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시절]대학 언론의 변화
[그 때 그시절]대학 언론의 변화
  • 편집국
  • 승인 2007.05.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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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신문·청구춘추에서 영대신문에 이르기 까지
크게 보면 우리나라의 대학 언론은 대학 신문이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언론 상황이 바뀌어 종이 신문의 신뢰도와 영향력이 점점 쇠퇴하고, 방송(특히 텔레비전)과 인터넷 언론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지만, 그래도 대학가에서는 신문의 지위를 대신할 만한 대안적인 언론 매체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 영남대학교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해서, 1990년대 중반까지 만해도 영대신문이 독자들의 신뢰와 관심 속에 한 호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신문을 발행하는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유지해 왔다. 학생 기자들의 열정과 학생, 교수, 직원, 동문 등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학내 소식과 학술, 사회, 문화면의 알찬 기획기사, 연간 수 천만원 대의 광고 수입 등 여러 면에서 대학 신문은 전성기를 누렸다.
영대신문의 역사는 멀리 19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에서 같은 해에 구대신문(邱大新聞)과 청구춘추(靑丘春秋)를 창간하여 1967년까지 발행해왔고, 두 대학이 통합하여 영남대학교가 출범하면서 1968년 1월 24일 영대신문(嶺大新聞)이 탄생하여 대학언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동안 신문의 겉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초기에는 4면짜리 타블로이드판에 세로쓰기 국한문 혼용이던 것이 80년대 초에 8면으로 증면되고 가로쓰기 편집으로 바뀌었으며, 90년대 들어 한글 전용과 한글 제호로 환골탈태했다.
영대신문은 처음부터 학교의 공식 홍보지이자 학생 여론을 대변하는 대학언론매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균형 있게 수행해왔다. 그것은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시절부터 학생 기자들의 편집권을 폭넓게 인정한 자유로운 학풍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러한 기조는 영대신문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신문의 발행인이 총장이고 편집인이 주간 교수지만 기사의 기획과 취재, 편집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편집국장을 비롯한 학생기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 결과 다른 사립대학들처럼 학교 당국의 간섭과 전횡으로 편집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는 사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령 1991년 5·18 광주항쟁 특집호를 발간하면서 학생기자가 독자적으로 1면 전면에 “이 땅 어디에서나 광
주는 존재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공수부대 군인이 광주 시민을 총검으로 짓밟는 사진을 게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노태우 군사정부 시절인지라 긴급 교무회의가 소집되고 ‘배포 중지’ 결정이 내려졌으나 신문은 이미 교내에 배포된 뒤였다. 그렇다고 학생 기자나 주간 교수에게 징계나 보복조치가 내려지지는 않았다. 얼마 후 한 시사주간지는 바로 그 사진을 표지에 싣고 광주항쟁 특집호를 냈으니, 당시 학교 당국의 관용적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처사였던 셈이다.
대학신문의 가장 중요한 활력은 바로 학생 기자들로부터 공급되었는데, 청구춘추의 편집국장을 지낸 소설가 김원일 씨와 구대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정치인 최재욱 씨를 비롯하여 대학 신문 기자들은 신문사에서 살면서 학창시절을 온통 신문에 바쳤고, 졸업 후에도 대개 언론계나 학계, 문화계로 진출하여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칼라 인쇄와 컴퓨터 편집 등의 기술적 쇄신으로 신문 지면은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했으나 학생기자는 이른바 3D 업종으로 전락한 듯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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