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기록을 통해 천마의 숨은 역사 찾아가기 2
[학술] 기록을 통해 천마의 숨은 역사 찾아가기 2
  • 영대신문
  • 승인 2018.09.0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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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의 창조자』 기념비
『새 역사의 창조자』 기념비
『새 역사의 창조자』 현재 모습
『새 역사의 창조자』 현재 모습
부동산 매각 협약서
부동산 매각 협약서

 

 이번 호에는 우리 대학의 창학이념과 교가에 등장하는 『새 역사의 창조자』란 문구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경산캠퍼스 부지는 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했는지에 대해 관련 기록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천마의 숨은 역사를 찾아가 보기로 하겠다.

 그 출발점은 어디였을까?=기념비는 『기록으로 만나는 영남대학교 70년』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역사’ 패널에 청구대학의 역사사진 자료로 소개되었다.《영남대학교 50년사: 1947-1997》에 따르면 청구대학 동창회에서는 1958년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동 교정에 청구의 정신을 상징하는 ‘새 역사의 창조자’란 글귀를 새긴 자연석의 기념비를 회원 168명의 찬조로 건립하여 개교기념일인 11월 29일에 제막하였다고 한다. 이 상징비의 뒷면에는 “이 비에 새긴 청구의 상징 문구는 교수회에서 제정하고 최해청 학장이 쓰고 동창회장 최진국을 비롯한 회원 일동이 세우다. 4291.11.29. 개교 10주년 기념일”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기념비가 대명동 교정에 옮겨져 있다고 《영남대학교 50년사: 1947-1997》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면 대명동 교정에 옮겨진 기념비는 지금 대명동에 그대로 있을까?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대명동에 계신 여러 교직원들에게 수소문 해본 결과 『새 역사의 창조자』 기념비는 대명동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실마리는 전시회를 방문한 이광수 총무팀장에 의해 풀렸다. 이 팀장은『새 역사의 창조자』기념비는 천마로에서 바라보았을 때 IT관(구 공과대학 본관) 왼편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이 기념비는 언제부터 IT관 앞에 있었을까?

 필자는 그 당시에 근무한 선배 직원들을 대상으로 기념비 이전에 대해 수소문하였지만 모두들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대신문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1978년 8월 15일자 영대신문에는 “「카메라 앵글」 넘어진 새 역사의 창조자” 기사에서 대명동 캠퍼스 교문을 들어서서 테니스장 옆으로 올라가다 잔디밭에 작고 못생긴 바위가 무심하게 쓰러져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 바위가 바로 『새 역사의 창조자』 기념비이다. 추정컨대 이 기념비는 1970년 3월 문화동 캠퍼스를 매각하면서 대명동 캠퍼스로 이전되었으며, 1978년까지 대명동 캠퍼스에 있었다. 또한 1978년 11월 15일자 영대신문에는 “관리과에서 1978년 11월 4일 대명동 교사 잔디밭에 있는 『새 역사의 창조자』 비를 경산 캠퍼스로 이전했으며, 이 비는 응용미술과에 설계를 의뢰해서 인문관 건물 정면에 세울 예정”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2018년 현재기념비는 우리 대학 경산캠퍼스 IT관 전면에 60여 성상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처연히 세워져 있다.『새 역사의 창조자』 기념비는 영대신문 보도대로 최초 인문관 건물 정면에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IT관으로 다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록물에서도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자는 대학에서 1978년 9월 30일 인문관을 준공한 후 1978년 11월 15일 영대신문 보도와 같이 최초에는 기념비를 새로 준공한 인문관으로 이전하려고 하였으나, 학내 사정으로 인해 IT관으로 설치 위치를 변경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필자는 이 원고를 준비하면서 『새 역사의 창조자』란 문구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그리고 영남대학교로 이어 오면서 공통적으로 그 문구를 사용한 사실과 그 문구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공통된 한사람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새 역사의 창조자』와 관련하여 대구대학, 청구대학, 영남대학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노산 이은상 선생이다.

 먼저 대구대학에서 발간한 구대신문 1967년 12월 26일 종간호에서는 대구대학의 상징인 교기, 상징동물(사자), 우승기, 교가 등을 소개하면서 대구대학 교가는 1953년에 만들어졌음을 확인하였다. 1953년 대구대학에서는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으로 대구대학 교가를 만들었는데, 이은상 선생은 교가의 2절 가사 첫 구절에 “새 날의 역사를 창조하는 우리는 이 땅의 젊은 학도”라고 표현하여 『새 역사 창조』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알렸다. 이어서 청구대학의 『새 역사의 창조자』 제작배경은 영대신문 1982년 9월 29일자에 심재완 교수가 노산 이은상 선생의 부고 소식을 전하면서 쓴 추모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심재완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청구대학 동창회에서 1958년 개교 10주년 기념비를 건립하는데 동문회의 문구선정을 의뢰받은 이은상 선생이 『새 역사의 창조자』를 제시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이은상 선생이 최해청 학장과 같이 심재완 교수의 연구실에 들러 『새 역사의 창조자』란 문구를 불러 주고, 최해청 학장이 직접 쓴 글씨를 돌에 새겨 오늘까지 전하게 된 역사적인 기념비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이은상 선생은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영남대학교로 통합되자 1968년 초에 영남대학교의 교가도 직접 작사하였는데, 여기에도 『새 역사의 창조자』란 문구를 넣어 영남대학교의 창학이념으로 전승하게 하였다.

 우리 대학 경산캠퍼스 부지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였을까?=우리 대학 경산캠퍼스 부지 선정과정에 대해서는 《영남대학교 50년사: 1947-1997》에 기술된 내용을 토대로 필자가 재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1967년 12월 22일 통합 당시 영남대학교는 대구대학의 대명동 캠퍼스와 청구대학의 문화동, 효목동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총 교지(校地) 14만 평에 교사(校舍) 1만 4천 평으로 8,000명이 넘는 영대인에게는 비좁고 혼잡하였으며, 그렇기에 이와 같이 분산된 캠퍼스는 통합 영남대학교의 새로운 문제점이었다. 1968년 1월 8일 이동녕 초대 이사장과 신기석 초대 총장의 취임 이후 한석동 초대 상임이사는 영대의 모든 교수, 학생들이 한 곳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대구를 중심으로 반경 20㎞ 내 새 교지를 물색하였다.

 한상임 이사는 모두 11곳의 후보지를 1차로 선정하고, 이후 이동녕 이사장과 논의한 끝에 네곳의 후보지를 결정하였다. 첫 번째 후보지는 농업시험장이 자리 잡은 칠곡군 칠곡면 학정동(현재 경상북도 농업기술원 일대) 60만 평, 두 번째는 팔달교 너머 태전동 일대 60만 평, 세 번째는 현재 영남대학교가 자리한 경산시 압량면, 네 번째는 대구시 고산면 제5관구사령부 서남편 일대(현재 수성구 연호동 삼성라이온즈파크 일대)의 50만 평이다. 이후 1968년 5월 초 경산공업단지 공장준공식에 참석차 대구에 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동녕 이사장과 한석동 상임이사는 동촌비행장 구내식당에서 위의 네 곳 교지후보지를 직접 보고하였다. 보고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산을 왕래하면서 공중에서 헬리콥터로 경산 부지를 보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정작 그날 밤 숙소인 수성관광호텔로 한석동 상임이사를 불러 경산의 현 교지를 새로운 캠퍼스로 택할 것을 직접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통합 영남대학교의 부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경산으로 결정되었으며 부지매입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극비로 추진하였다.

 마침내 1968년 6월 7일 법인이사회에서 소요경비 3억 2천만 원으로 경산 교지를 매입한다는 것을 공식 표명하고, 1968년 12월에 이동녕 이사장이 99% 매입이 완료되었음을 발표하였다. 105만 평의 규모로 확정된 경산캠퍼스 부지의 매입가격은 지목에 따라 달랐지만 평당 265원으로 합의되어 토지보상비에 2억 8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130세대 이전보상비, 4,000기 내외의 분묘 이장비, 지목변경으로 인한 가격의 증액분으로 4천만 원이 소요되어 경산캠퍼스 부지 매입에 3억 2천만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그렇다면 1968년 3억 2천만 원에 매입한 우리대학 경산캠퍼스 부지는 2018년 현재에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경산캠퍼스는 학교부지라 공시지가가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토지가격을 산출할 수 없지만, 그 대안으로 필자가 경산캠퍼스 인근의 사유지를 임의로 정해서 2018년 1월 현재 국토교통부에서 발표한 공시지가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공시지가가 가장 낮은 곳은 쓰레기 매립장 인근으로 평당 95,000원(갑제동 산87-2번지)이고, 가장 높은 곳은 학교 정문 앞으로 최대 1,290만 원(대동 170-7)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2017년 대학정보공시에 공개된 경산캠퍼스 부지 80만 평을 기준으로 필자가 임의로 평당 최소 100만원을 적용하면 경산캠퍼스의 전체 토지자산 규모는 약 8,000억 원에 달한다.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50년 전에 경산캠퍼스 토지를 매입하는데 3억 2천만 원을 투자해서 2018년 현재 약 8,000억 원의 자산규모로 성장했다면 투자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대박 난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경산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는 데 있어서 현재 칠곡지역과 수성구 일대의 토지 50~60만 평 규모의 부지를 제외하고, 경산지역 105만 평을 최종 영남대학교 부지로 신속하게 결정한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은 대단히 놀라울 따름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마침내 학교법인 영남학원에서는 삼국통일의 싹이 움텄던 성지이자 옛 화랑들의 수련장인 경북 경산군 압량면에 105만 평(압량면 97만 평, 경산읍 8만 평)의 학교부지를 매입하여 1969년 6월 27일에 경산캠퍼스 기공식을 가졌다. 이후 1970년 2월 말 교양학부(현 디자인미술대학 미술관), 문리과대학(현 사범대학), 법정대학 및 상경대학(현 외국어교육원) 건물이 차례로 완공되어 본격적인 영남대학교 경산캠퍼스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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