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시절-대학생활과 호칭의 변화]우린 서로 꽃이 되고 싶었다
[그 때 그시절-대학생활과 호칭의 변화]우린 서로 꽃이 되고 싶었다
  • 편집국
  • 승인 2007.06.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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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갑 교수
(국어국문학)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땐 한 동네에 사는 1학년 학생이 6학년 학생을 ‘형’이나 ‘누나’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불렀다. 시골이어서 그랬을까? 도시 지역에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선배와 후배들 대부분이 서로 이름을 불렀다. 이름 뒤에 ‘-씨’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과 다른 점이었다.
30여 년 전의 대학생들, 특히 문과 계열 학생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똥폼’을 좀 심하게 잡은 것 같다. 1학년 애송이 때부터 스스로 완전한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대접 받기를 원했다. 수업 중 쉬는 시간에 교수 앞에서 담배도 거리낌 없이 피웠다. 당시 우리과 학과장이던 어떤 교수님이 쉬는 시간이면, 강의실에서 담배를 같이 피우자고 집요하게 권하셨다. “어이! 담배 피워. 괜찮아 피워 피워”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수준이었다. 다른 교수님들은 그렇지 않고 그 분만 유독 그렇게 바람을 넣으셨던 것 같다.
학과장 교수가 그러니, 우리는 대학생이 되면 교수들하고 맞담배해도 되는 줄 알았다. 3학년 때 철학과의 어떤 과목을 선택해서 들었는데, 중간에 쉬는 시간이 되자 교수가 앞에 앉아 있는데도 나는 평소 버릇대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자 철학과 어떤 학생이 다가 오더니 ‘우리과는 교수님 앞에서 담배 안 피우기로 했다’면서 나가서 피우라고 했다.
대학원 다닐 때였다. 수업이 있는 교수 연구실로 가니 아직 학생은 아무도 없고 교수님만 계셨다. 자리에 앉으니 교수가 담배 한 대 피우라고 했다. 사양하려고 하다가 마침 담배가 피우고 싶었고, 교수가 먼저 피우라고 하기에, 한 대 꺼내 입에 막 물려고 하니까, “꼭 피우려면 이것 피워라”라고 하면서 양담배를 내 쪽으로 던져 주었다. 그 순간 ‘아 또 실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때 유달리 존댓말을 듣고 싶어 했다. 교수를 제외한 누구도 우리에게 낮춤말을 쓰지 않았다. 제대 후 복학한 4학년도 1학년에게 높임말을 썼고, 서로 ‘xx씨’라고 불렀다. 한번은 4학년과 1학년이 한 팀이 되고 2학년과 3학년이 한 팀이 되어 축구시합을 했는데, 4학년 선배 한 사람이 1학년인 내 동기보고, “어이! 이쪽으로 패스해”라고 하니(급하게 공차면서 높임말 쓰는 것도 어려울 것 같음), 그 친구가 공을 몰고 가면서도 “말 놓지 맙시다”라고 따지는 사건도 있었다. 과 동기생들끼리도 남학생과 여학생은 서로 말을 높였고 ‘xx씨’라는 호칭을 썼다. 유달리 어른임을 인정받고 싶어 했고 또 그런 척한 것 같다.
‘형, 누나, 동생’ 같은 말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요즈음 가정주부들이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서로의 관계보다는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다.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불릴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게 된다면, 서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만큼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도 어쩌다 여자 동기를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이름을 부른다. 내 흰 머리를 보곤, “종갑씨 머리가 왜 그렇게 되었어요?”라고 한다. 흰 머리 얘기는 싫지만 이름이 불리는 것은 참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름이 불리는 기회가 줄어든다. 특히 여자가 내 이름을 불러 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지금 내 등 뒤에서 어떤 여자가 내 이름을 그냥 부르면 초등학교 동기생이고, ‘-씨’를 붙여 부르면 대학교 동기생이다. 안 보고도 안다. 척 하면 삼척이고, 쿵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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