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대학생의 정치 인식 변화
[그때 그시절]대학생의 정치 인식 변화
  • 편집국
  • 승인 2007.05.2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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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2005년
내가 대학을 다닌 1970년대는 유신헌법을 공부하여 ‘권력의 인격화‘라는 용어를 알아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대학에 와서도 유신헌법을 외우면서 고시공부를 하였다. 1975년 봄에 긴급조치 제9호가 공포되어 여러 대학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서클(동아리)이 모두 해체되고, 각 대학마다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서클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정치적인 이념서클은 거의 없어졌고, 있다고 하더라도 탈이념적 서클로 존속되었다. 몇 개의 이념서클은 비이념적 서클로 위장되어 있었고, 그 이념서클에 가입한 학생들은 나름대로 정치적 신념이나 인식이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다.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하여 언론보도가 제한됨으로 인하여 수도권의 다른 대학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정보 부재에 기인하는 바도 일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978년 11월에 일어난 우리 대학의 교련반대운동은 살벌한 유신정권하에서 지방대학으로서는 보기 드문 학생운동이었다. 단초는 나이가 어린 교련 교관(중위)이 나이 든 복학생에게 반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발생하였지만, 그 기저에는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반발하는 열혈 학생의 분노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태로 당시 우리 대학의 후견인이었던 최고통치권자가 격노하였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문교부(교육부)가 우리 대학에 1개월간 휴교명령을 내리는 엄청난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가 대학을 다녔던 유신정권하에서는 우리 대학이 데모(시위)로 인하여 수업이 방해받은 일은 거의 없었지만, 4?9, 5?6, 10?, 10?6 등 국가적 기념일에 학교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기억은 별로 없다. 1980년대에는 대자보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고,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무제한적으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정치적 의견은 삐라(전단지) 등을 이용하여 표출하였는데, 삐라의 제작에는 전문적 지식과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일반학생들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오일쇼크는 산유국이 아닌 우리나라를 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하였지만, 오히려 중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호기를 잡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중동의 오일머니의 영향으로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많이 진출하였고, 그에 따라 경기 활성화로 인하여 우리 대학 졸업생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대기업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대학 졸업생은 한 명이 서너 군데 기업체에 취업하는 등 학생들의 취업률은 높았기 때문에 이웃 국립대학생들이 자퇴를 하고 우리 대학으로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의 우리 대학 학생들은 긴급조치 제9호 치하라는 정치적인 격동기에 생활하면서도 그 풍랑에 크게 휘말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학생운동에 대한 언론보도가 전혀 없었고, 전화 등 통신수단의 미비로 인하여 우리 지역 밖의 소식에 대하여 정보 획득을 할 수 없어 정보 부재 상태에 있었다. AFKN(주한미군방송), TIME지 또는 NEWSWEEK지(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사 부분이 가위로 잘려나가거나 흑색 사인펜으로 지워진 채 배포되었다) 등 외신을 통하여 정보가 획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이나 토대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나름대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의견은 있었겠지만, 그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삐라)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학생들의 의견 표출 방법은 과격해졌고, 그래서 투석이나 분신자살, 점거농성 등으로 표시하였다. 이것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와 그 이후 5공 정권의 학생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이 결국 상승작용을 일으켜 학생들의 의견 표출도 극단적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1980년대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자보 등을 통하여 쉽게 전달할 수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TDX개발로 인한 전화의 무제한 보급은 오히려 정보 전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치적 의견 표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순히 구호만 외치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하여 1980년대 중반에 교수가 된 나로서는 투석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상태를 보고 국가 운영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다. 1980년대는 학생들의 정치적 참여가 활발하였고, 실제로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5년 현재 대학생들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1997년 겨울에 불어닥쳐 국가 부도 위기까지 몰고 갔던 IMF사태는 해방 이후 축적된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려 2005년 현재까지도 우리나라는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이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독재 정권 타도나 군부 정권 종식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2005년 현재로서는 자유 방만 민간정권이라서 타도 대상이 없기 때문에 대학생들 사이에는 목표 상실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 더욱이 경제적 기초의 몰락과 함께 일부 정치인의 정치에 대한 희화화는 대학생으로 하여금 더욱 정치적 무관심을 가지도록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으로 선거연령의 19세는 앞으로 대학 1학년생의 정치 참여로 이어져 또 다른 형태의 대학생의 정치 참여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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