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의 매실 도인, 송광매 기념관장 권병탁 교수]77년 인생, 이제 나누며 살아간다
[팔공산의 매실 도인, 송광매 기념관장 권병탁 교수]77년 인생, 이제 나누며 살아간다
  • 조민지 기자
  • 승인 2007.05.31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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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도시에 살았고, 집이 부유했다면 이렇게 매실 연구할 생각을 못했을 거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팔공산 산자락에 위치한 ‘송광매 기념관’에서 권병탁 명예교수(경제금융)를 만났다. 숲 속의 작은 마을 같은 기념관에서 만난 권교수의 첫 인상은 비가 옴에도 밭일을 하고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권병탁 교수 약력
1929년 성주 출생으로, 1953년 경북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55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경제학석사와 60년 같은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 박사를 수료했다. 1961년부터 94년까지 영남대학교 상경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와 송광매기념관 이사장을 맡고있다.

권병탁 씨매실, 들어봤어?
권병탁 교수라고 하면 경제학과 교수란 직함보다 더 유명한 수식어가 있다. 바로 ‘씨매실’.
이 수식어와 걸맞게 권교수의 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매실 관련 음식들이였다. 매실차, 매실주, 매실장아찌..
매실과 권교수의 인연은 1980년, 전남 송광사에서 우연히 줍게 된 매실이 그 시작이었다. 송광사의 매실나무는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매실나무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개량종과는 다른 매실의 원조격인
야생 씨매실이다. 그 당시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권교수는 주워온 매실을 심어서 열매를 수확한 후 시중에 나온 매실과 사서 비교해본 결과, 맛도 우수하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화원에 매실원을 만들어 증식을 시작했으며 고향인 성주에 매실마을을 만드는 등 씨매실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은 팔공산 송광매 기념관에서 직접 매실을 재배하고 있다.
매실을 재배하게 된 계기에 대해 권교수는 “나는 촌놈이야”라고 말하며 “아마 내가 도시에 살았고, 집이 부유했다면 이렇게 매실을 연구할 생각을 못했을 거야”고 덧붙인다. 농사꾼의 아들인 그가 어릴 적, 보고 배웠던 것은 우연히 줍게 된 매실을 바로 먹어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어서 번식을 시킨 후 더 많은 열매를 먹을 수 있게끔 하는 생산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재배되기 시작한 씨매실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97년에 매스컴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지만 너무 많이 찾아와서 힘들 때도 있다”며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수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매실을 원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다면서 말이다.
현재, ‘권병탁 씨매실’이란 이름으로 매실 상품이 시중에 유통 중이며, 권교수만의 매실막걸리는 유통되고 있지는 않지만 특허를 받아놓은 상태이기도 하다.

도산서원보다 더 유명해졌으면…
77세, 이제 80세 고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여유와 건강이 넘쳐흐른다. 세월로부터 배운 연륜과 요가를 통한 자기관리도 있겠지만, 속세를 뒤로 한 채 팔공산 ‘송광매 기념관’에서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 것도 한 몫하고 있다.
권교수의 사립박물관 ‘송광매 기념관’은 그와 부인이 함께 해온 5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으로 지난 2002년 5월 20일자로 문화관광부의 박물관 승인을 받아 세워졌다. 매실, 전통천연염색·서예, 도자기. 길쌈, 쇠부리, 약령시, 오물(五物)이란 7개의 주제에 맞춘 7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전통천연염색·서예 전시실은 부인 송희 여사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곳의 모든 유물들에 대해 “‘쓸어내면 쓰레기요, 보호하면 보물’이라는 신념으로 일단 무엇이든 들어오면 버리지 아니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소개한다. 한편, 송 여사는 “이것들을 처음 집에 가지고 왔을 때, 다 버리려고 했었는데 남편이 고집이 워낙 센 사람이라 이길 수가 없었다”고 웃음 지었다.
기념관 내부 관람 후, 뒷마당으로 장소를 옮기자 매실 과수원과 꽹과리·징·북·장구·피리의 오물(五物) 전시관, 그가 매실을 연구했던 일명 ‘나뭇꾼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실 과수원 한 쪽에는 그네와 작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강연을 하거나 사람들과 제기·팽이 등 민속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송광매 기념관에는 유치원·초등학교의 단체관람과 3대 정도의 대가족들이 찾는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처음 보는 물건들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해서 가끔 가이드로 나서는 권교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대가족의 경우에는 가이드가 필요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아버지는 딸에게 물건에 대해 설명하고, 그 물건에 담긴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세대를 이해 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며, 이런 것이 자신이 송광매 기념관을 만들게 된 이유라며 권교수는 전했다. 그리고 그는 “도산서원보다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표현했다. 77년 살아오면서 더 이상 세상에 욕심도 없고, 계획도 없지만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것들을 이 기념관을 통해서 다 돌려주고 싶다면서.

의미를 부여하면 다 특별하다
관람 도중 중간에 구멍이 뚫린 돌절구가 하나 있었다. 권교수는 돌절구의 구멍을 가리키면서 “잘 봐. 여기 구멍이 있지? 이 구멍은 한 어머니가 자식들 밥 먹이려 열심히 곡식을 찧었다는 증거지”라며 “이렇게 구멍이 생길 정도로 곡식을 찧어댄 어머니는 분명 자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어머니일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 “물론 정확하지는 않아. 내 생각이거든” 매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권 교수는 ‘건강’이란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만의 특별한 연구 업적으로 남겼다.
이와 같이 권교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떠한 사물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권교수는 “깍쟁이처럼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다른 사람의 것도 자신의 일로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당부했다.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로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송광매 기념관’을 만들게 된 권병탁 교수를 보며 개인이기주의가 팽배한 이때, 진정한 이웃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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