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천마문화상 - 가작(소설)] 꽃비(花雨)
[49회 천마문화상 - 가작(소설)] 꽃비(花雨)
  • 김성익(영남대학교 역사학과3)
  • 승인 2018.11.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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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前秦)의 세조(世祖) 부견(苻堅)이 사신을 보냈다. 사신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가 들고 온 상(像)은 누구도 본 적이 없으되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기운을 지닌 것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되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사내의 몸을 하고 있으되 성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형언할 수 없이 평온한 미소를 처음 본 고구려 왕실의 사람들은 마치 머나먼 하늘과 오욕으로 물든 땅의 더러움을 이어주는 사다리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한 마디로 여사 일이 아니었다.

 그 미소는 전염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인근에 절과 탑들이 솟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시 색다른 미소들이 빙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적인 감각이라고는 밭고랑을 얼마의 간격으로 긁어볼 것인가 궁리하는 것이 전부인 민초들도 그 미소에 빠져들었다. 개중에는 더러 임금님 닮은 것도 있더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자네가 나랏님 옷자락 티끌이라도 봤나?”

 그런 핀잔이 오고 갔어도, 사람들은 임금과 나라의 대신들이 이 새로운 바람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후에 서울이 평양으로 내려가고 거기서도 정릉사(定陵寺)와 금강사(金剛寺)의 불사(佛事)가 있었다. 대동강을 가로질러 탑에 매달린 풍경소리와 경문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물며 강산의 서쪽에서도 그 바람이 닿았다. 사람이 땅을 오가면 물건이 뒤따르고, 그들이 먹는 법, 입는 법, 즐기는 풍습이 두루 건너가기 마련이었다. 이미 백제에서는 한강 지류와 포구가 있는 쪽을 중심으로 물 건너 큰 땅과 고구려에서 건너 온 승려들이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서천축국(西天竺國)에서 온 승려도 있었다. 384년 한성 부근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도 천축 사람이었다. 백제왕 부여침류(扶餘枕流)가 건길지(鞬吉支)[≪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 백성들이 왕을 부르던 호칭이라 한다.]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진(晉)에 조공하였으므로 그 답례로 사신이 왔고, 마라난타도 사신을 따라 온 것이다. 이미 진 황실에서 마라난타의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건길지는 따로 자리를 내어 극진히 모셨다. 마라난타가 기거하는 곳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생전 처음 듣는 소리로 청아한 울림이 퍼지더라는 궁인들의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싫지는 않더라는 부연 설명이 붙었다.

 마라난타는 진 황실이 하사한 가사를 팔아서 책을 많이 가지고 왔다. 불상은 들고 오지 않았으나, 대신 그 자신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걸친 분소의(糞掃衣)는 본래의 재단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낡은 것이었으나, 왕궁 안에서도 빛이 바라지 않고 오히려 성자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조회가 끝난 뒤 건길지는 다과를 마련하고 마라난타를 불렀다.

 “얼마 전, 고구려에도 새로이 받드는 법(法)이 있다고 들었소.”

 “맥인(貊人)[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들이 모시는 법은 여래(如來)의 가르침입니다.”

 “그게 무엇이오?”

 마라난타는 건길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금방 왕위에 올랐으되 귀족들에게 힘을 펴지 못하는 상(相)은 무슨 상인가, 거기에는 제왕이 있는가, 고뇌하는 인간이 있는가. 마라난타는 짧게 노래하듯 말했다.

 “그 가르침에는 전하의 근심이 있으며(苦諦), 근심하는 이유가 있고(集諦), 근심의 소멸과(滅諦), 그 소멸에 이르는 길(道諦)이 있습니다.”
 건길지는 고개를 떨구었다.

 “과연 대덕(大德)이라.”

 “전하, 제왕의 업(業)은 무거운 짐입니다. 거기에는 아귀(餓鬼)들이 달라붙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 업을 지지 않으면 아귀들이 더 날뛰지 않겠는가.”

 “부디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하소서.”

 건길지는 마라난타의 통찰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어떤 나라 운영의 한 가지 계산이 돌아갔는지는 몰라도 그 이듬해, 한산 땅에 크게 불사를 일으키고 수계를 풀어 열 명의 불제자를 두게 하였다. 그 이후 조정이 시끄러웠다. 건길지가 사씨(沙氏), 목씨(木氏), 연씨(燕氏)를 비롯한 팔성족(八姓族)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났다. 건길지는 결국 불법의 덕을 보지 못하고, 한산의 불사가 있던 그 해의 겨울에 돌연 훙서(薨逝)하였다. 그러나 이를 시작으로, 섶에 불을 지르듯 불법은 백제 곳곳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옛 부여의 두 갈래 뿌리에서 번지기 시작한 새로운 바람은 달궈진 여름바람같이 되었다. 사람들은 지고한 깨달음을 담은 그 표정, 고통에서 해방된 눈동자를 다듬고, 상을 깎고, 새겼다. 흙이 부처가 되고, 나무가 부처가 되고, 돌이 부처가 되어 산천에 깨달음 없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것이 손에 익자 이제는 구리를 부어 만들기도 했다. 절에서 경문은 보물처럼 취급되었고 이를 알고 설하는 승려들은 어디를 가도 스승으로 대접받았다.

 태백산의 이남은 그 모든 소동이 먼 동네의 잔치인 양 조용하였다. 여기에도 믿음은 있었다. 산과 하늘에 그 믿음이 있고, 별에 있고 물에 있었다. 그리하여 믿음을 위해 많은 것을 잡아다 바치고, 빚어서 바치기도 했다. 길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간혹 중들이 다녀가기도 했지만 영 맥을 못 추는 것이었다. 진한(辰韓)의 땅에 내린 뿌리가 그리도 깊었다. 

 그 뒤 약 140여년 후, 신라의 수도 서라벌(徐羅伐)-

 염촉(厭髑)은 소매를 정갈히 하고 관모를 바르게 썼다. 수염이 이제 거뭇거뭇 돋았으나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은 누가 보아도 애송이라는 소리가 나올 법 하였으나,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 야광주가 빛나듯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렴 무엇을 해도 한다’며 동네에서는 이미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은 터였다.

 “사인(舍人) 박가(朴家)가 왔다고 아뢰어 주시오.”

 돌계단 위에 선 궁인이 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문 좌우로 선 시위(侍衛)들은 시선은 앞으로 둔 채, 이 대화에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궁인은 좌우를 힐끗 돌아보고 안으로 종종 걸음을 사라졌다. 염촉은 흐트러짐 없이 서서 기다렸다. 이를 보는 시위들의 몸이 오히려 배배 꼬이는 것이었다. 오래 서있어 보아라, 니도 그러하니라하고 마음속으로 그러한 농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것을 마른 침과 함께 삼켰다.

 “전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염촉이 궁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형 탁자 위에 계룡(鷄龍)을 수놓은 비단 탁보(濁甫)가 등잔불빛을 받아 옅은 붉은 색으로 방안을 물들였다. 그 위에는 주배와 더운 김을 뿜는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큰 키의 중후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의 앉은키는 서 있는 염촉에 뒤지지 않았다. 그 풍채에 걸맞게 수염이 보기 좋게 자라 윤을 내고 있었다. 낯빛 또한 온화했으나 등잔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빛에는 그다지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가 바로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이었다.

 염촉이 크게 허리를 굽히려 하자 사내가 일어서서 말렸다.

 “격식일랑 말아. 그저 앉게, 앉아.”

 “매금왕께서 이러시니 몸 둘 바 모르겠나이다.”

 “글쎄……”

 매금왕은 고집스럽게 염촉의 소매를 끌어 당겨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장신인 탓에 매금왕은 탁자에 다리를 집어넣기가 불편한지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다.

 “모그내(蚊川)[경주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남천(南川)의 이명] 물을 떠 오라 하여 말린 도자(桃子)[복숭아를 이르는 옛 말]를 넣고 끓인 것일세.”

 매금왕이 주전자를 들었다. 염촉이 소매를 걷고 공손히 주배(酒杯)를 들었다. 주전자가 고개를 숙이자 뜨거운 김을 뿜으며 고로로 흘러 주배를 채웠다. 물방울이 튀어 탁보에 수놓인 계룡의 눈알을 적셨다. 눈동자를 얻은 계룡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염촉은 주배를 들어올리고 ‘황공하여이다’를 내뱉으려다가 매금왕을 의식하고서는 다른 말로 바꾸었다.

 “삼세의 모든 부처들(三世諸佛)은 우리 매금왕을 도우소서.”

 더운 김이 염촉의 코를 타고 들어왔다. 이내 뜨거운 물이 목을 타고 죽죽 넘어갔다. 뜨신 기운이 속을 돌았다. 매금왕이 다시 주전자를 들어 보였다. 염촉이 급히 다시 주배를 내밀었다. 아까보다는 미지근한 물이 주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물 따르는 소리가 불빛과 함께 방 안을 채웠다. 매금왕은 주전자를 내려놓고 손에 튄 물을 소매에 닦았다.

 “이미 퇴궐한 사람을 부르니, 몹쓸 짓이라”

 “종숙부께서 부르시니 오고, 제 맡은 바가 원래 그러하니 그저 다 할 뿐입니다.”

 “답답해서 불렀지. 그저 마음만 같아서는 속에다 모그내를 들여놓고 싶구만.”

 염촉이 헤아리기로, 매금왕의 그 말은 답답한 것을 씻기어 보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매금왕은 며칠간 각 부(部)의 우두머리인 간지(干支)들을 불러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열었다. 사탁부(沙啄部)를 다스리는 갈문왕(葛文王)이자 당신의 아우님인 사부지(徙夫知)는 물론이고 각 간지들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사인(舍人)의 직위로 매금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염촉은 누구보다 매금왕의 심중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매금왕은 탁부(喙部)[급량부(及梁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중고기의 매금왕(왕)들은 모두 이 탁부 출신이다.]의 우두머리면서 모든 부를 대표하는 위치였으나, 갈문왕 및 간지들과 기싸움을 하면서도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던 것은 전통의 탓이다. 우리 풍습은 사로(斯盧)의 여섯 씨족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르는 것으로, 우두머리를 모아놓고 회의를 열 되,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다른 말이 나오면 그 결정은 물 건너 간 것이었다. 때문에 각 부 수장들의 발언권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금왕이 눈에 핏대를 세우며 그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매금왕도, 염촉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매금왕은 생각에 잠긴듯 했다. 염촉은 일렁이는 등잔불빛 너머를 바라보았다. 매금왕이 즉위하던 그 날의 기억이 흐릿하게 올라왔다.

 형형색색의 휘장과 장식들 아래에 굽은옥(曲玉)이 출렁이는 금허리띠와 금관을 쓰고 걸어오던 크고 당당한 풍채의 젊은 매금왕의 모습은 당시 어린 염촉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아우 사부지가 뒤를 따랐다.

 ‘매금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 사방에 미치도록 하여이다(德業日新 網羅四方)’ 곳곳에서 등극을 소리 높여 축하하였다. 궁실 안팎으로 가축과 들짐승의 고기가 드나들고 지지고 볶는 내음이 가득 찼다. 바다에서는 귀한 상어고기가 진상되었다. 왕은 고기를 먼저 나정(蘿井)의 거서간(居西干) 신궁에 먼저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나머지는 나력산(奈歷山), 골화산(骨火山), 혈례산(穴禮山)과 천경림(天鏡林)으로 보내 항아리에 담아 압량(押督)과 비화(非火), 음즙벌(音汁伐) 등 주변의 우두머리들에게 보냈다.

 새 임금의 포부는 당찼다. 어린 염촉의 눈에 비친 모즉지 매금왕의 얼굴은 영웅의 상이었다. 월성(月城)의 자극전(紫極殿) 앞에 선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나는 덕이 없는 몸으로 이 자리에 오르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어그러뜨리고 아래로는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제 막중한 일을 하려 하니 어찌 이를 바로 잡지 않겠는가.”

 왕은 갈문왕과 간지들을 청송산(靑松山) 별전(別殿)에 모았다. 자신의 포부와 정책에 대해 운을 떼었다.

 “돌아가신 부왕께서는 우리나라의 제도를 바로 하시고, 그 위엄을 사방에 떨치셨소. 심지어 바다 건너의 우산국(于山國)도 우리에게 귀속하니 실로 가슴이 벅찬 일이었소.”

 간지들의 눈짓이며 흥흥 거리는 모양새는 임금과 정사를 보는 모습이라기보다, 철부지의 재롱을 보는 노인의 그것과 같았다.

 “나라 살림이 커졌으나, 옛 법식에만 고집해서야 제대로 된 운영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부왕의 유지를 이을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폐단을 바로 잡고 신국(神國)의 도(道)가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 왕은 나말(奈末)을 시켜 목간을 가져오게 했다.

 “혁거세 거서간께서는 하늘에서 내오셨으니 우리나라의 신성(神聖)은 거기서 유래하는지라 지고의 뜻으로 받들어 모신지가 오래 되었소. 허나 그 정도가 심하여 제사에만 많은 재물과 짐승이 쓰이고 심지어 사람까지 죽여 바치니 이 참상을 보다 못한 부왕께서 이를 금하셨소.”

 왕이 목간을 집어 들어 보였다.

 春 三月 下令禁殉葬 諸部卽行
 (봄 삼월에 명을 내려 순장을 금하니 모든 부는 즉시 행하라)

 본피부(本彼部) 간지 사노(司老)가 말했다.

 “선왕과 저희들이 모여 그렇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매금왕께서는 지금 이렇게 우리를 불러 모아 돌아가신 선왕의 글을 보여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매금왕이 말했다.

 “사람이 나고 자라 제 할 일을 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며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지 생각해보시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서 내리는 지고한 것이오. 부왕께서는 그 숭고한 뜻을 불법(佛法)을 들어 아시고 크게 감복하셨소.”

 좌중이 술렁였다. 여러 말이 오고갔다. 매금왕은 나마를 시켜 다른 것을 가지고 오게 했다. 낡은 책 한권이었다.

 “구자국(龜玆國) 승려 구마라집(鸠摩罗什)이 진(秦)나라에서 한어(漢語)로 옮긴 불경이외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오.”

 참으로 생소하기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왕은 책을 펴고 서품의 한 구절을 읽었다.

若人遭苦 厭老病死 爲說涅槃 盡諸苦惱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에 빠져서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을 멀리하려 한다면,
그들 위해 열반을 설하시어
모든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소서)

 매금왕이 말했다.

 “임금이 어버이가 되어 백성을 이끌지는 못할망정, 돌아가실 때에도 그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 경의 구절은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있소. 참으로 우리가 배울 바 아닙니까? 이미 한(漢)과 진(晉)은 물론이고,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불법을 받든지 오래 되었소. 우리도 이 훌륭한 뜻을 나라의 으뜸으로 삼아서 널리 가르치려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량부(漸梁部) 간지 물복해(勿伏解)가 앞에 놓인 주배를 쏟았다. 궁인들이 달려들어 엎질러진 술을 닦고 깨진 주배를 가져갔다. 물복해가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허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입니까? 매금왕의 뜻은, 우리가 모시던 풍습이며 제사를 다 버리라는 뜻입니까?”

 매금왕이 말했다.

 “다 버리자는 것이 아니오. 새로운 가르침이 참으로 우리에게 좋으니 그것을 취하자는 것인데 어째서 말이 그렇소.”

 물복해가 대답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신국에는 신국에 걸맞은 도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에 와서 갑자기 석가씨(釋迦氏)의 괴설을 운운하시니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매금왕께서 즉위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천경림과 산천에 큰제사(大祀)를 지낸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이옵니다. 조상과 신들이 노할까 두려우니 말씀 거두십시오.”

 “좋은 뜻을 받아서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오?”

 “석가씨가 하는 말이 하나같이 우리의 도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석가씨의 신을 모시는 말이지 우리의 신을 모시는 도리가 아닙니다.”

 석가씨의 괴설이란 각 부의 수장과 궁중의 대신들이 불법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었다. 왕의 오른편에서 이 실랑이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두 사람은 낯빛이 어두웠다. 그 둘은 선대왕 때부터의 원로였던 사탁부의 태아간지(太阿干支)[신라 17관등 중 5번째인 대아찬(大阿飡)의 이명] 공목(工目)과 아간지(阿干支)[신라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飡)의 이명] 알공(謁恭)이었다. 둘은 서로 난처한 표정으로 힐끗 힐끗 보다가 결국 공목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소지(炤知) 마립간 계시던 때에,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진 일이 있습니다만, 지금 흉물로 남아 있습니다. 매금왕께서 석가씨의 법을 들먹이면 중들이 좋아 날뛰고 곳곳에는 그 흉물스러운 것들이 생길 것입니다.”

 매금왕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천경림에 있는 흥륜사는 비처(毗處) 마립간께서 모례(毛禮)에게 직접 허락하셔서 지은 것이오. 부왕을 모셨던 그대가 조정의 일도 모르시오?”

 알공이 이를 받아쳤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것을 공론화 한 분은 없었습니다. 이는 선왕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선왕은 사람을 더는 죽여 묻지 말라고 했지, 석가씨의 법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매금왕이 경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보시오, 그런 하교가 있으신 까닭이 이 구절에 들어 있소. 불법을 우리의 으뜸가는 법으로 삼자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외다. 선왕께서도 뜻이 있으셨으나 차마 때가 허락하지 못해 가슴에만 품으시고 돌아가신 것이오.

 불법을 숭앙하자는 것은 이처럼 선대왕의 유지를 잇는 일이며, 기존의 우리가 신을 모시는 제사의 폐단을 줄이고자 함이오. 또한 그 가르침이 인간사의 도리를 지극히 권장하니 백성들을 교화하고 이끄는데 이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오.

 나는 이제 여러분들의 대표로서, 그리고 신라의 왕으로서 해야 할 일 중 첫 걸음으로 이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니 부디 좋도록 논해 주시오.”

 공목이 말했다.

 “그러면 대관절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먼저, 나라의 큰일에 지내는 제사를 빼고 신궁에 지내는 작은 제사와 점복을 묻는 일, 추수 때 신궁과 그 일대를 다스리는 부에 곡물을 헌납하는 차차 줄일 것이오. 그 다음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절을 왕경 일대에 지을 생각이오.”

 공목은 고개를 저었다.

 “중들은 매금왕을 끼고서 절을 지을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들어주게 되고, 둘을 들어주면 넷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절을 짓는데 삼산오악(三山五岳)의 나무가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간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사부지 갈문왕도 이렇게 말했다.

 “매금왕께서 오래 믿던 일을 갑자기 바꾸려 하시니 이리들 나오는 것입니다. 절을 짓는 일은 그만 두시지요.”

 모즉지 매금왕은 즉위한 처음부터 쓴 패배를 맛보았다. 왕을 수행하며 일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아버지는 염촉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업은 이와 같이 외로운 길이다.”

 그 말을 듣고 고독한 모즉지 매금왕의 심중을 생각해보니 어린 염촉은 저의 일 인양 가슴이 저리는 것이었다. 염촉은 대관절 이렇게 반대가 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버지에게 물었으나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를 보던 어머니가 옆에서 염촉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임금님의 일을 아직 네가 알기에는 이르다. 허나 명심하거라. 네 증조부께서는 내물(奈勿) 마립간(麻立干)의 자손으로, 걸해대왕(乞解大王)이시다. 네 조부님인 종(宗)께서도 역시 웅걸(雄傑)하신 분으로, 아진찬(阿珍飡)[신라 17관등 중 4번째인 파진찬(波珍飡)의 이명]을 지내셨다. 아버님 역시 나라의 중대사를 보신다. 이와 같으니 너는 왕족의 일원임을 기억하고 장래의 큰일에 나서야 할 각오를 다져야 마땅할 것이니라.”

 걸해대왕의 이름은 습보(習寶)로, 갈문왕을 지냈으며 지증(智證) 마립간의 아버지였다. 따라서 습보는 염촉의 조부와 형제 사이이며 그 가계에 따라 모즉지 매금왕과 염촉은 당숙 사이였다. 그가 사인 벼슬을 하며 매금왕을 곁에서 모시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염촉은 아버지를 따라 궁에 몇 번 들어간 적이 있으며, 이 때 마다 지증 마립간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아기가 오는구나.”

그리고 모즉지 역시 염촉을 어여삐 여겼다.

 “네 크면 나를 도와줄 테냐?”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 사인 박염촉은 지금 매금왕의 곁에 있다.

 “어찌 할까.”

 염촉의 눈은 자극전에서 노닐던 어린 시절에서 훌쩍 뛰어넘어 다시 지금 마주앉은 탁보 위의 등잔 불빛에 고정되었다. 무엇을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묻기 전에 매금왕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도 절 짓는 일에 대해서 논했더니 기를 쓰고 반발하더구만. 어찌 할까.”

 믿음의 문제는 결국은 이익이 섞인 문제다. 그들의 밥줄을 건드니 그들도 밥을 빼앗긴 짐승처럼 날을 세우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점을 치는 신령한 곳이 모두 각 부의 땅이요 그 제사장도 각 부의 간지들이라, 그들은 제사를 지낸다며 곡식도 가져오고 짐승도 가져오고 열매도 가져온다. 사람을 부리고 제 뜻하는 일을 하늘을 빌어 성취한다. 이 단단한 벽을 어찌 허물 것이냐. 무엇으로 두들기겠느냐. 두들기면 금이라도 가겠느냐. 매금왕은 염촉에게 이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염촉은 왕의 측근이나, 누구의 우두머리도 아니요, 권세를 부려본 바도 없다. 이 가냘픈 젊은이에게 기대할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석가모니불’ 염촉은 염불이라도 외고 싶었다. 매금왕은 지긋이 웃었다. 제가 모르는 답을 어린 조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매금왕은 그 날 있었던 일을 몇 가지 더 묻고, 염촉을 돌려보냈다.
 
 염촉이 집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인기척이 나자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이제 오느냐. 임금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느냐”

 “큰일은 아니고, 국사를 논한 문제로 답답한 심정을 풀고자 하실 뿐이었습니다.”

 “근심이 많으시니 우리도 걱정이다. 어쨌든 피곤할 테니 어서 쉬어라.”

 염촉이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려 할 때, 옆방의 불이 켜진 것을 보았다. 염촉은 들어가다 말고 불이 켜진 방 앞에 섰다.

 “주무십니까?”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염촉이 두어 번 더 여쭈었으나 대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문을 등진 채 앉아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머리는 상투를 틀었으나 제대로 묶지 않아 희끗한 회백색의 구레나룻과 앞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옷은 깨끗했는데, 염촉의 어머니가 새로 지어다 입힌 덕이었다. 사내는 손을 양 무릎에 얹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염촉이 다시 조용히 나가려 하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박 처사는 어디를 다녀오시나?”

 “매금왕께서 부르셔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근심거리가 많나 보군.”

 “예, 불법을 나라에서 받들자니 부의 수장들의 반대가 심합니다.”

 “박 처사.”

 “예.”

 “천경림에 훈화초(薰華草)[무궁화의 옛 말]들이 많던데 꽃이 피었나?”

 염촉은 천경림에 있는 왕버들이며 느티나무, 소나무 등을 떠올렸다. 막상 꽃을 본 기억을 더듬으려 해보았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천경림에 가 본 일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꽃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염촉은 대답을 기다렸다. 이 사내는 자신을 다만 보혜거사(報惠居士)라 칭할 뿐으로, 고구려에서 불법을 배웠노라 말할 뿐이었다. 염촉이 불법을 배운 것도, 이 보혜거사를 통해서였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보혜거사는 머리를 기르고 더럽게 해 다니며 낮에는 동냥질을 하고 저녁에는 염촉의 집에서 머무르며 몰래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데려와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글 쓰는 법, 읽는 법도 조금씩 가르쳤다.

 “아무리 못나도 까막눈은 짐승 신세를 못 면하는 법이라.”

 보혜거사가 늘 하던 말이었다.

 염촉은 스승이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리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염촉이 정신을 차렸을 때, 보혜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염촉이 방을 다시 살펴보니 보혜거사가 쓰던 책상 위에 글자가 몇 줄 새겨진 것을 보았다.
 
 꽃 이파리가 바위를 닳아 없애는데 한 겁(劫)이라
 꽃이 다 지기 전에 저 바위를 누가 닳아 없앨까나

 염촉은 그 뜻을 도통 알 수 없었다. 염촉은 보혜거사가 늘 하던 대로 동냥을 하러 일찍이 나갔거니 생각하고 옷을 추스르고 입궐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보혜거사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으나 역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염촉은 결국 보혜거사 대신 그가 쓰던 탁자를 끼고 앉았다. 며칠간 염촉의 방에서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밤이면 염촉은 보혜거사가 남긴 글귀의 뜻을 곱씹었다. 꽃잎이 어떻게 바위를 없앨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단 것인가? 꽃잎이며 바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새벽녘이 되어 염촉은 비몽사몽이 되었다. 꿈인지 환영인지 천경림이 보이는 듯 했다. 천경림의 저 편에 절간이 보였다. 그 옛날의 흥륜사인 것 같았다. 흥륜사는 앓고 있었다. 묵호자가 세운 신라 최초의 가람은 당대에 잠깐 번성하였다가 곧 천신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다시 우거진 숲의 흉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는 것이었다. 여름에 피는 꽃, 대관절 꽃이 갑자기 보이는 것은 무어냐……. 이 때 염촉은 보혜거사가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훈화초! 그 이름이 갑자기 머리를 때리듯이 크게 울렸다. 염촉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염촉은 홀린 듯이 일어섰다.

 집을 나와 내달은 방향은 월성 동쪽이었다. 거기에 천경림이 있었다. 예사 사람의 모양이 아니라 반 쯤 정신이 나간 형태로 달리고 또 달렸다. 염촉의 옷과 머리가 다 헝클어졌다. 숲 입구에 섰다. 숲 안에서 짙게 우러나오는 어둠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곧 그 사이를 파고들어 오래 묵은 왕버들의 험상궂은 굴곡들을 헤집고 다녔다.

 서라벌의 민가에서 새벽닭이 울기 시작하면서 여명이 이 늙은 숲의 가장자리부터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촉은 아직도 어둠과 여명 사이에 서서 가쁜 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기를 수십 분, 마침내 염촉은 허물어져가는 옛 절터의 앞에 섰다, 어릴 때 왕실의 제사를 지내러 온 아버지를 따라 오면서 보았던 그 장면 그대로였다. 그리고 잠결에서 본 것처럼 절 뒤에는 훈화초가 만발해 있었다. 흰 바탕에 불그죽죽한 저 꽃 이파리들……. 염촉은 뜨거운 눈물을 죽죽 흘렸다. 다리의 힘이 풀리어 풀숲에 털썩 엎어졌다. 이슬 맺힌 흙냄새가 코를 적셨다. 숨이 가쁘게 떨리고 사지가 피로하였으나 오히려 염촉의 정신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함께 새롭게 솟으면서 주먹 쥔 손에 힘이 부르르 치미는 것이었다.

 며칠 후, 다시 매금왕을 만났다. 자기가 조카를 불렀으면 불렀지 제 쪽에서 먼저 나를 뵈옵겠다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첫 마디가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전하, 불사를 허락하옵소서.”

 “대관절 네 하는 말이 다 무엇이냐.”

 “전하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큰 일이 있지 않고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천경림은 우리 신라에서도 실로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곳이며, 왕성 인근에 붙어있는 곳이라 그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때문에 그 옛날 고구려승 묵호자가 이곳에 절을 지은 것이며 거기서부터 불법이 이 땅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희망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첫 번째로 때를 잘못 만난 것이고, 두 번째로 깊은 믿음을 바꾸는데 큰 충격이 필요함에도 그와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사를 허락하면 저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너 또한 그냥 두겠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왕명을 참칭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키겠습니다. 간지들이 몰려와 따지면 저를 왕명을 거역한 죄를 물어 참하십시오. 간지들은 그 위엄에 함부로 전하의 일에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매금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엎드린 염촉을 일으켜 세워 그 손을 잡았다. 매금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카야, 내가 아무리 이 나라 임금 노릇을 한다지만 무슨 부귀를 누리자고 너를 희생하겠느냐? 내가 그 일로 오랫동안 고심해왔고 묵은 숙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다.”

 염촉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재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종숙부님을 곁에서 모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딱히 이룬 공이 없었습니다. 또한 제가 믿는 훌륭한 가르침이, 그 속에 깃든 아름다운 가치가 날개도 펴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왔다는 이유로, 낯설다는 이유로 이렇듯 홀대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을 허물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제가 그것을 이룰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제가 이 땅에 나고 자란 인연과, 전하와 당숙과 조카사이로 만난 인연, 그리고 불법의 가르침을 받은 인연도 모두 제가 할 일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인 박염촉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종숙부님.”

 매금왕은 염촉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크면 나를 도와줄 테냐?’,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젊은 날의 자신과 어렸던 염촉이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당돌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네가 보살(菩薩)이구나. 네가 나를 살리는구나…….”

 조카와 종숙부가 엎어져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이튿날, 궁성 동쪽에 갑자기 역부들이 모여들었다. 정과 망치, 도끼 등 연장을 가져다 날랐다. 희멀건 젊은이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녜녜 거리면서 천경림의 가장자리부터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백성들이 경악을 하고, 그 다음으로 이 소식을 들은 각 부 간지들의 외마디 소리가 곳곳에서 날카롭게 하늘을 찔렀다. 간지들은 휘하의 대오(隊伍)며 일벌(一伐)이며 파일(彼日) 등 휘하 권속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월성을 포위하듯이 몰려왔다. 사부지 갈문왕은 사색이 되어 달려와 매금왕을 찾았다.

 “형님은 진정 나라를 뿌리 뽑으려는 것입니까?”

 “무슨 소리냐?”

 “천경림이 베여나가고 있습니다. 간지들이 자극전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기세입니다.”

 매금왕은 갈문왕과 함께 자극전으로 이동했다. 각 간지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매금왕을 쏘아보았다. 이 사단이 난 것은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며 철회 여부에 따라 당신의 운명이 오늘 끝날 것이외다― 머릿속으로 말이 읽히는 듯하였다. 공목과 알공이 번갈아가며 침을 튀겼다.

 “매금왕께서 정녕 흉악한 짓을 명하셨소이까?”

 “글쎄, 나도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이다.”

 “천경림을 베어 그 나무로 절을 짓는다 합니다!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어떤 벼락 맞을 놈이?”

 이쯤 되자 간지들이 도리어 당황하였다. 갈문왕도 도통 갈피를 못 잡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내린 명이 없거늘 누가 감히 성지를 훼손한다는 말인가? 갈문왕은 각 부의 병사들을 끌고 오시오. 나는 시위들을 데리고 직접 천경림으로 갈 것이오.”

 매금왕의 행차는 전장으로 나서는 모양새와 같았다. 시퍼런 창칼이 번뜩이고 기다란 포승줄을 매고 지고 갔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와 계룡을 수놓은 깃발을 세워 길게 길게 줄을 세워 갔다. 백성들은 생업을 다 치우고 나와 이 광경을 보러 모여 들었다. 여기에 각 부의 간지들의 권속과 그 병사들까지 모여들면서 커다란 회전(會戰)이 벌일 듯하였다.

 매금왕은 흥륜사 앞의 벌목 현장에 들이닥쳤다. 인부들은 병졸들의 손에 잡혀 전부 매금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병사 둘이 염촉을 붙잡아 왔다. 염촉은 억센 손에 이끌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매금왕의 표정은 싸늘했다. 매금왕이 물었다.

 “너는 사인 염촉이 아니냐.”

 “그러합니다.”

 “누가 이따위 짓을 시켰느냐.”

 “제가 왕명을 받들었다 말하고 이리 시켰습니다.”

 “발칙한 놈!”

 매금왕이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염촉 앞에 섰다. 장신의 매금왕 앞에 선 염촉은 한 없이 작아보였다. 매금왕의 얼굴은 분노로 심각하게 일그러져 흡사 식사를 앞 둔 야차의 얼굴과 같았다. 매금왕이 알공에게 외쳤다.

 “임금의 말을 참칭하는 자는 어떤 벌로 다스리는가?”

 왕의 서슬에 알공이 더듬더듬 말했다.

 “목을 벱니다.”

 매금왕이 시위들에게 눈짓을 했다. 시위들이 미리 준비한 큰 칼을 가져왔다. 매금왕이 크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사인 박염촉은 나의 총애를 입고서도 제 몸을 삼가지 않고 교만하여 함부로 왕명을 참칭하였다. 이에 나는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질서를 세우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온 천경림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듣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왕이 법을 어긴 자에게 그 법을 행한다. 이 보다 정당한 자리가 어디 있으며, 그 만큼 왕의 정당한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 염촉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염촉이 좌중을 둘러보자 앞에 선 간지들과 권속들이며 병사들이며 저 멀리서 귀로, 눈으로 이를 지켜보는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매금왕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있었다. 이로서 왕의 위엄은 살 것이다. 매금왕은 이제 비로소 대왕이 되실 것이다. 또한 묵은 것이 걷히고, 새로운 가르침이 시작될 것이다. 대왕의 이름으로 절이 세워지고 부처님의 법이 신라 땅을 살릴 것이다.

 칼날이 염촉의 목 뒤에 섰다. 매금왕이 말했다.

 “할 말이 있느냐?”

 염촉은 매금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제가 뜻이 너무 간절하여 함부로 대왕의 명을 칭하였나이다. 죄를 달게 받을 것이되 가족은 용서하소서.”

 그리고 다시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매금왕은 이를 막지 않았다. 염촉은 하늘을 우러르고 팔을 쭉 뻗었다.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염촉의 소배가 휘날렸다. 염촉

 “내가 뜻으로 죽으니, 천지가 반드시 알 것입니다.”

 매금왕이 말했다.

 “베어라.”
 
 시위가 칼을 번쩍 들었다. 염촉은 눈을 감았다. 흥륜사의 훈화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꽃이... 꽃이 떨어지고 있군요…….”

 살을 찢어나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휘감겼다. 염촉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곧 염촉의 목이 떨어졌다. 이 때, 갑자기 크게 바람이 불었다. 여름 아침의 햇살이 뿜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나오는 염촉의 피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흡사 흰 젖과 같은 색이었다. 동시에 흥륜사 뒤 쪽에서 갑자기 꽃잎이 무수하게 바람을 타고 사람들을 향해 쏟아졌다.

 “웬 꽃잎이…….”

 사람들은 햇빛과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들이 손을 눈으로 가려가며 본 염촉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되 꽃비를 타고 승천하는 것 같았다. 오오- 오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매금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금왕은 저 멀리 사라져가는 염촉의 혼백을 보는 것처럼 젖은 눈으로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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