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 천마문화상 - 대상(소설)] 비행하는 밤
[49회 천마문화상 - 대상(소설)] 비행하는 밤
  • 엄수현(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3)
  • 승인 2018.11.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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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나의 아래층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은 학기가 시작되고 두 주가 지나서였다. 반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교는 나의 정체(停滯)를 비웃기라도 하듯 낯설게 변해 있었다. 살아갈 공간을 구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학교의 낡은 기숙사는 학점이 변변치 않은 고학년을 받아줄 정도로 관대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몇몇 민간 학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동산을 전전했고 여의치 않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한 곳은 대학이라는 단어의 어감과 지나치게 괴리된, 음침한 건물의 5층 방이었다. 거친 날씨에 얼마나 닿았을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는 외벽, 책상과 침대가 나란히 놓이면 꽉 차는 내부 공간이 나에게 허락된 세계였다. 하지만 결국 이곳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의 방에 가장 처음 방문한 사람은 박이었다. 그는 내 학과 동기였고 내가 친밀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돈을 주고 감옥을 샀네. 현관을 열자마자 그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의 화법은 예전부터 마음에 들곤 했다. 서랍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놓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건물 이름이 XX라고 했지.” 그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짧은 통화 끝에 그가 말했다.

 “여기에 강이 살아. 소문으로는 4층일걸.”

 사실 강과 내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쉽게 섞이기 힘든, 왠지 나의 세계 너머에 사는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학과의 대표였고 단과대 학생회의 간부였다. 자신을 상대방에 맞추는 데에 능숙했고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그래서 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질투 섞인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끔 나는 그의 성(姓)이 强인지 江일지에 대한 이상한 호기심을 가져볼 때가 있었다.

 나는 돋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허물없는 관계’나 ‘깊은 대화’ 따위에 대해 이유모를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관계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강과 나는 마주쳤을 때 어색하지 않은 인사를 건넬 수 있을 정도의 사이만을 유지했다. 그러니 내가 강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여느 동기들처럼 시간을 핑계로 자연스레 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과의 마지막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비가 내리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말 시험의 마지막 날이었고 종강 기념 술자리가 있었다. 학과의 대표였던 강은 동기들을 단골 술집으로 이끌었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진부한 이유를 대고 빠져나갔을 자리이지만 그날따라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근래에 있던 작은 경사 때문이었다.

 경사라 함은 나의 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신예 작가를 찾는 문학상이 그 전 달에 있었고 별 기대 없이 출품한 나의 소설은 단편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몇몇 사람에게만 조용히 말했던 소식은 어느덧 널리 퍼져 있었고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에게까지 심심한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었다.

 강은 나의 경사를 소개했고 사람들은 나를 소설가 - 혹은 작가님이라는 농담 섞인 호칭으로 불렀다. 나는 누가 건네는지 모를 악수를 받고, 익숙하지 않은 주제의 대화를 하고, 누군가가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퍽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뜨는 것은 더 민망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막차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외진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을 때 일행에는 거의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없는 무리들만 남아있었다. 그들은 요란하게 취해 있었고 때로 욕지기가 들어간 농담을 서로에게 내뱉었다. 자리를 벗어날 좋을 기회가 온 것 같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으니 강이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났다.

 “그 소설은.” 그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넨 것은 거의 처음이었는데, 나는 사적인 대화의 첫마디로는 조금 뜬금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질투할 만한 작품이다. 부러운 것이 있다면 그 안의 진실이야. 그것은 일종의 비상구지...너는 너만의 통로를 만든 셈이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잘 읽어주었다니 고맙다.” 나는 의례적인 답을 했다.

 “그건 힘이야. 눈이 무서운 세계에서는 그것이 무기가 되는 법이지. 네 수상소감에는 아직 문장의 힘을 신뢰한다고 쓰여 있었어. 그 말은 진심으로 쓴 건가?” 나는 대화가 엉뚱하게 진지해지는 것 같아 당황했지만 곧 그것이 취한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임을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 네 소설의 장면 중에...주인공이...”

 그가 그 장면을 말하던 도중에, 요란하게 떠들던 무리들이 그를 우악스럽게 끌고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강은 많이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걸었다. 나는 그 틈을 타 내 몫의 현금을 테이블에 남겨둔 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잠깐 나의 소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의 소설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고난을 겪는 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정제해서 말하면 관습이 갖는 모순을 고발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가치를 탐색하는 소설이었다. 나의 소설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 주제 의식에 주목했고 그 전달 방식의 세련됨을 칭찬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들이 소설에 부여한 의미와는 조금 달랐다. 이 소설은 내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한 죄책감을 고백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 죄책감이 무엇인지 여기에 구체적으로 쓸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소설에 담았다. 서사의 흐름 사이에는 사람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을 것만 같은 화소들이 끼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나의 오랜 비밀 - 감추어온 치부들이었다.

 집필은 어려웠다. 허구의 틀 안이었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간신히 소설을 끝냈을 때 나는 내 죄에 대한 고해가 이루어진 느낌에 후련했지만, 정작 당선이 되자 독자 중 누군가가 소설의 그 부분을 알아챌까봐 두려워졌다. 사실 그것은 기우였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작품의 문체나 주제의식 정도였을 뿐, 아무도 그 사소한 대목을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하필이면 그 장면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내게는 싸늘한 느낌을 남겼던 셈이다.

 어쨌든 그것은 학교를 떠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휴학계를 제출한 후 나는 도망치듯 지방으로 내려왔고 그때부터 학과의 일은 나의 세계 밖에 있었다.

 그런데 그 강이 나의 아래층에 살고 있다. 그것은 친밀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반가워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색한 사람이라도 낯선 여행지에서 단둘이 마주치게 되면 진한 반가움으로 서로를 마주하듯, 우연히 서로가 같은 영역에서 공존한다는 사실은 뜻밖의 친밀함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인사라도 하러 가야 하는 건가.” 나는 무심히 말했다. 박은 나를 바라보았다.

 “아...너는 휴학했었지.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멀리 갔어...네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닐 걸 아마.” 그렇게 말하는 박의 옆모습은 마치 오래 간직해온 기념품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쓸쓸해 보였다.

 내가 휴학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무렵에 강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그의 SNS에 개인적인 심경을 담은 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글들은 단편적인 심경들을 고백하는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가끔은 강이 저런 표현도 쓸 줄 알았나 싶은 세련된 글들도 종종 올라왔다.

 사실 그런 작문에 대한 욕구란, 감정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문장과 만난 이후 종종 생기곤 하는 여운 중 하나이므로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현실에서 강은 대표의 역할을 평소처럼 훌륭히 수행했고 사람들은 강에게 글을 쓰는 감상적인 취미가 하나 생겼군- 이라는 반응으로 그를 대했다. 문제는 그해 가을 강이 게시했던 글의 한 대목에서 시작되었다.

 - 언젠가 이 풍경들과 이별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세계의 거대한 법칙은 견고하고 냉정하며 한 인간의 의지나 희구(希求)는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 사소한 것에 행복의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에 소홀하면 안 될 것이다 -

 심경을 담은 평범한 글로 보인다(나는 이 대목이 인연(因緣)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글은 곧 암묵적인 질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의 부당한 조치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학교는 취업 실적이 저조한 어문계열의 입학생 정원과 지원금을 축소시키려 했다. 그건 단과대의 지위와 위상에 심한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고 학생들은 투쟁에 나섰다. 대표였던 강은 그 투쟁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며칠 밤을 학생회관의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지새웠고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로 광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 글이 게시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글을, 의지와 희망의 힘을 냉소한 글로 해석했다. ‘세계의 거대한 법칙’을 긍정한 그의 글은 몇몇 사람들의 입을 거쳐 넓게 퍼져나갔고, 어느새 강은 투쟁의 힘과 의지의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투쟁의 선봉에 서 있는 위선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대표자를 향한 학생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결론적으로 투쟁은 성공했고 정원 축소와 예산 삭감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누구도 강에게 격려나 칭찬을 보내지 않았다. 강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전에 보여주던 친화력과 동화력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아무런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박은 투쟁에 참여했던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강의 이야기를 슬쩍 해 보았고 돌아온 반응은 대체로 이러했다.

 - 애초에 그 시국에 개인적인 감상 따위를 쓰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분위기 상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글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 글을 쓰려는 욕구는 알겠지만 가끔은 그런 욕구를 억제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대표자로서의 덕목이다.

 강은 2학기 종강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퇴임식도 같이 진행되었으므로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형식적으로 술을 마셨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술만 취하면 매번 푸념을 늘어놓곤 하던 A가 다가왔다. 강은 술자리에서 녀석이 신세 한탄을 시작하면 그것을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A가 암울한 미래를 비관하면 현재의 가능성을 긍정했고 타인의 우월과 자신의 열등감을 토로하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말했고 세계에 흔적을 남기기에 너무도 하찮은 스스로를 질책할 때면 녀석이 가진 재능을 호명해 주던 것이 강이었다. 그날 역시 A는 자신의 나태와 무가치함을 하소연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녀석이 이번 학기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여럿 성취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 술자리의 푸념이란 과장과 허구로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므로 누구도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에게서 나온 대답은 평소와 영 딴판이었다.

 “너는 항상 삶의 암울한 부분만을 내게 쏟아놓지. 무언가 좋은 일을 맞이했을 때도 너는 생의 슬픔에 대한 위로만을 구했다. 더군다나 그 내용들이란 너만의 특수한 환부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아픔이지. 지금 생각해 보니 너는 너만의 환부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필요가 없었을 게다. 그저 너는 보편적인 고민들을 타인들 앞에서 하소연하면서, 삶의 이면을 바라볼 줄 아는 태도를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 네가 진정한 답을 원하는 것이라면 너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계속 묻는 셈이고 너의 진중함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너는 답을 원하지 않는 질문을 계속 늘어놓으며 상대방을 고문하고 있는 거다. 그건 잔인한 일이다. 아주 잔인한...”

 솔직하고 후련하긴 했지만 사려 깊은 대답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날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견해였고 그들은 강답지 않았다며 강을 나무랐다. 그날 강은 많이 취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뇌까리다가 어디론가 휘청휘청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박이 본 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강은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강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가 살던 집을 방문해 보았지만 이사를 했다는 말만 돌아왔다. 수소문 끝에 이 건물에 입주한 것을 알고 그의 방을 두드렸지만 마주한 것은 싸늘한 강의 목소리와 다음에도 이렇게 찾아오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통보였다. 강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변했고 나는 강을 굳이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후 나는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강의를 들었고 과제를 했고 가끔 도서관에서 새벽을 지새웠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상하게도 나의 주위에 사람이 많아졌다는 점이었다. 반년이 지났지만 나는 수백 명이 경쟁하는 문학상에서 수상한, 대단한 재능의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초면인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고 강의 중에 내가 의견을 제시하면 인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경청을 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그런 반응들에 무색하게 나는 입상 이후로 소설을 단 한편도 써내지 못했다.

 새로운 소설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도 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디쯤에서 반드시 벽에 부딪히곤 했다. 쓴 글을 다시 읽고 있자면,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나는 두려웠다. 나의 재능을 칭찬하던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서 지을 표정,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공포였다. 억지로 문장을 써내려가도 봤지만 당장 다음날만 되어도 나의 사유와 너무 이질적인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단 한 편의 소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소설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 교수의 부음을 가져온 것은 박이었다. 장례식장은 종로 근처에 있었다. 식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바깥을 응시했다. 어둠 위로 강과 최 교수의 모습이 겹쳐졌다.

 최 교수, 그는 시간강사였고 우리 학교에서 <예술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담당했다. 나는 그 강의에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매일 출석하는 정도의 학생이었다. 그는 독일 문학을 전공했고, 항상 이해타산의 반대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자본의 논리보다 사랑의 비논리를 긍정했고, 삶은 어둠 속으로의 도약이라던 키르케고르의 문장을 사랑했다. 물질적 부보다 정신적 풍요를 얻는 일이 즐겁다는 사람이었다. 나는 박과 함께 그 강의를 들었고 가끔은 감동했고 가끔은 그의 대책 없는 낭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나의 기억 속에는 봄날의 한 강의가 남아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신화와 예술>이었고 최 교수는 하나의 그림을 스크린에 띄웠다.

 “이것은 피터 브뢰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에는 이카루스 대신 가축을 모는 사람과 평범한 해안의 모습밖에 없었다. 한참을 관찰하고 나서야 나는 오른쪽 구석에 그려진, 이미 바다에 빠져버린 한 사람의 발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의 세계를 응시하는 느낌을 받는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비행(飛行)에 대한 – 그 무모함에 대한 욕망을 내밀히 품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욕망을 모두 해소하는 것은 어렵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일 - 그것은 그 자체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카루스는 지상의 논리를 배반했고 비행했고 추락하여 죽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죽었지만 누구도 그를 추모하지 않는다. 그저 가축을 몰고 배를 저어갈 뿐이다...정정하겠다.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우리의 세계를 지나치게 닮아 있다...”

 그는 내가 최초로 쓴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단과대에는 작은 문학회가 있었고 최 교수는 그 모임의 지도자로 있었다. 나와 박은 그 모임에 속해있었고 구성원들은 한 주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창작물을 발표하고 평했다. 박의 시(詩)가 ‘섬세한 언어 선택’이라는 호평을 받은 이후 드디어 나의 차례가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매일을 중압감에 시달렸다. 의미의 핵심을 관통해 들어가는 문장의 예리함을 나는 동경했지만 그에 비해 내 문장들은 지나치게 뭉툭해 보였다. 결국 나는 쓰려던 내용을 얼마 정도 포기하고서라도 문장의 수사와 표현을 다듬는 데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상하게도 내겐 소설이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소설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했다.

 최초의 소설을 발표하던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창틀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던 강의실에서 나는 나의 작품을 읽었다. 상당히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시는군요. 최 교수의 코멘트는 그랬다. 그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건넨 말은 아마 그것이 처음이었다.

 비 내리는 밤은 문학을 이야기하며 취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골목의 막걸리집에서 최 교수와 우리는 얼얼하게 취했다. 내가 멍하니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 최 교수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나를 쿡 찔렀다.

 “군의 소설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활주로 위를 달리는 근사한 비행기를 닮았어. 하지만 결국 땅에서 이륙하지는 못하는 비행기란 말이야. 그건 상당히 멋진 전시물은 될 수 있어도 절대로 훌륭한 비행기가 될 수는 없어. 비행을 위해서는 지상에 남겨둔 것들을 모두 잊어버려야 하는 법이야.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당당해야 할 – 시쳇말로는 뻔뻔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네. 보이는 겉면만 계속 다듬다보면 속의 것이 모두 깎여나가 정신을 차려보면 아무것도 남아있지가 않아...”

 그 후 나는 그 최초의 소설에 오랜 죄의식을 담아내 보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나의 당선작이었다. 당선 후 나는 원고를 최 교수의 연구실로 발송했다.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전달하기는 못내 면구스러운 까닭이었다. 그는 나의 작품을 읽어보고 세상을 떠났을까.

 고인의 빈소는 조용했다. 얼굴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부조금을 넣고, 음식을 먹었다. 빈소가 조용해서 우리는 고인의 가족들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생전에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조용히 입을 연 우리는 문학회에 대한 이야기와 최 교수의 강의들에 대해 말했다.

 “말년에는 그렇게 망가지더니...그 전까지는 은혜를 베풀었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최 교수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무채색 같은 목소리로 쓸쓸히 읊조렸다.

 건강이 악화된 최 교수는 강의를 그만두고 북한산 근처에 있는 자택에서 요양했다. 일상은 평온했고 매일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 교수는 예전에 자기가 집필한 원고의 일부분이 어느 젊은 신예 작가에 의해 표절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법적인 조치를 걸었고 신예 작가는 막대한 금액을 배상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신예 작가들의 지인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합리와 물질의 반대편에 서서 삶을 살아가라 말하던 최 교수가 몇 줄 되지도 않는 표절 때문에 젊은 신예 작가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냈다며 분노한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오게 되면 철저히 이성적이게 되면서 강의와 저서에서는 항상 사랑만을 말하는 위선자 – 이 비난은 당연히 궤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런 견해에 점차 동조하기 시작했다. 소식은 최 교수를 아는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어느덧 최 교수는 속물이 되어 있었다. 최 교수 앞에서 욕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암묵적이고 간접적인 비난은 거셌다. 교수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언제부터 최 교수는 저녁마다 산책을 이유로 외출을 시작했다. 밤이 깊을 때까지 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찾으러 나간 부인이 발견한 것은 집 근처 시장에서 술에 절은 채 잡상인들과 화투를 치고 있는 교수의 모습이었다. 평소 행실에 비했을 때 그것은 일탈이었다. 그는 많은 돈을 땄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같은 곳에서 부인에게 발견되어 새벽녘에 집으로 끌려왔다. 황당해진 부인이 이유를 추궁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낮에는 조용히 서재에 박혀 평소처럼 지냈기 때문에 도대체 밤에만 이루어지는 이 비행(卑行)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저녁에 집을 나가는 교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새벽녘에 끌려오는 교수의 입가에는 항상 천진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교수는 또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항상 있던 장소에도 없었다. 밤늦게 경찰의 연락을 받고 부인이 간 곳은 한 장례식장이었다. 식장에서 소소히 진행된 섯다 게임에서 최 교수는 최고의 패를 받아 큰돈을 걸었지만, 상갓집에 한해서만 더 높게 인정되는 패가 상대의 손에 있었고 그는 돈을 모두 잃었다. 그 세속적인 불문율을 알 리가 없던 교수와 상대방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고, 식장에 도착한 부인이 마주한 것은 옷이 다 풀어헤쳐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최 교수의 주검 같은 작태였다. 빈털터리가 된 교수는 집으로 돌아오며 계속 흐느꼈다. 난 잘 살아있어. 지금은 밤이란 말이다. 모두가 잠이 들고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아. 제발 이 시간만이라도 나를 잊어버려줘...

 최 교수의 병은 점점 위중해졌다. 제대로 서지도 못해 산책마저 나가지 못하게 된 날로부터 몇 주 뒤, 교수는 정신을 잃고 쓰려져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새벽 타계했다.

 한 신문사로부터 단편소설 의뢰가 들어온 것은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서였다. 신문사측은 나의 수상작을 읽었고 나의 작품세계(나는 이 단어를 들으며 섬뜩함을 느꼈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그에 걸맞은 작품을 하나 써 줄 것을 요구했다. 한 달 내로 나는 그들이 파악한 나의 ‘작품세계’에 부합하는 소설을 한 편 써내야 했다.

 구상을 핑계로 한동안 집필은 하지 않았다. 쓰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 모른다. 학교 강의시간이나 휴식시간에 몇 문장씩이라도 써보려 했지만 어쩐지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공간에서는 쓸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을 그들이 보게 된다면...기대와 주목과 눈...나는 그 뒤에 벌어질 장면이 두려웠다. 가끔 나는 내가 지나친 망상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꼈지만, 자신의 증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강박을 쉽게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가끔 나는 텅 빈 종이 위에서 강과 최 교수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둘의 얼굴은 닮아 있었고 어쩐지 나는 나의 얼굴도 그들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고요한 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모두가 잠이 들고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조심히 나는 펜을 들고 아무 문장이나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마감 일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마감까지는 정확히 5일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에 나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분량을 채우기 위해 문장을 짜내다보니 어느덧 깊은 새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려 층계 베란다로 나갔고 어두운 세계를 오래 응시했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층 아래 층계가 보였고 그 층계 베란다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공기 위를 유영하는 것처럼, 조용히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뒤에서 밀면 그대로 추락할 것만 같은 위험한 자세였다. 아, 하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밤의 비명 소리는 크게 들렸고 밑의 사람은 위를 올려보았다. 그건 강의 얼굴이었다. 내가 얼어붙어 서 있는 동안 강은 재빨리 층계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었다.

 강이 그 허공에 걸터앉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왜 깊은 밤에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이미지에 사로잡히느라 소설은 한 줄도 진전되지 않았고 나의 방에 찾아온 박은 잠깐 사이에 폐인이 다 된 것 같다며 나를 걱정했다. 박은 술이나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자고 나를 끌고 나갔다. 나는 그날 예상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휘청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현관을 열려는 순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몸을 일으켰다. 강이었다. 나는 몸이 굳어졌다. 그는 한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잠깐 동안 나는 강이 나를 살해할 것만 같은 이상한 공포감을 느꼈다. 강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조금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입에서 술의 냄새가 났다. 오늘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며 두 시간째 기다렸다는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고 나는 그와 같이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곧 떠나.”

 “좀 쉬기로 한 건가.”

 “아니, 외국으로 가. 뜻이 생겼거든.” 그가 술을 따랐다. 그의 손이 많이 상해있었다.

 “유학?” 이 말을 듣자 강은 쿡 웃었다.

 “학(學)보다는 랑(浪)에 가까울 텐데...다들 뜻이 생겨 외국으로 간다고 하면 유학만 생각하더라고. 그게 전형적이지. 하지만 공부와는 거리가 먼 이유야.”

 “그럼 단순한 여행?”

 강은 오랫동안 나를 응시했다.

 “넌 새벽에 나를 봤다. 많이 놀란 것 같던데.”

 “당연하지. 누가 그런 곳에 걸터앉는단 말이야.” 나는 짐짓 강하게 말했다. 강은 웃었다.

 “미친 짓이지. 허나 내게는 즐거운 습관이었어. 너도 얼추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 사건이 그렇게 된 이후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워지더군.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재단하고, 해석하고, 평가해서 비난한다는 게 야속했어. 허나 생각해보니 그들의 방식을 만든 것은 나였다. 내가 의식했던 사람들의 눈, 나의 과거 따위가 나를 단단한 틀 안에 박제시켜 버렸던 것이지. 나는 그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술자리에서 짓궂은 말을 했던 것도 그 깨달음의 산물이지. 나답지 않았다며 나를 나무라던 사람들을 보고 느꼈다. 내 상은 너무 단단해져 있고 이제 그 형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자살을 하려던 적이 있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 떨어지면 한 번에 죽기야 하겠더군. 걸터앉아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유서를 써본 적이 있다. 뭔가 지상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고 생각하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여행을 간 기분이었어. 그런데 그 유서를 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이건 내가 살아서 써본 글들 중에 나를 가장 감동시키고 있었다. 글의 기교나 수사 따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문장들에서 – 거북하겠지만 – 피 냄새가 난다고 할까. 죽음이 바로 아래 있으니 잃을 것이 없었던 모양이지. 그때부터 종종 높은 곳에 걸터앉아 글을 쓰곤 했다. 지상과 멀어진 느낌은, 나에게는 곧 진실과 가까워지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 느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행복을 준다.”

 특이함을 벗어나 기괴하기까지 한 습관이었다.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죽음의 목전으로 올라가는 사람이라니. 진실이란 정녕 그렇게밖에 얻어질 수가 없다는 말인가.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지상을 벗어나지 않고 오롯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단 말인가. 나는 나의 앞에 앉아있는 강을 보며 최 교수를 떠올렸다. 이카루스 – 최 교수는 마지막 순간에야 비행했고 빠르게 추락했다. 영정에서의 최 교수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 뒤로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숨어 있을까.

 “너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네 소설의 주인공이 했던 그 행동 –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아픔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그 경험을 소설에 썼어. 그건 절대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대목이 아니야. 그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걸 알 수 있어 – 너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욕망,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진실의 똬리를 풀어낼 방식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그 안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허구의 이름으로 용서될 수 있으니 눈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지는 거다. 그건 이 지긋지긋한 땅덩이를 떠나 순수한 공중으로 올라갈 수 있는, 정말 멋진 방식이지.”

 나의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에 감춰진 나의 진실을 독자가 눈치챌까봐 두려워하는 나는 무엇인가. 과연 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맞는가.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진실을 기술하려는 욕망은 삼킨 나는, 아직도 활주로만 달리고 있는 웅장한 전시물만 만들고 있는 인간인가. 언제쯤 나의 비행기는 이륙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강은 나의 이런 남루한 고민을 알지 못한다...
“야, 네놈은 소설가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질책으로 들렸다. 그는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건 내가 고공(高空)에서 쓴 글이다. 이건 소설이다.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내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떠나는지는 그 글이 말해줄 것이다. 너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드러내지 못할 진실 하나쯤을 품 안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니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눈을 떠보니 나는 내 방 신발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어떻게든 집까지는 기어들어온 모양이었다. 강과 조금의 대화를 더 한 것 같지만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가 되어 있었다. 나는 4층으로 내려가 모든 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강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전날 강이 나에게 건네준 봉투는 나에게 없었다.

 아마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디에 흘려둔 것 같아 술집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몇 번이고 뒤졌으나 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길에 굴러다니는 서류봉투야 누군가가 집어서 버려도 문제될 것이 없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강의 소설을 잃어버렸고 강은 그렇게 사라졌다.

 밤이 되고 책상 앞에 앉아 써둔 소설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원고를 찢어버렸다. 나는 종이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새벽이 깊은 시간이었고 길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으며 가로등은 꺼져 있었다.

 나는 조심히 베란다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리를 바깥으로 향해 보았다. 발밑으로 까마득한 지상이 보였다. 원고의 마감일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어쩐지 이 모든 일이 필연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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