상’을 제정해 시상했다. 또한 안동, 서울 종로구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우국시인 현창 문학제’를 개최한다. 이 행사를 통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등 항일 민족시인 대표 3인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우수 문학인을 발굴할 계획이다. 또한 경북에선 지난 1월부터 ‘100주년 기념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어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경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3.8 만세운동을 남긴 대구

 학생과 시민이 독립을 외친 곳=처음 찾은 서문시장과 그 일대는 대구지역의 3.8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었다. 서문시장 일대는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대고 있었지만, 독립운동의 기억이 남은 곳은 유독 한산하기만 했다. 처음 찾은 계성학교 아담스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앞에 현판이 없었다면 단지 오래된 건물로만 보였을 그곳은 많은 사람이 온 바깥에 비해 쓸쓸하기만 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인터넷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고, 그 장소가 단지 오토바이 골목이 시작되는 곳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을 뚫고 마주한 비석은 길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기만 했다. 비석에 새겨진 ‘대구 3.1운동발원지’라는 글자를 보며 쓸쓸함은 더욱 곱씹어지기만 했다.

 3.1운동계단에서 계산성당까지=다음으로 서문시장에서 시내로 더 들어왔다. 사실 우리가 대구에서의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3.1운동만세길’이다. 하지만 이곳은 실제로는 3.8만세운동 때 행진했던 곳은 아니었다. 단지 이곳을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에 속한 학생들이 오르고 내리며 3.8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이다. 서문시장에서 출발해 바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처음 가는 길이다 보니 계산성당을 거치는 먼 길을 택해 도착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좁은 길을 지나 계단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단지 아파트에 딸린 좁다란 계단이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고, 청라언덕을 지나 서문시장 쪽으로 향했을 때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면서 함성과 발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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