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천마문화상 - 가작(시)] 저 골목의 어귀에는 초원을 파는 정육점이 있다
[49회 천마문화상 - 가작(시)] 저 골목의 어귀에는 초원을 파는 정육점이 있다
  • 이서진(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3)
  • 승인 2018.11.26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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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골목의 어귀에는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정육점이 있다
얇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붉은 속살을 본다
뜨거워 보이는 빛깔 사이에 촘촘히 박힌 마블링
수많은 노을을 삼켜낸 소의 내부로
초원을 가로지르던 강줄기가 뻗어있다
스쳐온 길들의 풍경을 가둬둔 지도처럼
차갑게 식은 살결을 따라 아직도
내부에 고여 있던 바람들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그 틈새로 지난 발자국들이 이어지고 있을까

옛 유목의 삶들을 그 지도를 읽는 경건한 방법을 알았는지
그들은 결코 길을 잃는 법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거쳐 왔던 수많은 길들을 쌓아가며
발굽을 조금 더 반짝이는 일
저 지도를 따라 여행하고 싶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자르는 사내의 손에서
날카로운 저녁이 번쩍이고 있다
토막 난 고기의 무게를 재는 사내의 눈동자로
밤의 귀퉁이로 스며드는 노을이 스며들고 있다
어쩌면 사내도 자신의 깊은 구석에
네온사인을 타고 흐르는 바람과 붉은 길들
그곳을 걷는 수많을 사람들의 행적을 빠짐없이 기록했는지
빛바랜 앞치마에 땀을 닦는 사내의 그림자가
도마 소리를 따라 한 뼘씩 길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직 달릴 수 있다는 듯
저장해온 반짝임을 불길에 거침없이 내던진다
뜨거운 김들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누군가의 지도를 위해 솟구치고 있다
저 멀리 고향이라도 회상하는지
쓰레기통을 뒤지던 늙은 짐승이 울었다
초원의 어귀가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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