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근대 일본의 독도인식: 내무성 및 태정관 사료 속의 독도
[학술] 근대 일본의 독도인식: 내무성 및 태정관 사료 속의 독도
  • 박지영 연구원(독도연구소)
  • 승인 2018.06.0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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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우리나라의 영유권을 무시하고 침해하는 발언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영토 교육에서조차 우리나라가 독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의무적으로 교과서에 싣게 하는 등, 그들의 주장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행동은 한일양국의 미래에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며 훗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은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 근거로 17세기에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렵활동을 했던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미 당시 조일간의 ‘울릉도 쟁계’로 해결이 되었다. 그 결과 당시의 에도막부는 소위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라고 불리던 어렵 허가를 취소하고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1905년의 시마네현의 독도편입을 근대 국제법에 따른 영토 재확인절차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들이 주장하는 1905년의 독도편입보다 앞선 1877년에 당시 일본의 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내린 ‘태정관 지령’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태정관 지령’이란=‘태정관 지령’이란 1877년에 태정관이 내린 “죽도 외 한 섬은 본방(일본)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한 문서이다. 이 지령이 내리게 된 배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나,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려고 전국 지도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무성의 지적조사원이 1876년 10월 5일에 시마네현에 ‘죽도’(울릉도)를 편입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질문에 대응하여 시마네현은 1876년 10월 6일에 내무성에 “죽도 외 한 섬”을 지적에 편입해도 되는지에 대해 문의하였으며, 내무성은 이 문의를 최종적으로 태정관에 품의하여 결정을 받은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정관은 ‘죽도 외 한 섬’을 조선의 영토로 판정하였으며, 시마네현의 지적에 편입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문서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있지 않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시마네현의 ‘죽도문제연구회’는 ‘죽도 외 한 섬’은 모두 울릉도를 의미하며, 설령 울릉도와 독도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했을 뿐이지 한국 영토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대응할 가치조차도 없는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

 내무성 및 태정관 사료의 성격=현재 ‘태정관 지령’과 관련해서 전해지고 있는 내무성 및 태정관 사료로는 ‘공문록(公文錄)’과 ‘기죽도 각서(磯竹島覺書)’가 있다. ‘공문록’은 1868년부터 1885년 12월까지 당시 태정관이 접수한 정부의 각 조직, 기구 및 지방 부현(府縣)의 문서를 관청별, 시기 순으로 수록한 것이다. 또 ‘기죽도 각서’는 내무성 지리국이 조사한 것을 지지과(地誌課)의 나카무라 겐키(中村元起)가 1875년에 교정하여 완성시킨 문서로 현재 일본 공문서관에 보관 중이다. ‘공문록’에는 1877년의 ‘태정관지령’ 관련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기죽도 각서’는 ‘태정관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내무성이 17세기의 ‘울릉도 쟁계’ 관련 문서를 정리한 것이다.

 ‘공문록’ 및 ‘기죽도 각서’의 내용=‘공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태정관 지령’ 관련 문서는 (1) 1877년 3월 20일자, ‘태정관 지령안’, (2) 1876년 10월 16일자, 시마네 현령이 내무성에 상신한 문서(‘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3) 1876년 10월 5일자, 내무성 지적조사원이 시마네현에 조회한 문서, (4) 부속문서, (5) 1877년 3월 17일자, 내무성이 태정관에 상신한 문서, (6) 1877년 3월 29일자, ‘태정관 지령’, (7)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부속문서로 첨부된 문서는 시마네 현이 내무성에 상신한 문서에 부속된 것과 내무성이 따로 조사하여 첨부한 문서로 구별할 수 있다. 먼저 시마네 현이 상신한 문서의 부속문서는 울릉도에 대한 소개를 기술한 ‘개략’, ‘막부의 도해허가서’, ‘도해금지 경위’, ‘막부의 도해금지령’, ‘시마네현의 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무성이 첨부한 문서는 ‘에도 막부의 평의 및 결정내용’, ‘조선 측 역관이 전달한 문서’, ‘조선 측에서 온 서계’, ‘일본의 회답서계 및 구상서’로 구성되어 있다. 내무성이 첨부한 문서는 모두 쓰시마 번이 소장하고 있던 외교문서이다.

기죽도 약도
기죽도 약도

 

 한편 ‘기죽도 각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막부의 도해면허’, ‘1695년 8월 12일자, 돗토리 번이 막부에 보고한 문서’, ‘1695년 12월 7일자, 쓰시마 번의 소 요시자네(宗義眞)가 막부에 지시를 요청한 문서’, ‘1695년 12월 24-25일자, 막부가 돗토리 번에 보낸 7개조 질의서 및 돗토리 번의 답변서’, ‘1696년 1월 25일자, 돗토리 번이 막부에 올린 송도(松島, 독도의 일본 명칭)에 대한 답변서(총 9개조)’, ‘1696년 1월 28일자, 도해금지령 관련 문서’, ‘1696년 2월 10일자, 돗토리 번에 대한 막부의 도해면허서 반납지시 문서’, ‘1698년 6월 12일자, 쓰시마 번이 도해금지령을 조선 측에 전달했다는 것을 막부에 보고한 문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문록’ 및 ‘기죽도 각서’와 독도 영유권=이처럼 ‘공문록’과 ‘기죽도 각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거의 대부분 17세기의 ‘울릉도 쟁계’ 관련 문서이다. 즉, 1877년의 ‘태정관 지령’으로 ‘죽도 외 한 섬’이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진 근거는 ‘울릉도 쟁계’ 당시의 에도 막부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문록의 마지막에 첨부된 ‘기죽도약도’라는 지도에는 분명하게 ‘죽도’와 ‘송도’라는 명칭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기재되어 있다. 이는 ‘죽도 외 한 섬’이 바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칭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도 외 한 섬’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서양에서 들어온 잘못된 지리정보로 인한 표현이므로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일본 측 연구자들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설령 ‘죽도 외 한 섬’이라는 표현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태정관 지령’은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했을 뿐이지 한국 영토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부속문서의 내용을 본다면 적절한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시의 태정관이 ‘죽도 외 한 섬’을 일본과 관계없는 섬이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로 삼은 것이 17세기의 ‘울릉도 쟁계’ 관련 문서였다는 것은 ‘공문록’과 ‘기죽도 각서’를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울릉도 쟁계’ 당시의 당사국은 조선과 일본뿐이었으며, 그 외에 개입된 국가는 없었다. 그러므로 ‘죽도 외 한 섬’의 관련 당사국이 조선, 즉 한국이라는 사실을 태정관 또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도문제연구회’는 자신들의 억지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을 그 정도의 인식 능력도 없는 사람들로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 수준의 인식 능력을 지닌 정부가 독도를 편입한 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스스로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에도 막부의 독도영유권 인식=‘태정관 지령’이 이렇듯 그들의 주장과 상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에도 막부가 울릉도에 대한 도해는 금지하였으나, 독도에 대한 도해를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주장을 부정하는 사료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무라카와 가 문서(村川家文書)”로 요나고(米子) 시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1696년의 ‘도해금지령’으로 인해 울릉도와 독도로 가지 못하게 된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이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막부에 제출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는 명확하게 “울릉도와 독도 두 섬에 대한 도해금지령이 내린 이후...”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당사자인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이 ‘도해금지령’의 대상이 울릉도와 독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섭한 막부의 담당 관리들이 이러한 인식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막부 또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카와 가 문서』: 1696년 에도막부의 ‘도해금지령’에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문서
『무라카와 가 문서』: 1696년 에도막부의 ‘도해금지령’에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문서

 

 이처럼 일본 정부의 독도영유권에 대한 억지주장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각종 문서들로부터도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과거사 반성과 함께 한일양국의 미래를 위해 한국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억지주장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